정지 궤도에 묶인 우주 정거장으로 이어지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높이는 약 320키엔(3만 8천 킬로미터)이었다. 여객 터미널과 관제탑, 수출입 관리국과 검역소, 쇼핑 센터와 법률 사무소, 우주 여행사와 행성간 화물 운송 업체, 수많은 관공서와 기업과 유흥 시설이 엘리베이터 발착장이 있는 450층까지 다닥다닥 붙어 올라갔다.

발착장에서 운용되는 엘리베이터 상자의 숫자는 총 48개였다. 크기는 조금씩 달라서 작은 것은 150명을, 큰 것은 350명까지 태울 수 있었다. 어느 것이든 전자장 가속방식으로 움직였으며 우주 정거장까지 가는 데는 반나절로 충분했다.

스카리인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개찰구에 150여 개 국가 및 준국가 단체에서 통용되는 화폐 단위를 지원하는 카드를 내밀었다. 밋밋한 직육면체 모양의 개찰구 기계는 요금을 받아가며 맑은 종 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었고, 그는 플랫폼으로 나가 6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커다란 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하얀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1층 일반석의 복도는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며 겨우 지날 정도였고 좌우 측에는 검은 쿠션이 붙은 불편하고 좁은 좌석들이 줄을 지었고 끝에는 자동 계단이 보였다. 좌석 사이로 매끈하게 생긴 귀여운 로봇 안내원이 오가며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좌석이 어디 있는지 모르십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라고 떠들어 댔다.

스카리인은 로봇을 무시하고 사정없이 어깨를 부딪혀 대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동 계단에 올라타 2층을 지나쳐 3층의 1등석으로 향했다. 복도는 넓고 시원했고 진홍빛 쿠션이 붙은 좌석은 안락했다. 스카리인은 자기 자리를 찾아서 등받이를 눕히고 앉았다.

엘리베이터는 대기권 바깥까지 이어진 자기장을 따라 질주하며, 관성 제어 장치로 충격을 감쇄하고, 인공 중력장으로 편안하고 익숙한 중력을 만들었다. 창문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디검은 통로 안을 지나기 때문이다.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엘리베이터 통로 외벽에 설치된 수천만 개의 카메라에서 잡은 영상을 실시간으로 비춰 주는 스크린이 있었다. 스카리인은 스위치를 내려 동요하지 않는 푸른 하늘과 제자리를 고수하는 구름을 화면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머리 위의 전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

5시간 뒤, 불이 켜지면서 경쾌한 벨 소리가 귀를 때렸다. 스카리인은 군인답게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커에선 친절하지만 진실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6호 엘리베이터가 지금 막 우주 정거장 '에조리드'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시각은 잉야르-에졸 시로 오후 10시 35분, 우주 표준시로 오후 9시 40분입니다. 이용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오며, 내리실 때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카리인은 문득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말을 들어본 지도 퍽 오래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년인가 5년 전에 마적단에게 쫓길 때, 같이 있던 친구에게 들어본 게 마지막이군.'

찢어지고 더럽혀진 옷을 입고도 기품 있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검은 얼굴에 물방울처럼 투명한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강인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던 미남자를 회상하며, 스카리인은 즐겁게 미소 지었다.

'칼루아 가문(家門)의 샤아테 르윈 칼루아라고 했던가,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오겠지.'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렸다. '그 때는 목숨을 구해준 값을 어떤 식으로든 톡톡히 받아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는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플랫폼은 의외로 한산했다. 중간중간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에선 세계 각지의 뉴스가 스쳐 지나갔다.

'십자 연맹의 판테옥시우스 말크하임 총수(總帥)가 최근의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물어 경제 장관을 해임'

정지 화면으로 떠오른 것은 건방진 애송이, 정말 역겨운 낯짝이군.

'이드문 제국, 국립 황도대학(皇都大學)의 저명한 사회학자 알릭서드 맥라인 교수가 국민당 강경파의 폭력 노선을 공개 비판.'


화면에서 열변을 토하는 것은 은발의 장년 남성, 근엄하지만 친숙해 뵈는 인상은 아니군.

'에졸 시, 남구 운하의 구름다리가 새로운 관광 명소로 부상한 까닭은?'

무게감이 전혀 다른 뉴스가 같은 비중으로 섞여 있다니 정말 어이없군, 스카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우주 정거장, 에조리드는 지름 12키니(약 14킬로미터), 높이 1.1키니(약 1.3킬로미터)의 납작한 원통의 가장자리에서 무수한 돌출물이 솟아난 모양새였다. 한가운데에 연결된 궤도 엘리베이터의 개찰구를 빠져 나오면 곧장 중앙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것은 천연 잔디와 인조 태양과 인공 중력이 교묘하게 배합된 결과물이자 완벽한 허위로 신선하게 포장된 광장이었다. 사방이 뚫린 원형의 공간, 구둣발에 잔디가 서걱이는 감촉이 새롭고 코에는 상큼한 냄새가 스며들었고 14빌 높이(약 500미터)의 푸른빛 천장에선 눈부신 태양광이 반구형으로 빛났고 바닥에선 표준 중력이 발을 붙들었다. 잔디 위에는 징검다리마냥 화강암 포석이 놓여졌고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이 이파리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려 뺨을 어루만졌다. 건장한 청년과 귀여운 여인이 팔짱을 끼고 나무 사이를 거닐고, 나뭇가지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벤치에 앉은 중년 사내는 무릎에 소형 스크린을 놓고 경제 뉴스를 보는 데 열중했고, 어린애들은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며 공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음침한 사내는 목 깃을 세우고 그림자를 깔며 전진했다. 남자들은 그의 상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경계했고 여자들은 겁을 먹고 한 발짝 물러섰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후다닥 달아났다. 버림받고 외면당한 자의 걸음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만일 저들의 입장에서 이 상처를 봤다면 똑같이 질겁했을 테니까.' 그는 쓰게 웃었다.

광장의 끄트머리를 둘러친 하얀 콘크리트 경계석을 넘어서면 햇살이 힘을 잃고 조명과 가로등으로 밝혀지는 밋밋한 아스팔트 거리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한가로이 걸어 다녔고 도로에선 소형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느긋한 속도로 오갔고 딱딱한 건물은 말없이 일어섰다. 높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없는 대신에 낮은 천장과 차가운 불빛이 흔들리는 무표정한 일상, 그것이 상주 인구 4만 5천의 자치시(自治市) 에조리드의 현주소였다.

스카리인은 길가에 서서 로봇 택시를 잡았다. 그는 푹신한 뒷좌석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앉아, 아무도 없는 운전석에 대고 소리를 높였다.

"11가 274번지, 길가드 정비소."

"알겠습니다, 손님." 스피커에서 똑 부러지는 말투의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화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영화를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만, 입 닥치고 차나 몰아."

스카리인은 퉁명스럽게 말했고 스피커는 입을 다물었고 택시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바닷가 바람처럼 시원하게 내달렸다. 차창 너머의 건물과 사람들은 윤곽선을 잃어버리고 물컵에 떨어트린 한 방울의 잉크가 되어 눈밖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여기선 조명권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건물이 30층, 보통은 10층에서 20층 정도, 모두가 성냥갑처럼 비슷비슷해 보였다. 가로수는 공원에서부터 쉽게 눈에 띄었던 잉야르의 백송(白松), 하늘은 입체 영상으로 만들어진 느끼한 푸른빛, 특별한 볼거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에졸이 뜨내기들을 상대로 하는 도시라면, 에조리드는 그보다 한 술 더 뜨는 뜨내기들을 상대하는 도시였다. 잠시 쉬어가는 여행자들, 지상에는 아예 발을 붙이지도 않고 떠도는 유랑민들, 세금을 기피하고 이득을 추구하며 밀무역에 종사하는 악덕 상인들, 그들이 뿌리는 돈이 꿀과 젖이 되어 넘쳐 흐르는 거리였다. 여기 있는 것은 유흥가, 없는 것은 정직한 사람.

십자 연맹, 이드문 제국, 테리어스 성단 연합 사이 불명료한 국경 지대를 오가며 법률을 초월한 폭력을 행사하며 돈을 갈퀴로 긁어 모으는 해적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스카리인은 한때 자신이 그런 해적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이름은 해적의 대명사지!' 모순으로 뒤덮인 운명, 그것은 인생!

중심지에서 방사형으로 펼쳐진 도로를 타고 시 외곽으로 나가면 점차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납작한 창고 건물이 규칙적으로 늘어선 가운데 대형 물류 업체의 간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선착장'이 머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선착장이란, 우주 정거장의 바깥쪽에 튀어나온 4백여 개의 '부두'를 한데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었다. 고래와 같은 우주선은 마치 피뢰침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온 '부두'에 등을 기대어 쉬면서 사람과 화물을 뱉어냈다. 300여 개는 에조리드 시의 공영 부두였고 나머지 100여 개는 사설 부두였다.

사설 부두는 사업자의 재정 상태에 따라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것은 한 번에 대형 화물선 열 척이 정박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소형 요트 한두 척이 겨우 머리를 들이댈 정도로 작았다. 길가드 정비소가 자리잡은 257번 부두는 3급 화물선 다섯 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였지만 지금은 압도적인 크기의 중전함(重戰艦) 한 척이 그 자리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에조리드에서 군함을 수리하고 정식으로 유통되는 군용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정비소는 오직 하나, 길가드 정비소뿐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소장인 레비 길가드는 랏스 연합 해군의 정비반장이었고, 십성 동맹은 그에게 무기의 유통 권리를 줬으며, 스카리인은 무기를 살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창고도 뜸해지고, 황량한 아스팔트 벌판에 집채만한 대형 트럭과 2층 버스와 조그마한 소형 택시가 열병식을 하듯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색 지면에서 푸른빛 천장까지 가로막은 광택 없는 잿빛의 내벽(內壁)은 좌우로 넓게 펼쳐져 거대하고 답답한 원형의 담장을 쳤다. 벽에는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 육각형의 문이 달려 있어 마치 벌집을 방불케 했다.

높은 곳의 커다란 문에선 공 모양(球形)의 비행 로봇이 내려와 트럭에 짐을 실었다. 낮은 곳의 문을 통해 플랫폼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버스나 택시에 올라타 시내로 들어갔다. 중간 부분의 문에선 컨베이어 벨트가 내려와 화물을 부리기도 했다. 주변은 모터 소리, 엔진 소리,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스카리인이 탄 택시는 오른쪽으로 꺾어져 내벽을 끼고 도는 8차선 도로에 진입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트럭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렇게 2, 3분을 더 달리다가 왼쪽으로 머리를 틀어 257번 부두의 여객 플랫폼 앞에서 멈췄다.

스카리인은 카드로 요금을 치르고 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은 단단한 검은색이었고 높이는 어른 키보다 조금 컸고 길이는 네댓 명이 나란히 설 정도였다. 끄트머리에 있는 낡아빠진 자동 계단을 타고 플랫폼에 올라서면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군데군데 본래의 밝은 잿빛을 잃고 침침한 숯 색깔로 변색된 문은 양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리는 형태였고 꼭대기에는 [길가드 정비소]라는 상호가 검은색으로 양각되었으며 눈높이 부근에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두툼한 금속판이 달려 있었다.

스카리인은 금속판 위에 손을 얹고 주변의 소음이 가라앉을 때를 틈타 큰소리로 말했다.

"샤카무트 837, 에카무드."

카메라가 작동해 그의 홍채(虹彩)를 찍고 금속판은 지문과 성문(聲紋)을 읽어서 비교하고 분석해 결론을 내렸다. 문은 열려야 한다고.

지하감옥의 자물쇠를 돌리는 소리, 철컥, 그리고 초전도 레일 위로 육중한 쇳덩이가 말없이 미끄러지며 어두컴컴한 창자를 드러냈다. 정비소로 이어지는 깊고 고요한 원형의 통로, 천장에서 둥그런 노란 불이, 벽에선 주홍빛의 네모난 불이 점점이 켜져 바닥에 물방울처럼 떨어져 흐르면서 검은색 자동 복도에 번져 나갔다.

스카리인이 발을 올려놓자 복도가 낮게 울면서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가끔 고장난 불빛이 깜박이기도 하고 먼지가 들썩이며 피어 오르기도 했지만 복도는 결코 멈추지 않고 일직선의 통로를 끈질기게 기어갔고 스카리인은 그 위를 규칙적인 속도로 걸었다.

어느 정도 갔을 때, 갈림길이 나타났다. 앞에는 새로운 자동 복도가 있었고 오른쪽은 평범한 철문으로 이어졌다. 스카리인은 주저하지 않고 복도에서 내려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낡아서 가장자리의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 가운데에는 공책 크기만한 스크린과 버튼이 붙어 있었다. 그가 마악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낮게 울면서 옆으로 미끄러졌다.

"기다리다 코가 빠지는 줄 알았네, 데스."

착 달라붙는 하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콧등을 문대며 능글맞게 웃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스카리인은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래? 정말로 자네 코를 잡아 빼고 싶어지는군, 레비."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크게 휘어진 매부리코에 불룩 튀어나온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 조금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팔뚝과 가슴과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에 덕지덕지 주머니가 붙은 실용적인 옷을 입은 사내, 그는 레비 길가드 소장이었다.

"그 망할 놈의 말버릇은 여전하군. 자, 어서 들어오게." 길가드는 웃으며 손짓했다.

정비소 내부는 타원형이었고 그 넓이는 어지간한 실내 운동장에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3층 건물 높이의 천장에선 밝은 불빛이 쏟아져 내렸고 하얀 제복을 입은 직원들은 직사각형 스크린이 달린 책상 앞에 앉아 바삐 업무를 보았는데 그 숫자는 쉰 명 남짓했다. 낡은 난쟁이 로봇들은 때로는 성급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삐그덕 소리를 내며 좌우로 오가면서 땟국물이 끼고 먼지가 자욱한 바닥을 쓸고 닦듯이 했다.

사방의 벽을 통째로 메운 스크린에는 깊고 어둡고 고요한 바다가 가득히 깔리고 그 위에 금속과 금속을 얽어 만든 추레하고 투박한 부두가 겹쳐지고 전장(全長)23비그(약 820미터)의 고래등처럼 묵직하고 웅장한 쇳덩이가 더해졌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흑철색 몸통, 창끝처럼 뾰족한 뱃머리, 생선 지느러미처럼 넉넉한 배끝, 그것은 응징의 날개이자 파멸의 날개이자 죽음의 날개, 에카무드였다. 수십 개의 두껍고 굵직한 케이블이 연료를 공급했고 백여 개의 기계팔이 무기를 장착했고 수백여 기(機)의 로봇이 돌아다니며 짐을 실어나르고 외장(外裝)을 교체하고 작업 상황을 꼼꼼히 점검했다.

"올라가지. 레인 양이 한참 전부터 자넬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참하고 어린 아가씨를 꿰어 차고 다니다니, 자넨 정말 못 돼먹은 남자라니까."

길가드는 왼쪽 벽에 붙은 계단으로 가면서 그렇게 말했고, 스카리인은 이렇게 대응했다.

"그렇게 참하고 어린 아가씨를 건들지 못해 안달이 난 자네도 못 돼먹긴 마찬가지야."

"이거 한 방 먹었군." 길가드의 얼굴에서 경박한 웃음이 가시고 진지함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습격 당했다면서? 레인 양 걱정이 태산 같더구만."

스카리인을 알아보는 고참 직원들은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스크린에 떠오른 입체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조작 패널을 두들기고 있었다.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지 않는 한 돌아보지도 않을 기세였다.

그들이 밋밋한 철판이 깔린 계단에 발을 올리자 텅, 텅, 발끝에선 운명의 북소리가 들렸다.

"자동 계단으로 바꿀 계획은 여전히 없는 건가?" 스카리인이 묻자,

"이봐, 난 여기서 하루 30시간 중 24시간을 일한다고. 이렇게나마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발이 아예 굳어져 버릴 거야." 길가드는 엄살을 부렸다.

45도 각도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바꾸고 다시 한 차례 방향을 바꿔서 올라가면 지저분한 얼룩이 묻은 우툴두툴한 회녹색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왔다. 좌우로 흔들리는 쇠 난간을 짚으며 복도 끝으로 가면 검붉게 녹슨 철문이 보였는데 눈높이에선 '소장실'이란 명패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길가드가 다가서자 문이 끽끽 비명을 지르며 왼쪽으로 밀려났다.

"아가씨, 애타게 기다리던 애인을 잡아 끌고 왔습니다."

소장실은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문 맞은 편에 넓은 책상이 놓여졌고 낮은 장식장과 작은 냉장고가 세워졌다. 오른쪽 벽에는 대형 스크린이, 왼쪽 벽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휴양지를 그린 싸구려 풍경화가 한 점 걸렸는데 그 밑에는 백송(白松)의 나뭇결을 살린 소박한 원탁과 의자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세시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도하는 눈빛으로 스카리인을 바라봤다.

"주인님, 가셨던 일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깨끗하게 끝났지."

스카리인은 심문에 관해서 말했지만, 세시나가 알고 싶어했던 건 다른 문제였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 그거? 물론 괜찮았지. 안 그래도 안톤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라더군. 레비, 자네한테도." 스카리인은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유리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들기며 길가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 그나저나 일의 진행 상황은 어떤가?"

길가드는 책상 위의 패널에 손을 갖다 대고 "에카무드 작업 상황 보고"라고 말했다. 스크린에는 부두에 정박한 에카무드의 모습이, 곧이어 평면도가 떠올랐고, 뒤이어 숫자와 글자가 반투명하게 겹쳐졌다.

"에너지 보급은 좀 있으면 끝날 걸세. 외부 장갑의 손상 부위의 점검과 교체 작업은 꼬박 내일 오전까지 걸리겠군. 그때까지는 유트라이드의 14식 충격 어뢰, 8식 고폭 어뢰, 아이크만의 22식 요격 어뢰도 모두 장전될 거야. 문제는 12번, 13번 보조 엔진인데……" 길가드는 장갑을 벗어서 가슴의 주머니에 끼우고 맨손으로 턱을 긁적였다. "출력이 떨어지는 원인이 뭔지 규명조차 할 수 없었어. 미안해."

"역시 여기선 힘든 건가?"

스카리인의 물음에 길가드는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보급이나 기본적인 정비가 한계라고. 제대로 고치려면 하루라도 빨리 하르라비 영감님을 찾아가는 편이 좋겠지." 그러더니 냉장고를 열고 주스 병을 꺼냈다. "시원하게 마실 거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떻겠나?"

그는 원탁에 유리컵 세 잔을 올려놓고 붉은빛이 감도는 과일 주스를 따랐다. 세시나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주스를 홀짝이며 자신의 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뷔스로 직행할 생각이십니까?"

"보조 엔진 2기라, 아니,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하르라비를 찾는 건 뒤로 미뤄도 되겠지." 스카리인이 답했다.

"그래도 서너 달 안에 영감님한테 들러 보게. 슬슬 출력 계통을 총체적으로 손볼 때가 됐으니까 말씀이야."

길가드는 말을 끝맺으며 슬쩍 눈짓을 보냈다. 세시나를 힐끔거리는 눈짓.

스카리인은 재빨리 그 의미를 파악하고 세시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시나, 나 없는 동안 작업을 지켜보느라 고생 많았다. 넌 그만 나가서 천천히 시내 구경이나 하면서 쇼핑이나 즐겨라."

"예?"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들어가 있어."

마음씨 고운 소녀는 남자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영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 싶어하는 사내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세시나는 지금 이 자리에선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세시나가 검은색 가죽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스카리인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알겠지? 느긋하게 쉬다가 호텔에 들어가서 일찍 자 둬."

"예, 주인님.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길가드님."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자 길가드는 활짝 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바래다 주도록 할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하고 천천히 일 보세요." 세시나는 다시 고개 숙여 절을 올렸다.

그녀가 나가고 문이 윙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길가드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아쉬움으로 돌변했다.

"정말 착한 아가씨야."

"알고 있어." 스카리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나 하자고 그녀를 쫓아내라고 한 건 아니겠지? 무슨 용건인가?"

"실은 클라루즈 상사에게서 정보가 들어왔어." 그는 책상의 패널에 손을 대면서 말을 이었다. "클라루즈가 보낸 기록을 재생해 봐."

스크린이 반으로 분할되면서 오른쪽에는 여러 줄의 텍스트가, 왼쪽에는 클라루즈 상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낯빛은 자못 심각했다.

[데스,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야. 드레이트 렉클 중령은 암살자만 보낸 게 아닌 모양일세. 십자 연맹에서 입수한 최신 정보에 따르면 바다에서도 자네를 노리고 있다는군. (손가락으로 오른쪽의 텍스트를 가리키며)이게 바로 녀석이 만든 문건의 초안이야. 알데히트 4 해역에 연맹의 화물선이 지나간다는 정보에는 아예 귀도 기울이지 말게. 함정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 작전을 세운 뒤로 지난 몇 달간 알시트 해역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했다더군. '유령선'의 정체도 이 녀석이었겠지]

클라루즈 상사는 헛기침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문건이 새어나간 걸 눈치채고 다른 곳에 함정을 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이번 원정(遠征)에선 믿을 수 없는 정보는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알겠지?]


화면이 꺼지면서 익숙한 공백이 돌아왔고 스카리인은 허리를 수그리고 고개를 떨구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군. '그녀'가 그곳에 돌아왔을 리가 없지……'

그의 입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실망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에서 비롯된 한숨이자, 불확실한 운명에 기대어 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갑자기 왜 웃는 건가?"

숙달된 정비공이 설명을 요구하자 노련한 해적은 고개를 저었다.

"원정은 모험이야. 여행길에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정보가 옳고 그른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순전히 운이 좋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감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해. 그런데 저런 말을 하니 웃을 수밖에 없지."

"그 친구는 자네를 걱정해서 한 말이야." 길가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냉장고 안쪽에서 푸른 도자기 병을 꺼내 들었다. "어쨌든……간만에 좋은 술이 들어왔으니 한 잔 해야지. 자네 고향, 에딜리온의 청주(靑酒)야."

괴로운 시대가 씁쓸한 맛으로, 아름다운 기억이 투명한 하늘빛으로 담긴 술, 그것이 에딜리온의 청주였다. 이 술은 한 뼘 높이의 도자기로 만든 뿔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켜야 제 맛이었다. 길가드는 술을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술꾼이었기에 뿔잔도 잊지 않고 꺼내 들었다.

스카리인과 길가드는 푸르른 술이 찰랑거리는 하이얀 뿔잔을 챙 소리가 나게 맞부딪히더니 숨도 쉬지 않고 쭈욱 들이켰다. 고드름처럼 차갑게 목 줄기를 넘어가며 온몸을 후끈후끈 달구는 고향의 향기, 취기가 맴돌며 옛일을 일깨웠다.

"반더빌츠 박사도 이 술을 참 좋아했었지." 길가드의 말이었다.

"그랬었지." 스카리인은 선선히 동의했다. "하지만 에릭은 너무 술이 약했어."

한 잔만 마셔도 비틀거리고 두 잔째에 쓰러지던 친구의 얼굴 위에 언제나 그와 함께 있던 여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길가드 역시 그녀의 존재를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 똑똑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고 잘난 체 하기 일쑤인데, 그 사람은 전혀 그러지 않았거든. 그 부인도 정말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마치 세시나처럼……"

길가드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으로 술병을 기울여 빈 잔을 채웠고 스카리인은 뿔잔에 담긴 맑은 하늘에 영혼을 적시며 짙은 아쉬움을 허공에 토했다.

"쓸데없이 착한 사람들이었지."

"데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아니, 아니야.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생각해 보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추억은 눈깔사탕과 비슷하다. 오랜 시간 주머니에 낑겨넣고 다니는 바람에 무참하게 일그러진 눈깔사탕일지라도 입안에 넣으면 좋은 냄새를 풍기며 혀 위에서 부드럽고 달콤하게 녹아 내린다. 추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슬프고 가슴 아린 경험일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적인 추억이 된다.

그러나 지금, 두 사내는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옛 일을 추억하며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비감함에 젖어 들었다.

"자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길가드는 무겁게 동의하며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망각의 늪으로 돌려 보내는 차가운 생명수를 들이마셨다. 스카리인은 조용히 말했다.

"만일 내가 조금만 더 영리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더라면, 에릭은 그렇게 어이없이 죽지 않았을 거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정직하고 담백한 삶을 오래도록 누렸을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길가드는 흔들리는 손으로 술을 따르며 실소를 터뜨렸다. "누가 알았겠어? 요새의 사령관이란 작자가 적군의 꾀임에 홀라당 넘어갔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고? 그 순간을 요행히 넘겼더라도 2중 3중으로 쳐진 덫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끝내는 목숨을 잃었을 거야!"

그는 네 번째 잔을 호쾌하게 마시고 취기가 올라 비틀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운명이었던 거야.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다고. 결코 자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후회할 필요는 없어. 잊어버려. 모두 잊어버리라고!"

스카리인은 마음을 비우듯이 술잔을 비우고 꿈을 버리듯이 빈 잔을 원탁에 내려놨다. 창백하게 휘어진 뿔잔은 옆으로 쓰러지며 슬피 울었다.

"나는 후회하는 게 아냐."

"그러면?"

흐리멍텅하게 풀린 길가드의 눈동자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스카리인은 이렇게 뇌까렸다.

"지난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뿐이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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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력자

 

뮬 소령은 부엌 탁자에 병 맥주를 내려놓고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숨을 허덕이는 질리언 상사와 횡설수설 떠들어 대는 통제실 요원을 보면서, 평화로운 오후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들을 따라 지하 심문실로 내려가 보니 부하 하나는 기절해 있었고 또 하나는 자신이 게워낸 역겨운 토사물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의자 위에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쪼그리고 앉은 포로는 오들오들 떨며 두려움을 뚝뚝 발등에 눈물로 떨궜다. 그리고 맥 빠진 목소리로 소중한 정보를 술술 불어댔다.

그녀는 자기 소개부터 시작했다. 이름은 나가 울바흐터, 계급은 소위, 소속 부대는 1662사단, 청소부 복장으로 떨어져 산산 조각난 사람은 직속상관인 아인작스 기든 중위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스카리인의 암살, 호텔 보안 장치를 손본 것은 에졸에 있는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스카리인이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번 작전을 계획한 사람은 누구지?"

"저와 기든 중위를 지상군에서 차출해 이번 작전에 투입한 사람은 해군의 레……렉, 렉클 중령이었어요.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이 이번 작전을 계획하고 추진한 것 같아요."

그녀가 더듬어댄 이름에 스카리인은 눈을 번득였지만 깊이 추궁하진 않았다.

즐겁게 지저귀는 노래 소리는 계속되었다. 연맹군 중앙 정보부에선 에졸에 20여명의 정보원을 파견했으며 그 근거지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있다는 사실,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위장 신분, 기타 등등, 뮬 소령은 황홀한 눈빛으로 노래에 열중했다.

그녀가 입을 다물 즈음에는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을 일망타진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뮬 소령은 내심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겉으론 위엄 있는 무표정한 낯빛과 딱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는 부엌 냉장고를 열고 흑맥주 한 병을 스카리인에게 내밀며 인사치레를 하는 것을 잊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스키더 소령."

맥주병을 받아 들며 스카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하지만 당신 부하들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힌 것 같아서 미안하군요."

그러자 뮬 소령은 영 마뜩찮다는 듯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들한텐 좋은 경험이 됐겠죠.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비명 소리를 들은 정도로는 그렇게 겁에 질릴 리가 없을 텐데요."

"그건 '역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폭발하는 그녀의 감정이 제 사념을 따라 밀집된 공간에 퍼져나가면서 다른 사람한테 들러붙은 거죠."

뮬 소령은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만요, 심문실이 좁긴 해도 그 공간에 사념을 확장시키려면 적어도 3급 이상의 힘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내내 감쇄장치가 작동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힘이……?"

스카리인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제 실수입니다. 예상보다 사념의 감소폭이 훨씬 적더군요.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라고 생각하고 힘을 썼는데, 실제로는 너무 지나쳤던 겁니다."

감쇄장치 안에서 그만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섣부른 불신은 금물이었다. 뮬 소령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스키더 소령,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 포로의 공포심이 역류했다면 사념을 쓴 당사자인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헌데 당신은 멀쩡하고 애꿎은 제 부하들만 겁에 질려 버둥댄 이유가 뭡니까?"

스카리인은 빈 맥주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 창문턱에 기대어 앉아 그의 추궁을 차갑게 받아넘겼다.

"나는 공포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맹세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맹세이길래 그렇게까지 집착하시는 겁니까?"

뮬 소령의 물음에 스카리인은 답을 피했다.

"제 개인적인 비밀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를 새빨갛게 달구는 불꽃을 보면서 뮬 소령은 그 맹세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살육의 맹세겠지!'

 

*

뮬 소령은 스카리인과 함께 카디엔 중위의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때마침 점심 시간이 되었기에, 그는 자신이 아는 최고의 스테이크 가게로 스카리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침나절부터 구역질을 해댄 탓에 완전히 식욕을 잃어버린 카디엔 중위는 운전석을 지켰다.

한입 물면 향기롭고 촉촉한 육즙이 배어 나오는 최고의 물소 등심 스테이크의 맛에 스카리인은 솔직한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둘은 부지런히 고기를 잘라 먹고 사념과 말을 섞어가며 환담을 나눴다. 뮬 소령은 본부에서 '유령선'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고 스카리인은 너그럽게 이해했다.

- 그런데 '포로'와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은 어쩌실 겁니까? - 스카리인의 물음이었다.

- 좀 더 조사를 진행한 다음에 '본사'의 지시를 따라야겠죠. 아마 포로는 당분간 이쪽에서 보호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본사'로 이송할 테고, 정보 조직은 섣불리 분쇄시키기보다는 거꾸로 이용해 먹는 쪽을 선택하겠죠. - 뮬 소령은 사념으로 자신의 예측을 늘어놓고,

"그런데 오후엔 뭔가 특별한 예정이라도 있으신지요?" 입으론 질문을 던졌다.

"예, 3시에 제 친구네 병원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는 건가요?"

"제가 환자로 보입니까?"

뮬 소령은 고기를 우물대며 스카리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혈색도 좋고 눈빛도 형형하고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이런, 당신이 환자라면 전 지금 당장 죽어야 하는 중환자겠군요.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면, 건강 진단입니까?"

"예, 그렇죠."

- 친구분 병원보다는 우리 군 병원의 의료진과 설비가 훨씬 훌륭할 겁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게 편의를 봐 드리죠 -

- 아닙니다. 단순한 건강 진단에 동맹군의 힘을 빌리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죠. 뜻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


뮬 소령은 스카리인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참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선약을 지켜 친구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이리라 여겼다.

"친구분 병원은 어디 있습니까?"

"북구 4가에 있습니다."

- 4가라, 좀 멀군요. 카디엔 중위를 시켜서 모셔다 드려야겠군요 -

"깊은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부사장님." 스카리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려야죠."

식사를 마친 후에 뮬 소령은 스카리인을 조수석에 태우며 카디엔 중위에게 눈짓을 보냈다.

 - 이 친구를 잘 바래다 주게. 어쨌건 이번에 헤어지고 나면 당분간은 다시 볼 일이 없을 거야. 그리고 가는 길에 차멀미 조심하게. 또 토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

마지막에 붙은 모욕적인 농담을 힘겹게 꿀꺽 소리 내어 삼키면서 카디엔 중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고자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답했다.

 - 알겠습니다 -

자존심에 상처 입은 부하를 배려하지 않는 매몰찬 상관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카디엔 중위는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지난 800년간 무분별한 개발과 확장이 되풀이된 끝에 북구의 교통망은 얽히고 설킨 실타래 꼴이 되었다. 철도와 차도는 불규칙하게 이어지고 무계획적으로 연결되어 동서남북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고 여기서 1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조차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스카리인이 부른 주소를 찾아 붉은 스포츠 카는 넓은 차도를 정열적으로 치닫고 좁은 커브 길을 아슬아슬하게 돌며 어그러진 거미줄처럼 복잡한 도로망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렀다. 하지만 2가와 3가에서 지독한 정체를 만나 거북이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바람에 무려 50여분이 지난 뒤에나 목적지인 4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4가는 외부와 물품을 거래하는 무역회사, 그들의 짐을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화물업체, 현금을 신용으로 혹은 그 역으로 환산해 주는 은행과 대부업체가 공존하는 거리였다. 시원시원한 도로를 끼고 위로 높직한 빌딩과 옆으로 넓은 창고 건물이 병존했다.

차는 복잡한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한 블록을 올라가 30층짜리 은행 건물의 옆에 난 좁은 골목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구불텅한 골목길 좌우로는 일용품을 파는 잡화점이나 팜플렛을 찍는 인쇄업체, 그리고 직장인을 상대하는 병원 건물이 늘어섰다.

"여기군요."

카디엔 중위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스포츠 카가 속도를 줄이며 길가에 내려앉았다. 스카리인은 문을 열고 내리며 작별을 고했다.

"고마웠네, 중위. 다음에 또 보세."

"예, 그때까지 몸조심 하십쇼, 스키더 소령님." 카디엔은 반쯤은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스포츠 카는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공중에 떠올라 몸을 비틀어 되돌아갔다. 상처 입은 얼굴은 황톳빛 보도 블록을 지나, 한 사람의 인생만큼이나 오래된 기색이 역력한 낡고 조그만 4층짜리 다갈색 벽돌 건물로 들어갔다. 무거운 구둣발은 고소득을 보장해 준다는 포스터를 투명한 유리문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금융 업체를 못 본체 하고 구석의 좁은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조한 소리를 울리며 2층을 지나 3층의 '자비오프 내과'에서 우뚝 멈춰 섰다. 불투명하고 묵직한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손잡이 자리에는 동그란 구멍이 무수히 뚫린 금빛 금속판이 붙어 있었는데 스카리인은 그 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톤, 나야."

철컥, 역사처럼 오래된 잠금 장치가 풀리면서 문이 스르릉 미끄러졌다. 그는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결벽증에 걸린 사람이 집요하게 닦은 부엌 바닥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접수대엔 아무도 없었고 대기실의 길쭉한 가죽 소파에는 살짝 먼지가 내려앉았고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오후 2시 40분 근처에서 오락가락했다. 정면에 있는 '원장실'이란 플라스틱 명패가 붙은 작은 유리문이 왼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자비오프가 얼굴을 드러냈다. 코에 걸친 돗수 높은 안경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가운은 의사로서의 권위를 보장해 주는 소도구였다.

"벌써 온 건가? 약속은 3시로 잡았을 텐데."

"늦는 것보다야 이른 게 훨씬 낫지."

"그건 그렇네." 자비오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자넨 발에 그림자가 붙어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니 약속 시간에 조금 이르거나 늦을 수도 있겠지. 어쩌겠나, 한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내가 이해해 줘야지."

"이해해 줘서 고맙네." 스카리인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럼 '점검'을 부탁하네."

"그래." 자비오프의 얼굴에 조금 침울한 그림자가 내려 앉았다.

자비오프가 몸을 반 바퀴 돌려 왼편에 있는 '진찰실'이란 명패가 붙은 널찍한 유리문 앞으로 다가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진찰실은 넓지만, 답답한 공간이었다. 정면의 넓고 불투명한 유리창에선 부드러운 햇빛이 드리워져 바닥에 깔린 네모난 도기(陶器) 타일에 은은함을 더했다. 왼쪽 귀퉁이에는 직선적이고 딱딱한 나무 책상과 푹신한 쿠션이 달린 의자가, 오른편 벽면에는 새까만 정적으로 가득한 넓디넓은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실내 면적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대형 인체 스캐너가 놓여졌다.

고상하지만 차가운 황금빛이 흐르는 거대한 원통형 스캐너는 반구형 받침대 위에서 30도 각도로 기울어진 채 누군가를 품에 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 부분에는 회전식으로 열리는 문이 있었고 아래 위로는 검은색 돌출부가 길게 튀어나왔다. 바로 옆에 놓인 투박한 책상 위에는 분석 장비와 계기판, 스크린, 조작 패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자비오프는 그 앞의 군청색 회전의자에 앉아 패널의 스위치를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전원을 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얼마든지 기다리지."

스카리인이 그렇게 말하며 창턱에 걸터앉자 희미한 그림자가 원통형 스캐너 위에 휘어지듯 깔렸다. 분석 장비와 계기판은 파랗고 노란 불을 깜박이며 짤막한 소음의 합중주를 연주했고 스캐너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진동하자 그림자도 함께 몸을 떨었다. 조그만 눈을 반짝이고 형형색색의 빛으로 얼룩진 얼굴을 위아래로 주억이며 자비오프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어디 보자. 시동이 걸렸으니 일단 문부터 열어놓고 기다리도록 할까?"

책상의 좌우 끄트머리에서 길게 일어선 철봉 사이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스크린이 늘어섰다. 눈높이보다 약간 높은 곳에는 대형 스크린에는 '검사 중'이란 글자가 입체 영상으로 떠오른 대형 스크린이, 그 아래에는 스캐너의 평면도가 떠오른 조그만 스크린이 있었다. 소시지처럼 굵은 손가락이 평면도의 한 지점을 누르면서 탁한 목소리가 명령을 내렸다.

"개방."

저녁에 우는 까마귀 소리처럼 불유쾌한 소음을 짧게 뱉어내며 문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열렸다. 바닥에 얇고 불편한 시트가 깔린,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만한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내벽에 줄지어 붙은 흐릿한 푸른색 조명은 느리고 규칙적인 속도로 깜박였다.

"이것도 간만에 보니 정겨울 지경이군."

스카리인이 그다지 진실됨이 섞이지 않은 미소를 덧붙이며 말하자, 자비오프가 대뜸 핀잔부터 줬다.

"자네가 정을 주는 게 다 있었나?"

"가끔 있지."

"그래 봐야 칼과 창, 권총과 대포, 그리고 전투함과 어뢰 같은 거겠지. 따뜻한 온기도 없고 뜨거운 정열도 없고 깊은 사랑도 없는 차디찬 쇳덩이에 정을 붙여봐야 무슨 소용인가?"

"자넨 아직 모르나 본데…… 그 쇳덩이들은 내 손짓에 맞춰 추호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배신자들의 뜨거운 피를 빨아먹는 믿음직하고 충직한 하인이야.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정을 주겠나?"

"자네다운 궤변이군." 자비오프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궤변? 아냐, 이건 진실이야. 경험에서 배운 진실이란 말야." 스카리인은 진지했다.

스캐너의 진동이 멎었다. 스크린에는 '이상 없음'이란 글자가 떠올랐고 자비오프는 장비를 조작하던 손을 잠시 멈추며 이렇게 말했다.

"뭐, 아무튼 이제 그만 입 다물고 스캐너 안에 들어가기나 하게."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이며 평면도 하단에 표시된 일련의 명령어를 차례로 클릭하자 받침대가 움직이며 스캐너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스카리인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선 스캐너 안에 들어가 손을 가슴 위에 포개어 얹었다.

"자, 원하는대로 들어왔으니 어서 관 뚜껑이나 닫게."

"걱정 마, 곧 닫아줄 테니까."

자비오프는 평면도의 문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끼익끼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짧은 어둠, 그 뒤에 창백한 푸른 빛이 스캐너 내부를 밝혔다. 그리고 머리 부근의 스피커에서 자비오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부터 스캐너를 내리겠네."

받침대가 서서히 움직이며 스캐너의 경사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꾸고 스카리인은 일어선 상태에서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는 딱딱한 베개에 머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투덜거렸다.

"이놈의 베개는 여전히 불편하군. 바꿀 생각은 없나?"

"기껏해야 3, 4분 누워 있을 텐데 별걸 다 따지는군. 그냥 좀 참아. 자, 이제부터 스캐닝을 할 테니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푸른 빛이 노란 빛으로, 뒤이어 붉은 빛으로 바뀌면서 모기가 웅웅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찌르며 빛이 깜박거렸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은 멀리 유배당해 영원과도 같은 어두운 순간들이 가슴을 짓눌렀다. 깜박, 깜박, 단조롭게 점멸하는 빛이 망각의 최면을 걸지만 사나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저항한다.

찰나가 모여 순간이 되고 순간이 지나 한참의 시간이 되었다. 모기 우는 소리가 잦아들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이제 그만 나와."

기어가 회전하고 받침대가 돌아가며 스캐너가 일어서고 끼기긱, 기분 나쁜 마찰음이 귓전을 때리면서 밝은 빛이 망막에 달려들었다. 스카라인은 눈을 깜박이며 스캐너에서 몸을 빼냈다.

"3분, 4분이래도 이 안에선 30분, 40분처럼 느껴지는군."

"심리적인 착각이라는 거지. 자, 이제 전문가의 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게."

스카리인은 다시 책상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전문가의 분석 결과가 아니라 컴퓨터의 분석 결과겠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나란 사실을 잊지 말게."

"어련하겠나. 하지만 안경을 쓰고 봐야 할 정도라면 자네도 눈을 아예 새로 박아 넣는 게 어떤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둬. 어디 보자……"

분석 장비들이 새 울음소리를 지저귀며 대형 스크린에 입체 영상이 떠올랐다. 한가운데에 스카리인의 몸뚱이가, 위에는 퉁퉁 불은 국수다발을 연상시키는 잿빛 뇌의 단면도가, 옆에는 위장의 단면도가, 여기저기에 대동맥과 대정맥의 단면도가 흩어졌다. 모든 입체 영상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상 없음'이란 글자가 겹쳐졌다. 다만 대뇌의 한 단면에는 끈적끈적한 진녹색이 암세포처럼 넓게 번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글자가 나열되었다.

"아직까진 이상 없군." 자비오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숫자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스카리인은 손바닥으로 넓은 가슴을 소리 내어 두들겼다. "보다시피 난 이렇게 젊고 건강하니까."

"데스, 자네는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리다구. 그런데도 여전히 20대 초반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하나?" 자비오프의 입가가 일그러지고 눈 밑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였고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거지만 자네의 젊음과 힘은 목숨을 담보로 잡은 일시적인 거야.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고단한 삶에 찌들은 중년의 의사는 한숨을 쉬고 가혹한 삶에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는 아무런 반론도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은 따사로운 햇살을 실내에 깔았다.

"난 아직도 후회하고 있네. 자네에게 그 위험천만한 물건을 이식해서 복수심에 불을 지피는 게 아니었어. 어그러진 얼굴을 치료해서 고통스런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평화로운 삶으로 이끄는 것이 의사로서 당연한 의무였다고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자비오프는 무력하게 한탄했지만,

스카리인은 눈을 지긋이 감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 만일 자네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이걸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똑 똑 두들긴다) 이식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삶의 목적을 잃고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렸겠지." 그는 심장에 박힌 말뚝처럼 고통스런 과거를 떠올리며 음산한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거짓으로 치장된 싸구려 평화가 아니야. 배신자들의 피를 들이키고 그 맛에 흠뻑 취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지."

자비오프는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은 순진한 친구였고 로리아는 훨씬 더 순진하고 착한 여인이었지. 그들의 넋은 자네가 그렇게 비싼 피값을 받아내길 원치 않을 거야."

"안톤. 그들은 이미 죽었어." 그 냉정한 눈빛에 따사로운 햇살마저 얼어붙는 듯 했다. "죽은 사람들이 그런 걸 일일이 따질 리가 없잖아?"

"그래,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뭔가? 순전히 들끓는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싸우는 건가?"

온건한 의사가 은근한 비난을 담아서 말하자 상처 입은 군인은 손을 휘저어 물리쳤다.

"아니, 절대로 아니야.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고. 자네도 해군 군의관이었으니까 알고 있을 텐데? 우리들의 구호를."

자비오프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양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으며 남아 있는 기억을 입 밖으로 조그맣게 끄집어 냈다.

"알고 있지. 연합의 깃발에는 충성을, 상관에게는 신뢰를, 전우에게는 우정을, 연인에게는 사랑을. 그러나 배신자에게는……" 의사가 말 끝을 흐리자……

"……죽음을!" 군인이 단호하게 마무리 지었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스카리인은 독백했다.

"전쟁의 피구덩이에 빠지고 배신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 친구도, 가족도, 사랑하던 여인도, 하나 둘씩 차례로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 남았지……" 그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쳐 쾅 소리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그래서 싸우는 거야. 먼저 죽어간 전우들에게 내가 살아남은 이유를,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게, 스스로의 목숨을 깎아먹는 길을 선택한 데 대한 변명인가?" 자비오프는 이마를 짚고 신음 소리를 냈다.

"내가 구차한 변명이나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나? 그건…… 죽음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맹세야."

자비오프는 할 말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부르릉 모터가 회전하면서 창문이 하나 둘 차례로 위로 접혀 올라가면서 밝은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렬한 빛이 금속에 부딪히며 번쩍이고 바닥에 뚜렷한 그림자를 그렸다. 스카리인은 고개를 돌려 빛을 외면했고 자비오프는 창틀을 짚고 서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답답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데스, 자넨 정말 좋은 친구야. 하지만 너무 꽉 막힌 친구라고……"

"칭찬 고맙네."

스카리인은 어깨를 들썩이고 웃으면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자비오프는 어깨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돌아갈 건가?"

"그래, 세시나가 저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도 슬슬 올라가 봐야지." 스카리인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길가드의 정비소 말이군."

자비오프는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맞은편의 난쟁이 건물들 너머로 높다란 건물이 삐죽삐죽 일어선 사이사이 하얀 조각구름이 점처럼 흩어진 광활한 하늘이 보였고, 그 넓고 푸른 화폭을 둘로 쪼개는 검은 첨탑의 희미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시나와 그 친구한테 잊지 말고 안부 전해 주게."

그는 몸을 돌려 스카리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본분으로 했지만 다른 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의사는 군인이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을 짊어졌다고 한탄했으나 군인은 살육의 향기를 찾아 험한 가시밭길로 기꺼이 발을 들이밀었다. 그들은 삶의 방향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지만 인생의 한 시기를 완전히 공유한 친구였고 우정을 존중하고 서로를 신뢰할 줄 아는 사나이들이었기에, 굳게 손을 잡았다.

"부디 몸조심 하게나." 자비오프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서너 달 뒤에 또 오겠네." 스카리인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는 손을 놓고 몸을 돌려 혹독한 숙명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걸어나가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안톤, 자네도 정말 좋은 친구야. 하지만 너무 잔소리가 심한 친구라고……"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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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기대한 건 실수였어……"

판 휴이 소위는 따끈한 녹차를 후후 불어 식히며 자조했다.

중앙 정보국의 요원들은 울바흐터 소위를 차에 태워 경찰 병원에 후송해 갔다. 거기서 간단한 치료를 하고 어금니에 자살용 독약 캡슐을 넣어두지 않았는지 심장이나 다른 장기에 폭약을 장치하진 않았는지 철저하게 검사하고, 진정제와 사념 억제제를 듬뿍 투여해서 다시 차에 밀어넣었다.

외곽 순환도로를 서쪽으로 따라 올라가 오래된 2차선 지선도로를 타고 15분 정도 내달리면 넓디넓은 에졸 호수(湖水)가 사람을 반긴다. 이곳은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식수원이자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한숨 돌리기 위해 찾는 휴양지이기도 했다. 맑고 투명하고 잔잔한 거울에 푸르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떠오르면 햇빛이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반짝였고 연인들이 탄 조각배는 가랑잎처럼 떠다녔다. 호숫가 둘레는 비바람에 깎여나가 기괴한 모습을 한 화강암들이 조각처럼 둘러쌌고, 군데군데 보트 선착장이 있었고, 여기저기 호텔과 식당이 자리잡았다.

호수를 끼고 반 바퀴를 돌면 잡목이 무성한 펑퍼짐한 언덕이 나오는데 그 중턱에 화강암을 다듬어 쌓아 올린 돌담으로 가려진 별장 건물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부잣집 별장이 아니라 에졸 지부에서 비밀리에 유지하는 안가(安家)였고, 세시나가 하룻밤을 머문 곳도 바로 여기였다.

담장 안에는 나무도 풀도 없이 무미건조한 흙만 깔린 쓸쓸한 마당과 편평한 지붕을 씌운 왜소한 차고와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2층짜리 벽돌집이 있었다. 2층에는 방이 셋에 화장실이 하나였고 1층에는 넓은 응접실이 하나에 방이 넷, 화장실이 둘, 실용적인 부엌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부엌 뒤편의 철문을 열고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고 컴컴하고 높은 계단을 60단 정도 내려가면 상당히 넓은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 내부는 셋으로 나눠졌다. 하나는 대기실 겸 휴게실, 하나는 통제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심문실이었다. 심문실은 창고보다 좁고 불편하고 냄새 나고 더러운 콘크리트 방이었다. 풍화되기 직전의 나무 책상과 의자, 밝지만 깜박거리는 할로겐 램프, 이 모두는 포로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을 주입하고자 계획적으로 꾸며진 무대장치였다. 벽체에는 내화재나 단열재 대신에 사념 능력을 최고 500분의 1까지 약화시키는 감쇄장치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1급 사념 능력자의 힘도 4급 이하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문 중에는 한 사람 이상의 요원이 통제실에 앉아서 컴퓨터로 감쇄장치를 제어하고 심문실의 상황을 꼼꼼히 기록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야즈다-몬슬리 군사조약은 전투 도중에 포로로 잡은 적 전투원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가해선 안 된다고 명시했지만 첩보요원이나 암살자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묵시적인 허용이 아니었고, 정보국 요원들은 잔인한 고문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걸쭉한 협박을 풀어놓으며 가볍게 손찌검을 하고 잘 듣는 자백제를 투여하는 것까지 주저하진 않았다.

새벽녘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심문이라는 제목의 폭력적인 연극이 막을 올렸다. 정보국 요원들이 뺨을 후려갈기고 찢어진 어깨를 손으로 쥐어짜고 부상당한 무릎을 구둣발로 걷어찼지만 울바흐터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매섭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받아 치기만 했다. 귀에다가 설득과 애원과 위협을 번갈아 가며 외쳤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약물을 주사하면 눈이 풀리긴 했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꼬박 하루가 지나 동이 틀 무렵에는 주연도 조연도 똑같이 지쳤다. 주연배우의 이름도, 목적도, 뒤에 버티고 있는 조직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짧은 휴식을 취한 뒤에 정보국에선 비장의 카드인 네라 판 휴이 소위를 내놓았다. 그녀는 사관학교 재학 중에 하일리란트-랜셀 대학으로 적을 옮겨 사념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재(人才)였다. 500년인가 600년 전, 이드문 제국의 상원 의회에서 정권 다툼을 벌이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십성 동맹으로 망명해야 했던 그녀의 조상은 '판'이란 호칭이 붙은 성(姓)을 물려줬지만, 그녀 자신은 몰락한 귀족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는 얘깃거리로 삼는 정도였다.

판 휴이 소위는 활발한 야생마였고 귀여운 사슴이었다. 팔다리는 길고 날씬했다. 둥그런 얼굴은 원래 나이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눈 끝은 살짝 올라갔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었고 코는 낮고 입술은 작았다. 들판의 잔디처럼 푸른 머리카락은 목 근처에서 단정하게 깎아 정리했다. 사념 능력은 3급이었지만 상대편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리 투시능력은 1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정보국에 배속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서였다.

그녀가 상대편에게 사념을 집중하면 알아내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냈고 경우에 따라선 어렴풋한 기억의 단편(斷片)과 상상의 조각까지 긁어냈다.

그러나 변경의 항구 도시에서 정보국의 초급 장교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망명객의 감시, 지루한 서류 작업, 또 감시, 또 서류 작업. 재미없고 지루한 일이었다. 정보국에서 일한지도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주특기를 살릴 기회라곤 한 번도 없었다.

뮬 소령이 이 일을 맡겼을 때, 그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반드시 성공시켜 보이겠노라 다짐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깨는 자극이었으며 에졸에 뿌리내린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을 분쇄시킬 수 있는 기회였고 출세의 발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판 휴이 소위는 자백제와 사념 억제제에 취한 포로의 마음을 읽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 부족에서 비롯된 오산이었다. 그 약물은 뇌를 스푼으로 뭉텅뭉텅 떠먹은 듯한 효과를 발휘했고 감쇄 장치는 강력한 사념을 쓸 수 있는 희망을 아예 지워버렸지만, 울바흐터 소위는 이럴 때를 대비해 철저하게 훈련받은 특수부대 요원이자 교활한 '여우'였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흐느적거리며 앉아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미약한 사념을 동원해 사고 영역과 기억 중추에 무의식이라는 방벽을 둘러쳐 그 안으로 의식을 도피시켰다.

백지에는 무언가를 쓸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판 휴이는 눈을 감고 손 깍지를 끼고 초조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사념을 확장해 봤지만 질척거리는 안개가 낀 가시나무밭을 나침반도 지팡이도 없이 무작정 손으로 더듬으며 전진하다가 손끝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뇌조직과 물리적으로, 동시에 심리적으로 연결된 사념 장벽에 직접적인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포로의 목숨이 위험했다.

판 휴이는 거의 3시간이 넘도록 백치 상태의 포로를 마주보고 앉아 끙끙댔고, 카디엔과 질리언은 축축한 벽에 기대고 서서 마지막 희망이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껌처럼 씹어댔다. 오전 11시, 마침내 백기를 들고 항복한 판 휴이 소위는 약물에 취한 승리자를 남겨놓고 비실대는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기실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쓰디쓴 패배의 맛이 스며든 녹차를 마시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나한테 기대한 건 정말 큰 실수라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소위님." 숯처럼 새까만 콘크리트 벽에 질리언의 위로가 메아리쳤다.

카디엔 중위는 호주머니에서 엽궐련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니 피곤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오래된 소나무의 그윽한 향기가 피어 올랐다.

"그건 또 무슨 담배죠?" 판 휴이 소위는 하얗게 타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쫓았다.

"엊그제 북구 거리에서 만난 아사족(族) 행상한테 샀지. 케살로비카의 잎담배를 썼대나 뭐래나, 여하간 향기는 정말 좋더군."

판 휴이 소위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낡아빠진 더러운 테이블에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하얀 도기 잔에 담긴 녹차를 고양이처럼 핥아 먹었다. 대기실 귀퉁이를 서성이는 카디엔 중위는 입으로 담배 연기를 흘리면서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와 사귄지 벌써 일곱 달이 넘었지만 이렇게 낙담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네라."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 내가 잘하는 거라곤 상대가 뭘 생각하는지, 뭘 알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뿐이야. 그것 말고는 달리 잘 하는 일도 없어. 그런데 그마저도 실패했으니 대체 내가 무슨 낯으로 여기 있을 수 있겠어?"

'맞아, 넌 사격도 전술도 운전도 평균점을 겨우 웃돌 뿐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난 네가 있는 게 좋아.' 카디엔 중위는 그 생각을 함축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조금 쉰 다음에 다시 한 번 해 보자고."

"그래요, 소위님. 소위님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다른쪽 의자에 앉아 있던 질리언은 길쭉한 플라스틱 컵으로 청량음료를 마시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잡담은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끝났다. 하나는 둔중하고 하나는 살벌한 발자욱이 규칙적인 소리를 그리면서 대기실에 들어왔고, 카디엔 중위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엽궐련의 불을 벽에 지져서 끄고, 판 휴이 소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고, 질리언 상사는 허리를 세우면서 경례를 붙였다. 뮬 소령과 스카리인이었다.

"판 휴이 소위. 경과는?" 뮬 소령이 짧게 질문했다.

그녀는 창피를 무릅쓰고 군인답게 요점만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군." 스카리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꿰뚫어 볼 수 없나?"

"예, 그렇습니다. 스키더 소령님. 뇌 영역을 심리적인 방벽으로 둘러쌌습니다."

"사념 공격으로 방벽을 깨면?"

"뇌세포를 죽일 위험이 있습니다."

"감쇄장치를 작동시키고 있는 게 아니었나?"

"소령님도 아시겠지만 사념 억제제나 감쇄장치는 사념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지 소멸시키는 게 아닙니다. 억제제와 감쇄장치 덕분에 그녀의 능력은 4급 이하로 떨어진 상태지만, 뇌 영역에 심리적 방벽을 치는 것은 5급 능력자도 충분히 시간을 들여 연습을 거듭하면 흉내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하긴, 그도 그래." 스카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네는 이곳에선 최고의 사념 투시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녀는 꺾여진 자존심만큼이나 머리를 떨구었다. "예상 이상으로 무의식의 벽이 두꺼워서 투시가 불가능합니다. 모두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무의식이라니?"

"예, 그녀의 심리적 방벽은 유의미한 정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무의식입니다. 그녀는 그 무의식 속에 자신의 의식을 감추고 있습니다."

"꽤 희한한 기술을 쓰는군." 스카리인은 중얼거렸다. "대책은 없나?"

"사실상 없습니다." 그녀는 의기소침해서 말했다. "한 달이건 두 달이건 그녀가 무의식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요."

"잘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군. 그럴 수야 없지." 그는 뮬 소령에게 물었다. "뮬 소령, 제가 직접 심문해도 되겠습니까?"

"스키더 소령께서 직접 심문을 하겠다고요? 어떤 식으로 할 겁니까?"

"가능하면 제 방식대로 하고 싶군요."

뮬 소령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렇게 말했다.

"흠, 가죽을 벗기거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는 건 곤란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십자 연맹에게 꼬투리를 잡힐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가죽을 벗기고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은 건 순전히 그 가죽과 손발과 눈알이 목적이었지, 뭔가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스카리인이 말하는 태도는 고귀한 야만인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저는 정보가 필요하면 주로 항구의 정보통에게 돈을 주고 사는 편이죠. 포로를 붙잡아 팔다리를 비틀어서 정보를 짜내는 건 꽤나 비효율적인 짓이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셈입니까?"

"심리적으로 공격할 겁니다. 그 빌어먹을 잡년이 차라리 산 채로 가죽을 벗겨달라고 애걸복걸할 때까지."

상처가 일그러지며 불길함이 콘크리트를 깨부수고 무너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킥킥대며 속을 뒤집어놓는 웃음소리. 하지만 뮬 소령은 그가 암시하는 노골적인 위협을 무시하고 가치 있는 정보의 획득을 선택했다.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포로가 미쳐 날뛸 정도로 지나치게 하진 마십시오."

이런 대화에 익숙치 않은 판 휴이 소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스카리인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아아, 충분히 주의하겠습니다." 스카리인은 슬쩍 판 휴이 소위를 쳐다봤다. "소위, 뮬 소령이 인정할 정도라면 자네 능력은 결코 부족한 게 아닐세. 다만 경험이 부족하고 요령이 없을 뿐이지."

"그 요령이란 건 어떻게 배우는 겁니까?" 판 휴이 소위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직접 보고 배워야지." 스카리인은 너무나 당연한 답을 제시했다.

그러자 뮬 소령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자신의 직속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자네들은 스키더 소령의 심문에 참관하게. 특히 판 휴이 소위, 자네에겐 좋은 공부가 될 테니까 잘 지켜보게."

- 저 친구는 반미치광이나 다름없어서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그러니 조심해서 지켜보게나 -

"알겠습니다!" 일행은 그렇게 말했고,

- 잘 알겠습니다 - 또한 이렇게 답했다.

뮬 소령은 무거운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홀가분한 발길을 계단으로 옮겼다. 부엌 냉장고의 물소젖 치즈를 안주삼아 흑맥주를 마시며 적당히 시간을 때울 것을 상상하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카디엔과 판 휴이와 질리언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반미치광이와 백치가 썩어서 무너져가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면하는 모습을 보며 기꺼워할 정도로 완벽하게 미치진 않았기 때문이다. 포로의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카디엔 중위는 혐오감에 찬 눈빛을, 반대쪽 벽에 기대고 선 질리언과 판 휴이는 의심의 눈빛을 스카리인에게 날렸다.

"뺨을 후려갈긴 정도군. 강간하진 않은 모양이야?"

스카리인이 퉁퉁 부어오른 울바흐터의 뺨을 쳐다보며 카디엔 중위에게 물었다. 판 휴이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랐고 카디엔은 펄쩍 뛰어올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소령님께선 여, 여기서 그런 짓을 할 겁니까?"

"이렇게 거지반 정신이 나간 여자는 강간해 봐야 별 충격도 받지 않아. 그러니 할 필요가 없지."

"항상 그런 식으로 정보를 뽑아내는 겁니까? 대단하군요." 판 휴이 소위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필요하다면 산 채로 갈비뼈를 뽑아내서라도 알아낼 건 알아내야지. 안 그러면 내가 죽을 테니까."

껍데기만 남은 조국을 위해, 분노와 뒤범벅이 된 긍지를 지키기 위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어둡고 컴컴한 바다에 지푸라기처럼 내던진 사나이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콘크리트의 상자는 적막함에 포위당했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삶의 기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스카리인은 무의식의 세계를 부유(浮游)하며, 초점을 상실한 눈동자를 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소령과 약속한 것도 있으니, 폭력은 절대 휘두르지 않을 걸세. 걱정 말게. 난 약속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일행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 만일…… 자네들 앞에 아무리 손잡이를 당겨도 열리지 않는 방문이 있다고 가정해 보세. 방 안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겠나?"

질리언 상사는 단순하고 군인다운 답을 제출했다.

"문을 부숴야죠."

"틀렸어. 그건 밀어야 열리는 문이였어."

"어린애들의 넌센스 퀴즈 같군요."

카디엔 중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스카리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넌센스 퀴즈가 아니야. '정복당하지 않은 자들'의 이카파 족장님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일세."

"정복당하지 않은 자들? 족장? 그건 또 뭐죠?" 판 휴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네르사-쿤타의 아톨 씨족(氏族)이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랏스 연합의 지리와 종족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 이야기의 요점인즉슨, 문마다 여는 방법이 다르다는 거야."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만……" 판 휴이 소위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안다고? 아는 사람이 대체 뭘 한 건가? 소위, 자네가 한 짓은 문을 계속 잡아당긴 것뿐이잖나."

숨겨진 말뜻을 짐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의식을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혀 도망쳤다면, 그 무의식을 꿰뚫어 볼 수도 없고 부술 수도 없다면, 스스로 심연에서 헤엄쳐 나오도록 만들어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판 휴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스카리인은 백자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웃음으로 답했다.

"이렇게!"

그의 눈은 울바흐터의 눈을 향했다. 선명한 녹색의 의지가 무의식 속에 방치된 그녀의 신경을 장악하고 한 줄기 뚜렷한 사념을 흘려 보냈다.

포로의 눈이 빛을 되찾았다. 그것은 총기(聰氣)가 아니라 공포의 빛이었다. 포로의 몸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전율이었다. 포로의 입에서 침 대신에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비명, 비명, 비명!

"소령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괴로워하는 포로를 보면서 판 휴이 소위는 당혹스러워했다. 스카리인은 태연하게 설명했다.

"아톨 씨족의 족장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죄지은 씨족원을 훈계할 때 상대의 신경계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직접 전달하는 방법을 쓰지. 듣자하니 아주 오래 전부터 전승된 기술이라고 하더군." 그는 손을 들어 두꺼비 등짝처럼 흉하게 갈라진 왼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걸 약간 응용해서 내 얼굴이 불탔을 때의 경험을 그녀의 전 신경에 쏟아 부었지. 지금 그녀는 온 몸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거야."

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가 넘어졌고 포로는 눈물을 흘리고 게거품을 물며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대며 피부를 불태우고 눈알을 파먹는 불길의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손을 길게 내뻗어 희망과 구원을 갈구했다.

하지만 스카리인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것은 절망의 웃음소리.

"그리고 내가 느낀 화염의 기세를, 내 피부가 녹아 내리고 눈알이 말라붙고 고막이 터져나가는 느낌을, 그 통증을 몇 배로 증폭해서 보낼 수도 있지. 자아, 아가씨, 이제 슬슬 무의식의 벽을 깨치고 나와 보실까?"

아주 짧은 찰나, 포로의 몸이 거짓말처럼 얼어붙더니 동공이 하나의 점으로 수축되었다. 다음 순간, 환각이 빚어낸 화마(火魔)에 휩싸인 성대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가로로 쪼개고 세로로 베는 날카로운 단말마!

"아니면 계속 노래를 부르던가!"

거센 화염의 멜로디를 부추기듯 악마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성난 불길은 습기찬 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버렸다. 남은 것은 뇌수가 말라붙고 폐가 쪼그라드는 두려움이었다.

포로는 몸부림치며 손으로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긁었다. 뚜두둑 소리와 함께 손톱이 부러지고 뽑히며 핏방울이 튀었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벌어져서 핏줄기가 솟아나고 눈이 까뒤집혀 시뻘겋게 충혈된 흰자위가 드러나면서 저주받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카디엔 중위는 공포에 오염되어 사시나무 떨듯이 하는 몸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잔뜩 겁에 질린 질리언 상사는 견디지 못한 나머지 문을 박차고 도망쳐 나갔다. 판 휴이 소위는 이미 정신을 반쯤 잃고 바닥에 쓰러져 길게 누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할 짓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카디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배를 붙들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것을 남김없이 게워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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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의 동결을 강요당한 빙하(氷河)의 차가움이 엄습했다. 냉정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그는 되뇌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빙하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극한(極寒)의 빛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여 추위로 감싸 안을 뿐이다. 그리고 탐험가들은 얼음과 눈의 세례를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죽어간다.

마음을 비운 빙하는 희생자를 기다렸고 시계 바늘은 멈추지 않았다. 8시, 9시, 10시 45분, 10시 89분, 11시. 11시 5분, 6분, 7분, 그리고……

낌새가 느껴졌다. 불확실한 육감이 아닌, 촉각이나 시각과 같이 확실한 사념 감각으로 느낀 것이다. 스카리인은 슬며시 눈을 감고 잠자는 척 몸을 뒤척이며 숫자를 세었다. 문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놈이 하나,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녀석이 하나였다. 창문을 닦거나 복도 청소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를 죽이기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5초, 6초, 시간이 초 단위로 지나갔고 생각은 계속됐다. 광명성장은 매일같이 드나드는 청소차 운전수의 신분도 철저하게 확인하는 고급 호텔이었다. 청소부나 종업원으로 변장해서 침투하려면 먼저 견고한 보안 장치를 무력화시켜야 했는데 그건 숙련된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에졸에서 암약하는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이 이번 작전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14초, 15초, 객실 문이 열리면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응접실 안에 누군가가 고양이처럼 살며시 들어왔다. 십자 연맹 지상군 166군단 1662사단 소속의 나가 울바흐터 소위, 나이 23세, 병종은 보병, 주특기는 저격과 암살이었다.

그녀는 단정한 홍차빛 블라우스와 윤기가 흐르는 공단 레이스로 장식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었고 쪽진 머리에는 하얀 모자를 썼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복도의 불빛에 날카로운 얼굴선과 붉은 입술이 도드라졌다. 교활하고 영리하고 민첩했기 때문에 '여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문이 닫히면서 빛이 사라지고 암흑이 덮쳤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는 금방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드레스를 소리 없이 걷어 올리더니 허벅지 스타킹의 가터 위에 둘러찬 권총집에서 광택 없는 검은색의 짧은 열선총(熱線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십성 동맹군의 제식 권총인 야트 14형, 고출력 레이저 광선으로 반 뼘 두께의 강판(鋼板)에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을 뚫는 위력의 총이었다.

18초, 19초, 특수 밑창을 댄 구두가 카펫 위를 부드럽게 천천히 한 발짝씩 확실하게 전진했다.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사념을 확장시켜 스카리인의 위치를 탐색했다.

20초, 21초, 한 대의 청소용 로봇이 245층에서 244층으로 내려왔다. 지름 5리크(4.5미터)의 반구(半球)형 로봇은 이곳 직원들 사이에서 '거북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창문을 향한 배 부분에는 물 분사기와 회전식 롤러 스폰지가 붙어 있었고 반질반질한 흰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거북이 등딱지는 세월과 비바람에 잿빛으로 퇴색된 지 오래였다. 양옆으로는 2개의 케이블이 옥상의 대형 도르래와 연결되었고 머리 부분에는 한 사람이 겨우겨우 앉을 수 있는 좁다란 개방형 조종석이 붙어 있었지만 여기에 사람이 앉아서 직접 조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자동 조종에 맡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조종석엔 사람이 타고 있었다. 1662사단 소속의 아인작스 기든 중위, 병종은 보병, 주특기는 파괴공작과 암살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살인 예술의 대가로 여겼고 그 사실에 자부심마저 가졌다. 부하들은 그의 솜씨를 솔직하게 존경하고 그의 존재를 경외했다.

뼈와 근육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마른 체형이었고 짧게 깎아 삐죽삐죽 세운 갈색 머리카락과 불거진 광대뼈와 여윈 뺨, 좁은 이마와 푹 파인 눈 때문에 사납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젊은이였다. 지금은 주황색 청소부 옷을 입고 손으로는 허리춤의 고정쇠에 연결된 안전띠를 쥐락펴락 하고 노란색 장화를 신은 발을 건들대며 초조하게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예술을 창조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5초, 26초, 이제 242층은 턱 밑까지 왔다. 기든 중위는 가슴팍을 헤치고 손을 집어넣고 길쭉한 총신을 가진 총을 꺼냈다. 그것은 슬로바 공화국군의 제식 권총인 헬메인더 8식 권총이었다. 한번에 15개의 강철침(鋼鐵針)을 날려보내서 상대편의 몸뚱이를 찢어발기는 전자장 가속총(電磁場加速銃)으로 검붉은 총신은 교만했지만 반응은 지극히 경쾌했고 소음은 없다시피 했다. 헬메인더 사(社)에서 일반 판매용으로는 한 해에 1천 정밖에 만들지 않는다는 희소성이 있었고 성능도 대단히 훌륭한데다 원형 코일이 삽입된 비정상적으로 긴 총신이 독특한 멋을 자아냈기 때문에, 암시장에 나오는 족족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는 권총이었다.

27초, 기든 중위의 머릿속에서 울바흐터 소위의 목소리가 울렸다.

- 바로 그 창문입니다. 중위님 -

거북이의 머리가 침실 창문턱에 걸리는 순간, 그는 빨간색 브레이크 스위치를 힘껏 잡아당겼다. 모터가 꺼지고 윙윙 우는 소리가 잦아들며 거북이가 제자리에 멈췄고, 기든 중위는 조종석에서 몸을 빼고 거추장스런 안전띠 걸쇠를 풀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사념을 뻗어 마음의 눈으로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29초, 방 안의 구조가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지고 목표물의 위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희생자의 머리통을 정조준하며 마음으로 외쳤다.

 - 지금이다, 소위! -

문이 벌컥 열리고 휘황한 빛이 한 자루 창이 되어 날아왔다. 정으로 바위를 쪼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유리창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새겨지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강철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실내 공간이 크게 뒤틀리며 방향이 꺾인 빛과 침은 한 점에서 만나는 대신에 목표를 잃고 허공에서 옆구리를 스치며 교차해 지나갔다. 넓은 공간을 지배하는 힘, 광파(光波)와 전파(電波)의 흐름마저 굴복시키는 힘, 전체 사념 능력자 중에서 그 숫자는 채 1푼에 미치지 못한다는 제 1급 사념 능력자의 힘이었다.

울바흐터와 기든 역시 1급 사념 능력자였지만 코앞이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그것도 동시에 두 방향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광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스카리인은 놀랄 틈조차 주지 않았다.

눈부신 빛이 어둠을 밝히고 커튼을 태우고 유리창을 녹여 새로운 구멍을 뚫고 거북이의 케이블 하나를 끊으면서 다시 진로를 바꿔 '대가' 기든 중위의 목을 뜨겁게, 그러나 시원하게 도려내고 고층 건물의 불빛을 뒤로 하며 드높은 창공으로 사라져 갔다. 균형을 잃은 거북이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고 기든 중위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는 낯빛으로 총을 떨어트리며 구멍 뚫린 모가지를 손으로 부여잡았고, 그 몸뚱이는 옆으로 쓰러지며 조종석을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스스로의 육신으로 죽음의 예술을 완결시켰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다. 중력의 힘에 이끌려 딱딱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보도 블록에 정통으로 부딪혀 쪼개지고 으스러진 핏덩이는 아무 말도 못하는 법이니까.

'여우'는 짧게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뜨거운 강침이 오른쪽 어깨죽지를 관통하며 많은 양의 근육을 덜어낸 탓이다. 강철침이 벽에 박히면서 망치로 못을 박는 소리가 연달아 귀를 때렸고 피가 뭉글거리며 블라우스에 스며들고 찢어진 살점이 바닥에 떨어지고 오른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급히 왼손으로 총을 바꿔 쥐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번, 스카리인이 상반신을 일으켰고, 두 번, 빛줄기는 그의 얼굴을 밝혔고, 세 번, 문드러진 얼굴 가죽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짐승의 웃음 소리가 광휘에 휩싸였다. 그리고 광선은 일그러진 공간을 비뚜루 지나 커튼을 태우고 창을 녹이며 허공으로 증발해 버릴 뿐이었다.

"소용없어."

스카리인이 웃음을 멈췄다. 울바흐터 소위가 들고 있던 권총의 총신이 구부러지고 총열은 어그러졌다. 그녀는 못쓰게 된 권총을 스카리인에게 냅다 집어 던지며 뻣뻣하게 굳어져 가는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왼쪽 손목에 찬 굵은 은팔찌를 벗겨냈다. 겉보기엔 평범한 팔찌지만 안쪽은 플라스마 기폭장치와 화약, 가늘고 날카로운 금속 파편으로 채워져 있었다. 소음이 크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효과는 대단히 훌륭한 폭탄이었다.

울바흐터는 자신의 힘으로는 스카리인을 어쩌지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달았고 고작 이 정도의 폭탄으로 그를 죽일 수 있으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연기와 파편으로 시야를 가리고 몸을 뺄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래서 진주 장식으로 위장된 안전핀을 이빨로 물어 뜯고 바닥에 팽개치듯 던지면서 강렬한 충격파와 파편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념을 확장했다.

팔찌는 폭발했다.

연기는 솟아나지 않았다. 충격도, 파편도, 아무것도 없었다. 팔찌를 둘러싼 손바닥만큼 좁은 공간이 극적으로 일그러지고 축소되며 폭발의 위력은 더 이상 뻗어가질 못했다. 답답하게 번쩍이고, 새까만 연기가 머리통 절반만한 크기로 팽창하고, 자잘한 파편들은 동전 지갑처럼 요란하게 쩔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보이지 않는 벽에 격렬하게 부딪혔다. 공간의 모퉁이가 왜곡되며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이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금속 파편들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스카리인이 다가왔다.

"소용없다고 말했잖아?" 그는, 다시, 웃었다!

숨이 막히는 절대적인 위압감 앞에서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고 공간을 지배하려 했지만…… 능력의 차이는 의욕만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울바흐터 소위의 사념은 웃음 소리에 튕겨져 나와 자취를 감췄다.

"정말 귀찮군. 꿇어!" 그는, 다시, 웃음을, 멈췄다!

중력의 열 배가 넘는 힘에 붙잡힌 무릎은 엄청난 기세로 바닥에 부딪혔다. 부드럽지만 얇은 융단 아래, 단단한 대리석과 충돌하며 무릎 연골이 부서지는 충격에 그녀는 일시적으로 눈을 까뒤집었지만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엎드려." 그는, 가볍게, 말했다!

윗몸이 탄력 있는 용수철처럼 튕기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융단에 흐드러진 푸르고 노랗고 빠알간 꽃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이마에 번개가 내리쳤다. 정신을 잃고 까무러친 여인에게 찾아온 것은 짧고 평화로운 안식, 결이 고운 융단 위에 화알짝 핀 것은 검붉은 피의 꽃, 그리고 악마에게 떠오른 것은 흐뭇한 미소!

- 카디엔 중위, 질리언 상사, 그쪽에서도 이미 다 봤겠지? 어서 이 여자를 데리고 가게 -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념을 보내면서 그는 지상에 낮게 깔리는 불유쾌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잡년이 불어댈 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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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암살자



잉야르의 하루는 26시간이고 1시간은 90분, 1분은 80초다. 우주 표준시는 세슘 원자가 100억 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약 1.08696초)을 1초로 삼지만 이곳에선 세슘 원자가 97억 번 진동하는 시간이 1초였다. 먼 바다를 오랫동안 떠돌아 다니느라 표준시가 완전히 몸에 배인 사람이 시차에 적응하려면 하루나 이틀로는 불가능하고 적어도 1주일은 필요했다.

스카리인이 얻어 탄 질리언 상사의 노란색 중형차가 남구를 빠져 나와 크고 작은 자동차로 한참 복작대는 북구의 밤길을 거북이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호텔로 도착했을 때, 시계는 이미 8시 7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졸을 소개하는 관광 안내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250층짜리 특급 호텔, [광명성장(光明星莊)]은 거대한 빛의 탑이었고 그 둘레를 크고 넓게 감싸는 도로는 빛의 강이었다.

질리언의 차는 느릿하게 흐르는 빛의 강으로 되돌아갔고 스카리인은 굳건한 빛의 탑에 들어가 카운터의 여직원에게서 객실 열쇠를 받았다. 그는 '안녕히 주무십시오' 내지는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운운하는 깍듯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242층으로 향했다.

광명성장의 단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층부터 160층까진 밋밋한 사각형으로, 160층부터 220층까지는 육각형으로, 그 위로는 팔각형이었다. 그리고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 '특급층'으로 불리는 240층부터 250층 사이에는 최고의 요금을 자랑하는 특등실이 몰려 있었다.

특급층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것은 고대 유적을 연상케 하는 크고 굵직한 원주(圓柱)였다. 8대의 고속 엘리베이터가 쉼 없이 오르내리는 원형 기둥, 그 기둥을 넓은 복도가 에워쌌고, 팔각형의 복도 벽에는 한 면마다 네 개의 객실이 들어서 있었다.

스카리인은 무덤덤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연한 베이지색 벽면에 걸린 투명한 꽃봉오리 모양 전등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받아 낭만적인 장밋빛으로 타오르는 카펫이 깔린 넓고 시원한 복도를 걸어 동남쪽 면의 3번째 방, 242-23호실로 다가갔다.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널찍한 문에는 열쇠구멍이 뚫린 청동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열쇠구멍은 옛 양식을 철저하게 모방하느라 생긴 단순한 장식에 불과했다.

스카리인이 손가락만한 굵기와 크기의 금속제 열쇠를 손잡이 부근에 갖다 대자 잠금 장치가 풀려 문이 활짝 열리고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특등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응접실 1개, 침실 3개, 화장실 2개, 대형 목욕탕에 미니 바까지 갖춰진 크고 넓고 호화로운 객실이었다. 응접실 천장에선 투명한 수정을 모아 만든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번쩍이며 실내를 밝혔다. 바닥에는 백옥같이 하얀 대리석을 깔고 다시 그 위에 화려한 문양의 고급 융단을 펼쳤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은백색 물소 가죽을 덧댄 소파에선 천년 전의 아름다움을 다시 되살린 듯한 기품과 안락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커튼을 접고 창을 열어 발코니로 나아가 소용돌이 문양이 양각된 황동 난간을 짚고 몸을 기울이면 발 밑이 꺼질듯한 아찔함이 몰려들었다. 뒤이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이 눈으로 덤벼들었다. 여기 올 때면, 세시나는 밤마다 쪼르르 발코니로 달려나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싫증 내지 않고 밤 경치를 구경했다.

'오늘은 그나마도 즐길 수 없으니 안 됐군.'

스카리인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돌려 텅 빈 세시나의 방문을 힐끔 쳐다보곤, 응접실을 지나 예스런 경첩 문을 열고 자기 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밝은 불빛이 소박하고 실용적인 침실을 그려냈다. 넓이는 응접실의 절반 정도, 바깥이 보이는 넓은 창문에 침대가 접했고 반대쪽 면에는 큼직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졌고 좌우로는 책장과 옷장이 서 있었다. 고동색 나무 책상 위에는 작은 손가방이 뒹굴었고 책장에는 호텔 직원이 갖다 놓은 것으로 추측되는 싸구려 잡지책이 드문드문 꽂혔고 옷장에는 갈아입을 옷 몇 벌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점퍼를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고 장갑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장화를 신은 채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며 몸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편안하게 튕겨줬다. 침대 머리맡의 조그만 서랍장에는 독서용 전등과 자명종 시계가 있었는데, 그 시계는 고전적인 장식미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물건이었다. 둥그스름한 청동제 몸통에는 연꽃 무늬가 촘촘히 음각되었고 흑철색의 바늘은 은빛의 숫자판 위를 부드럽게 달렸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스카리인은 슬그머니 목을 비틀고 눈을 돌려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를 읽었다. 8시 75분에서 80분 사이. 그는 호주머니에서 아까의 열쇠를 꺼내 들고선 머리 부분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커튼을 쳐."

점점이 반짝이는 빛들이 강을 이루고 기둥을 이룬 도시가 창문 양쪽에서 튀어나온 자줏빛과 갈색의 단풍잎을 수놓은 진한 녹색의 커튼에 감춰졌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명령을 내렸다.

"방문을 닫아. 그리고 모든 방의 불을 꺼."

모터가 돌며 방문이 닫혔고 차례로 불이 꺼지면서 소스라치게 막막하고 조용한 어둠이 펼쳐졌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은 커튼을 얼룩처럼 물들이며 어두운 방에 아주 약간의 빛을 던졌고, 눈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희끄무레한 녹색으로 빛나는 야광 시계바늘이 보였고 깨끗한 직선을 그린 벽과 가구의 윤곽선이 흐릿하게 잡혔다. 그는 열쇠를 시계 옆에 내려놨다.

시간은 아직 9시 전, 잠들기엔 아직 일렀거니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졸리지도 않았다. 황폐한 싸움으로 단련된 육체는 피로를 몰랐기에 마음만 먹으면 나흘 밤을 줄창 세울 수도 있었다. 스카리인이 침대에 누운 이유는 잠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객실 전체가 덫이었고 그는 미끼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정적이 몇 겹으로 덧칠된 새까만 침묵이 잦아들고, 낮은 소음이 두터운 벽 너머에서 불규칙하게 울렸다. 간헐적으로 부스럭대는 소리, 벽체를 관통하며 자음이 불명료하게 뭉개진 탓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소리가 섞여 있었다. 잠시 후에 문 닫히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터지더니 다시 긴 정적이 찾아왔다. 스카리인은 옆방에 들어왔던 정보국 요원들이 일부러 소란을 떨며 철수한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 추측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보국 컴퓨터에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귀 안쪽에 이식된 적혈구 세포 크기(약 7~8미크론)의 생체 컴퓨터를 작동시키며 사념을 확장했다. 그리고 광속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 우주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사념 통신망'에 뛰어들었다.

수천 수만의 행성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는 사념파(思念波)의 소용돌이에 실린 막대한 양의 정보가 그의 정신에 흡수되고 영혼에 동화되었다. 커튼의 주름을 따라 반투명하게 드리워진 흐릿한 빛 다발 위로 시신경에 직접 전송된 그림이 3차원적으로 겹쳐졌고, 고독한 침묵은 찐득거리는 소음의 합중주에 휩쓸렸고, 아주 옅은 국화향이 스며든 실내에는 구역질 나는 냄새와 향기로운 냄새가 휘몰아쳤다.

스카리인은 후각 정보를 차단하고, 청각 정보를 골라내고, 시각 정보에만 집중했다. 그는 무한한 바다에 고립된 개인이었지만 무력하진 않았다. 사상의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사념의 가닥을 쫓아 올라가 십성 동맹군 정보국, 잉야르-에졸 지부의 대형 생체 컴퓨터의 단말기를 찾았다.

- 접속 암호는? 그리고 신분은? - 단말기의 질문이었다.

그는, 뮬 소령에게 건네 받은 1,284,653,944자리의 암호를 끄집어 내면서 자신의 신분을 명명백백히 밝혔다.

- 랏스 연합군 해군 소령, 데스 스키더. 소속 부대는 없음. -

세슘 원자가 채 10번도 진동하기 전에 컴퓨터가 암호를 확인하고 랏스 연합군 정보망에 동맹군 자격으로 접속해서 그의 사념파(思念波) 파문(波紋)을 조회했다.

- 암호 일치. 본인 일치. 지금부터 정보망 접속 및 2급 이하 군사 기밀 정보의 열람을 허가합니다. -

다른 일체의 정보가 차단된 공간에 잉야르-에졸 지부의 정보망이 활짝 열렸다. 암흑의 공간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것은 글자, 무수한 텍스트였다. 그는 마음의 손을 뻗어 텍스트를 더듬으며 질문했다.

- 스카리인의 옆 방을 지키던 사람들은 철수했나? -

눈앞에서 글자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새로운 텍스트를 형성했다.

- 근접 경호팀은 금일 오후 8시 81분을 기해 철수, 본부로 귀환하고 있다. 광명성장에서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180층 호텔 '에조레드'의 옥상에서 질리언 상사와 판 휴이 소위가 원격 경호팀을 구성하고 있으며 40분 내로 카디엔 중위가 여기 합류할 예정이다. 그리고 광명성장을 중심으로…… -

'다들 고생이 많군.'

스카리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마음의 손을 좌우로 흔들어 텍스트를 치웠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여길 감시하는 팀이 있으니 차를 몰고 호텔 근방을 빙글빙글 돌며 사건이 터지기만 기다리는 팀도 있을 것이다.

'놈들이 뮬 소령의 역정보에 속아넘어갔다면 늦어도 11시에는 나를 습격하려고 들겠지. 기왕이면 좀 더 일찌감치 와 줬으면 좋겠군.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그는 에졸 지부의 접속을 끊고 공개된 정보망으로 되돌아갔고 거기서 다시 랏스 연합 정보부의 단말기를 찾아 들어갔다. 암호 확인, 신분 확인, 틀에 박힌 절차가 지나고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정보가 뇌세포로 직결되었다.

……해군 전과(戰果) 보고서: 딘메르게스의 유격 함대가 아이티카 3 해역에서 이동 중이던 십자 연맹의 수송 선단을 습격해서 호위함 7척(오뤽 2, 발스레인 5)을 격침시키고 화물선 2척을 대파, 나머지 화물선 12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샤카무트 1척과 스칼레드 2척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 전부이며……

'붉은 수염' 딘메르게스 대령님, 당신은 아직도 원기왕성하군요. 같이 일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드문 제국 정세: 국민당 '온건파'의 정신적 지도자인 알릭서드 맥라인 교수는 '강경파'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나키셰에이저'의 책임자인 이아썬 반 퀜톤 남작은 맥라인을 여전히 위험 분자로 간주하고 있으며……


황실 비밀경찰이 주목하고 있다면 무사히 넘어가긴 어렵겠군.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테리어스 성단 연합(星團聯合) 경제: 용병 부대 '핏빛 갈매기'가 십자 연맹의 예나 사(社)와 장기 계약을 체결, 칼텍 행성에 지상군 2개 대대와 해군 1개 사단을 주둔시키기로 했다. 계약금 액수는 공표되지 않았지만 대략 20억 지타로 추정되며……

뷔라아민 녀석이 엄청난 돈을 들여 '핏빛 갈매기'를 고용한 걸 보아하니 칼텍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이건 조사해 볼만한 가치가 있겠어.

……십자 연맹 및 본토 동향: 정기 중의회(衆議會)에 출석한 상원의원 알렌 던컨이 테리어스 성단 연합의 무역 관세 정책을 비난하는 바람에……

던컨, 알렌 던컨. 차가운 살의(殺意)가 솟아나 등줄기를 따라 흐르며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의 정신이 정보망에서 튕겨져 나와 영상과 글자와 소리가 새하얗게 부서져 날아가면서 눈앞에 벗처럼 친숙한 어둠이 돌아왔다. 목표를 상실한 살기는 공허한 암흑을 떠돌고 분노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되었는데 어찌나 세게 힘을 줬는지 손톱이 안쪽 손바닥을 파고들어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다정하고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보다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음모가 싹트고 모략이 꽃을 피워 형제의 우애와 친구의 신뢰를 남김없이 앗아가고 골수에 사무치는 후회와 한 줌의 잿더미를 남겼다. 한때 친근하고 정겹게 형이라고 불렀던 그 이름은, 이제는 혈관을 따라 강침(剛針)처럼 흐르는 증오심의 상징이었고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상처로 남은 분노의 대상이었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응징해야만 하는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의 이름이었다!

스카리인은 무의식 중에 손을 들어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고 우툴두툴한 왼뺨을 더듬어 올라가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피를 증발시키며 근육과 살점을 새까맣게 구워버린 시뻘건 불길은 그의 왼쪽 눈을 통째로 노릿하게 태워버렸다. 지금의 눈은 자비오프가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었다. 유전 정보를 이용해 세포 배양기에서 생성된 대체 안구는 크기부터 흰자위, 동공, 홍채의 색깔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눈과 완전히 동일했고 코앞에 들이댄 손가락의 지문을 또렷이 파악하고 머나먼 바다의 별빛을 확실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았다.

하지만 그 고통, 눈알이 열기에 달아오르고 눌어붙고 깨어지고 박살 나는 순간의 고통, 신경이 촛불처럼 천천히 타 들어가고 가닥가닥 끊어져 뽑혀나가는 고통은 사악한 저주가 되어 영혼을 옭아맸다. 이식 수술이 끝나고 며칠 동안은 한 시간 간격으로 끔찍한 환상통(幻想痛) 발작이 찾아왔고 그 때마다 눈꺼풀을 누르고 입술을 깨물면서 신음 소리를 필사적으로 삼켜야 했다. 발작 간격은 몇 주 뒤엔 서너 시간으로, 몇 달 뒤엔 하루에 한 번으로 늘어났고 통증도 점차 약해져서 1년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텅 빈 눈구멍을 까마귀가 단단한 부리로 쪼아대며 신경을 온통 들쑤셔 놓는 고통을, 새빨갛고 샛노란 화염 속에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가는 친구의 주검을 기억해 냈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고 귀가 멍멍해지고 등골이 마비되고 손가락 끝에까지 전류가 흐르는 통증, 근육이 떨리면서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면서 아드레날린이 용솟음쳤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부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지나친 흥분이었다. 사냥을 앞두고 필요한 절대적인 미덕은 침착함이었기에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요동치는 감정을 붙들었다. 몸이 매트리스에 가라앉으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쿵쾅대던 심장이 천천히 숨을 죽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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