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헤드기어를 벗은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카리인은 재차 명령했다.
"배다! 배를 찾아!"
"죄송합니다만, 주인님. 어떤 배를 찾으란 말씀이십니까? 적 함대는 철수하고 있습니다만……"
스카리인은 목을 돌려 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놈들을 찾으란 말이 아냐." 그리고 딱딱한 말투로 설명했다. "반경 3해리 안에 다른 배가 있을 거야. 전함이 아니라 소형 요트일 테니까 레이더의 해상도를 높여서 찾아 보도록 해."
세시나는 황급히 패널을 조작해 해상도를 높인 레이더 화면을 살피고 보조 스크린을 확인하더니,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거리 0.85해리, 상대방위 8-1에서 질량 및 에너지 반응 확인, 크기 약 100빌(35미터), 무게 약 14반테렌(81톤)의 소형 요트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이런 배가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주인님께선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까 우리를 도와준 사념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나?"
그 물음에 세시나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느끼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적의 사념을 막아내느라 기진한 상태였으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스카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망 대신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괜찮아. 신경 쓸 것 없어.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면서 조종간을 꺾어 배의 방향을 바꿨다. 15년, 15년만이었다.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쿠데타와 굴욕적인 항복 선언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심이 싹트고 배신이 판치고 음모가 소용돌이쳤다. 충직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야비한 자들이 부와 명예를 움켜쥐고 건실한 인간들은 개처럼 내쫓겼다. 그리고 혼란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요새에서 그는 둘도 없는 친구를 잃고 목숨처럼 사랑하던 여인과 헤어졌다……
"그런데 저건 어떤 배입니까?"
어린 소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해 질문을 던지자 스카리인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주지."
죽음의 날개, 에카무드는 죽음으로 더럽혀진 가스층을 떠나 순수하고 맑은 어둠이 펼쳐진 너른 바다의 품에 안겼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쩍이는 별빛은 삶을 관망하는 등대, 무채색의 소행성은 투박하고 위험한 암초, 그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바다는 진공(眞空)과 허무(虛無)로 충만한 세계……
"추적 중인 요트는 상대방위 2-10, 약 12.9해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시트 11번 순동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시나는 레이더 화면과 보조 스크린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따라잡으려면 약 20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이미 15년이란 세월을 기다렸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까, 스카리인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신을 집중하며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 로리아…… -
바위처럼 고요한 바다에 애타는 마음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추적 중인 배가 속도를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4, 5분 뒤에는 접촉할 수 있습니다." 세시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 저 배와 연결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상세한 설명이 생략된 단순한 긍정에 소녀는 만족하지 못하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친구분이라도 타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해야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분입니까?"
잠시의 망설임,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박하는 이름을 조그만 목소리로 뇌까렸다.
"로리아."
"로리아? 여자분입니까?"
세시나의 맑은 눈이 스카리인을 내려다 봤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자동 조종 장치를 켜서 상대편 함에 접근해 연결할 것을 지시하더니, 형형색색의 별빛에 매몰되어 있던 조그만 점을 왼쪽 보조 스크린에 크게 확대시켜 놓고, 그것을 홀린 듯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유성처럼 찬란한 은빛에는 변함이 없다…… 둘로 갈라진 뱃꼬리는 곱게 땋은 머리처럼 늘어졌고…… 몸통은 날개를 접은 비둘기 같고…… 허리에 두른 태양풍 돛은 금빛의 망토였고…… 머리통은 나이 어린 소녀가 흘리는 눈물 모양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것은 주박(呪縛)에 얽혀 이 바다를 떠도는 운명……
언제였더라, 그녀는 바다의 끄트머리에 서서 이 세상의 별빛들을 굽어 살피고 싶다는 희망을 털어놓았지. 외롭고 쓸쓸한 별들에게 귀여운 이름을 지어주며 품에 보듬어 안겠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젠 그녀가 외로운 별이 되었다…… 스카리인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남편이 모는 요트를 타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겠노라 말할 때, 그녀는 맑고 고운 웃음을 지었지…… 그러나 이제 그녀는 홀로 남았다…… 그녀의 남편, 나의 벗,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상쾌한 마음으로 망망대해를 누비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며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던 사내, 에릭…… 망각과 소멸의 심연에 빠진다 할지라도, 죽음과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할지라도 잊을 수 없는 친구……
[그녀에게……]
스카리인이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되새겼다. 잊을 수 없는 맹세의 한 조각을.
[그녀에게 반드시 전해줘야 한다……]
그는 오른쪽 팔걸이로 손을 뻗어 조작 패널 가장자리의 조그만 회색 다이얼을 왼쪽 끝으로 돌렸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팔걸이 안쪽의 얇은 금속판이 좌우로 열리면서 조그만 서랍이 스르르 튀어나왔다. 그 안에서 잠들고 있는 것은 작고 투박한 적갈색 나무함. 좌우로 손바닥 한 뼘 길이에 위아래는 반 뼘 높이, 쓸데없는 장식이나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는, 자연스런 나뭇결을 살린 종말의 상자……
스카리인은 성직자가 성물(聖物)을 대하듯이 경건한 태도로 나무함을 받쳐 들었다. 한없이 가볍지만, 끝없이 무거운 존재감. 그의 얼굴에 새겨진 상흔이 실룩거렸다. 눈에는 회한이 서렸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설령 피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할지라도 시간은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법이니까……
"거리 50키엔(6000 킬로미터). 이제 곧 연결 경로로 접근합니다." 세시나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주인님, 상대편이 연결 암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스카리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암호는 '에릭', '에릭'이다."
"에릭?"
세시나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건반을 두들겼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암호를 승인했습니다. 지금부터 연결 경로로 진입합니다. 연결 예상 시간은 약 5분 뒤입니다."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콩알만한 점이 쑥쑥 커지더니 전방위 스크린의 앞면을 가득 채우는 은빛으로 변하고……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탓에 낡고 더러워졌지만…… 예전과 다름없는 몸매를 자랑하는 우주선을 보며 …… 그는 짧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소녀는 탄성을 지른다……
"정말 아름답게 생긴 요트군요. 저런 디자인은 처음 봅니다.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저건 에릭이 만든 배야.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에카무드와 마찬가지로."
"예엣?" 세시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스카리인에게선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나의 전함과 하나의 요트…… 중무장한 파괴 병기와 맨주먹의 유람선…… 재앙을 초래하고 파멸의 불꽃을 찬양하는 거대한 배가 평화를 노래하는 자그마한 배의 왼쪽 옆구리로 느릿느릿 부끄러운 걸음을 옮기고……
노끈처럼 질긴 중력장이 이어지며…… 둘은 부딪힐 듯이 가까이 접근하지만 결코 부딪히진 않고……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좌현과 우현을 나란히 하며 팔짱을 낀다……
"지금부터 상대편 신호에 맞춰 감속을 실시합니다. 완전 정지까지 앞으로 50초."
잔잔하게 물결치며 흐르던 별빛들이 굼벵이처럼 느려지더니만 마침내는 지상에서 바라보는 밤하늘 풍경처럼 고요해졌다.
"감속 완료. 현재속도 0. 가속, 반가속 엔진을 정지시키고 '통로'를 연결합니다."
중력장이 여덟 팔자 모양으로 서로를 옭아매서 미묘한 균형이 유지된 상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연결 통로를 뱉어낸다…… 이쪽은 새카맣고 굵직한 원통이고 저쪽은 새하얀 육각형의 통로…… 겉보기엔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속으로는 같은 규격을 따르고 있기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입술을 부딪히며 견고하게 맞물려…… 내벽과 외벽이 빈틈없이 연결되며 사람이 숨쉴 수 있는 공기가 들어가…… 이쪽과 저쪽이 하나가 된다……
"세시나, 너도 따라올 테냐?"
그 질문에 세시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예."
스카리인은 계기판의 키보드로 복잡하고 긴 암호를 입력하고 계기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에카무드, 지금부터 항해를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전투 함교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자동 대응 태세로 대기해라."
보조 스크린에 '암호 확인', '명령 인식' 등의 단어가 주르르 떠올랐다. 함교의 뒤편, 관제사석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서 검푸른 어둠이 커튼처럼 밀려나며 하얀 벽면과 은빛의 출입문이 드러났다. 그리고 문이 소리 없이 좌우로 벌어지면서 밝은 빛이 밀려 들어왔다.
팔걸이 끝에 있는 길쭉한 하얀 버튼을 가볍게 두들기니 어깨와 허리를 붙들고 있던 안전 장치가 위로, 옆으로 벗겨졌다. 그는 나무함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따라 내려온 세시나는 그 옆에 바짝 달라붙어, 밋밋한 나무 상자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수십억 년의 어둠이 지배하는 함교를 떠나면 긴 복도가 나온다. 폭은 열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 양쪽 벽에는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끊김 없이 이어져 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푸르른 어둠과 검붉은 가스, 오른쪽에 자리잡은 것은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는 은빛 요트.
바닥엔 두 줄의 자동 복도가 새까만 양탄자처럼 깔렸다. 스카리인은 왼쪽 복도에 발을 올렸고…… 롤러가 회전하고 바닥이 앞으로 움직이며 느린 걸음에 속도를 더해주고…… 밖에선 붉으죽죽한 가스 띠가 냇물처럼 흐르고 별빛이 한낮의 백사장처럼 반짝이지만…… 우울한 눈동자는 요트의 외곽을 따라 광대처럼 춤추는 은은한 반사광을 쫓는다……
친숙한 곡선과 직선의 배합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는 외장(外裝) 타일은 시선을 빼앗는다…… 에카무드의 3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배지만…… 거기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길고 복잡하다……
문득,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갈색 눈동자의 존재를 깨닫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맑고 투명한…… 청순하고 다정한 소녀의 눈빛이…… 그의 심장을 꿰뚫는다…… 차라리 불안하고 겁먹은 빛이 섞였다면 마음 편하련만…… 거짓없이 솔직한 마음은 그를 괴롭힐 뿐이다……
"로리아란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스카리인은 그녀를 피하듯이 시선을 다시 바깥의 쇳덩어리로 돌리며 대답했다.
"친구의 아내였어."
세시나는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영혼을 짊어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는 사내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다리자, 저 분이 먼저 말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복도가 말없이 달려가고 터벅터벅 발소리는 규칙적으로 울리고 그림자는 앞뒤로 흔들렸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해 들어갔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크고 단단한 금속제 문, 로리아의 요트와 연결된 통로로 들어가는 문, 스카리인과 세시나는 자동 복도에서 내려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한 변이 7리크(약 6미터) 가량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문은 어두운 잿빛, 어깨 높이 부근엔 새하얀 인식판과 작은 스크린이 붙어 있었다. 스카리인은 재빨리 스크린의 글자를 확인했다. ……연결 완료, 통로에 공기 주입 완료, 안전 점검 완료, 최종 승인 대기 중……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들어 인식판을 눌렀다.
"에카무드, 문을 열어라."
인식판이 지문을 읽고 성문(聲紋)을 판별하면서 30여 개가 넘는 안전 장치가 차례차례 풀렸다. 1초, 2초, 3초……문 한가운데 X자 모양의 선이 그어지더니, 네 조각으로 쪼개지며 크게 입을 벌렸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콩알만한 돌기가 촘촘히 솟은 철회색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상자를 길게 잡아 늘린듯한 통로였다. 바닥은 노란 빛으로 지저분하게 얼룩졌고, 중간 즈음에선 흐릿한 어둠이 허리를 낮추고 그들을 기다렸다.
스카리인은 한 발 안으로 내디뎠다. 텅, 무거운 발소리가 텅, 텅, 텅 구슬프게 울었다. 세시나의 발은 탕, 탕, 탕, 박자를 맞춰 그를 쫓았다.
백여 걸음이 지났을 무렵, 천장에서 노오란 불빛을 선사하던 각진 조명이 사라졌다. 대신에 무분별하게 깜박이는 녹색 조명이 밋밋한 은회색 벽면에 줄지어 섰다. 타고난 하얀 빛을 잃어버리고 잿빛으로 퇴색한 타일 위에서 구둣발은 둥, 둥, 북소리를 냈고, 스카리인은 자신의 가슴에서 똑 같은 북소리를 들었다. 둥, 둥, 둥……
침침한 빛은 발치를 가까스로 밝히고…… 그림자는 시계추처럼 앞뒤로 흔들리고…… 구두 뒤축이 바닥을 쓸면서 정체된 공기가 요동치며 먼지가 날리고…… 세시나는 손으로 입가를 감싸며 연신 기침을 하지만…… 스카리인은 기나긴 시간에 걸친 지루한 기다림을 보상받기 위해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군데군데 자잘한 상채기가 새겨지고 페인트가 벗겨져 지저분하기 짝없는 벽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통로의 끝에선, 빛이 질식해서 숨져 버린 공간에선, 갓 캐낸 석탄처럼 새까만 금속제 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카리인은 문가의 패널에 손을 얹고, 눌렀다.
텅, 텅, 쇠파이프로 커다란 드럼통을 후려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삐그덕, 문짝이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안은 구원의 빛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공포의 심연, 바다보다 적막하고 암흑보다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나무함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주머니에서 몽당연필 크기의 손전등을 꺼내서 위아래로 흔들며 앞을 살폈다. 세시나도 손전등을 꺼내서 빛을 더했다.
흔들, 낮은 천장엔 불빛이 사라진 둥그런 조명이 열을 맞춰 늘어섰다. 흔들, 허망한 공백으로 가득한 스크린이 나란히 붙은 하늘색 벽에는 고독이 습기처럼 스며들었다. 흔들, 움직이지 않는 자동 복도 위에는 침묵의 세월을 증명하듯이 다갈색의 먼지가 엄지 손톱만한 두께로 살포시 쌓였다. 그리고 허공에는……
갑자기 세시나가 몸을 바르르 떨면서 손전등을 떨어트렸다. 툭, 데구르르, 빛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뽀얗게 피어 오르는 먼지를 비쳤다. 그녀는 현기증을 견디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스카리인의 굵은 팔뚝을 붙잡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주인님……"
세시나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파리한 얼굴을 어깨 사이에 파묻고 겁먹은 눈으로 힐끔힐끔 좌우를 쳐다봤다. 스카리인은 소녀를 달래듯이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겁먹을 것 하나도 없다, 세시나. 위험한 거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허공에는…… 살갗이 에이는 삭풍과도 같은…… 달도 뜨지 않은 밤길을 정처 없이 헤매는 몽유병자의 눈빛처럼 황폐한……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로 뒤덮인 사막에서 길 잃은 여행자가 느끼는 갈증처럼 애타는…… 가슴을 저미고 뇌수를 후벼 파는 감정이…… 회오리 친다!
그리고…… 억만 겁이 넘는 비애에 중독된 소녀의 눈에선 투명한 수정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여긴 슬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너무 슬퍼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겠지, 스카리인의 눈밑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통곡하는 마음이 폭포수처럼 흘리는 눈물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진한 핏방울을 토해내듯이 울부짖는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그리고 그 슬픔의 유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 하나뿐이겠지……
"그래, 그녀는…… 로리아의 마음은…… 울고 있는 거야…… "
"어째서……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는 거죠?"
천진하고 투명한 눈동자가 목멘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스카리인은 조그만 소녀를 부축해 가면서 세월을 먹을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을 되짚어 올라갔다.
"로리아, 그녀는 내 친구 에릭의 아내였지." 높낮이가 없는, 감정을 억누른 대사가 이어졌다. "에릭, 에릭 반더빌츠, 녀석은 진짜 천재였어. 내가 겨우 중위 계급장을 달았을 무렵에 이미 샤카무트 라인의 개발 책임자가 되어 있었지. 그리고 4년 만에 샤카무트 837형의 시제품을…… 에카무드를 만들어 냈어."
승리의 날개 샤카무트, 그것은 한때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목숨을 내맡겼던 믿음직한 동반자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그 이름은 승리가 아닌 패배를 뜻하는 초라한 상징물로 전락해 버렸다.
죽음의 날개 에카무드, 그것은 적들에게 궁극적이고 영원한 패배인 죽음을 안겨주라는 의미에서 에릭이 붙인 암호명이었다. 그러나 불길한 이름이 불러들인 변덕스런 죽음의 신이 제일 먼저 취한 목숨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에릭의 목숨이었다……
"로리아는 그의 아내였어……"
그는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사랑했지만…… 친구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아름답고 순수한 여인이었지. 그리고 뛰어난 사념 공학자로 에카무드의 사념 증폭 엔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눈앞에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화난 얼굴이…… 토라진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러나 슬픈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2차 십자 대전이 한창일 때, 나는 최전선에서 전우들과 함께 피를 흘렸고 에릭과 로리아는 후방에서 신기술을 개발하느라 비지땀을 흘렸지. 하지만 우리가 투쟁한 보람도 없이 랏스 연합은 어이없이 붕괴해 버렸어."
한때 대낮처럼 밝았던 복도, 지금은 몇 치 앞을 겨우 밝히는 손전등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때 쾌활한 사람들의 재담이 넘치던 객실, 지금은 오래된 지하감방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폐허가 된 유적과도 같은 침울함, 스카리인의 목소리는 저절로 무거워졌다.
"그건 세 사람의 배신자들 때문이었지. 제둑스, 뷔라아민, 그리고……"
한때는 형이라고 불렀던 이름, 한때는 벗이라고 일컫던 이름, 한때는 동지라고 믿었던 이름, 그러나 이제는 한 치의 용서도 않고 추호의 동정도 없이 찢어 죽여야 마땅한 이름!
"던컨, 그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던컨, 그가 또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상기하는 스카리인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당시 에릭은 구국회(救國會)의 주요 멤버 중 하나였어. 그는 샤카무트 837의 개발 정보를 가지고 이드문 제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지. 그를 경호하는 일은 내 몫이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사실을…… 대들보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던컨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지…… 그리고……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는 암살당했어…… 내 실수 때문에 죽은 거야……" 스카리인은 어금니를 앙다물며 뒤에 이어지는 말을 삼켜 버렸다. '던컨이 사주했고…… 무라하이와 렉클이 손을 썼고…… 밀레드르 대령은 방관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작지만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자신의 얼굴을 불태우고,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아내를……
"그리고 로리아는…… 엄청난 슬픔을 견디지 못해…… 삶을 포기하고…… 몸과 마음을 이 배에 내맡겼지……"
에릭의 소망은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은퇴해서 전세계를 유람하는 것이었다. 그 소망에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가기 위해 쌈짓돈까지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일하는 틈틈이 짬을 내서 이 요트를 만들었다. 햇살이 따뜻한 곳에선 돛대를 높이 세워 태양풍의 힘으로 느긋하게 흘러가고, 망망대해에선 성간 물질을 끌어 모아 램제트 엔진으로 경쾌하게 달려가고, 항성과 항성 사이는 순동(瞬動) 엔진으로 건너뛰며, 겉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속은 거실처럼 편안하다고 자랑하면서, 만족스런 웃음을 짓곤 했다.
그러나 이 배는 웃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손전등이 그린 빛의 원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며 듬직한 철문의 윤곽을 비췄다. 가슴 높이께, 손바닥만한 검은색 덮개가 붙어 있었다. 덮개를 가볍게 누르자 딸칵 소리가 나면서 작은 키보드가 튀어나왔다. 스카리인은 검지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암호를 입력했다. 암호는 역시 에릭……
"로리아는 이제 이 배와 하나가 된 거야…… 그리고 끝없이 방황하는 거야……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버겁고 힘든 소리와 함께 짙은 먼지구름을 토해내며 문이 열렸다. 세시나는 얼굴을 가리며 재채기를 했고, 스카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전등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넓고 높은 반원형의 조타실…… 바닥엔 두껍게 먼지가 깔렸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스크린은 불이 꺼졌고…… 계기판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고…… 빈 의자의 행렬은 처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왼쪽 구석, 깊은 정적 속에 유리관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15년 전, 그 유리관을 처음 봤을 때 스카리인은 에릭을 이렇게 비웃었다.
'구명정도 아니고 우주선 조타실에 냉동 장치를 설치하는 건 난생 처음 보는군!"
에릭은 시원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이런 걸 보고 유비무환이라고 하는 거라고, 친구.'
그 말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설렘을 품고 다가갔다…… 유리관은…… 바닥은 길쭉한 은빛의 그릇이고, 앞뒤로는 굵은 케이블이 이어졌고, 위에는 갈색 먼지가 켜켜이 쌓여 안쪽이 겨우 들여다보이는 유리 뚜껑으로 덮여 있다…… 오른쪽 관은 비었지만…… 왼쪽 관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다……
스카리인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손으로 오래된 먼지를 정성스레 닦아냈다. 손바닥이 왼쪽으로 두어 번 수평으로 움직이고 오른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시간 속에 묻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 분이 로리아군요." 세시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상처 입은 마음을 품고 닫혀진 시간 속에 몸을 내던지고 탁 트인 바다로 떠나간 여인…… 밀랍처럼 창백하고 돌처럼 굳어진 얼굴…… 자물쇠로 잠긴 듯이 열리지 않는 눈꺼풀과 입술……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막기에는 너무나 얇아 보이는,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얀 상복(喪服)……
"아름다운 분이군요. 그런데…… 설마 돌아가신 건가요?"
"죽었다고 해야지." 스카리인의 입가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네?"
어린 소녀는 쪼그리고 앉아 허공을 맴도는 슬픔의 근원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아픈 기억이었고 가슴을 저미는 고통의 역사였고 마음을 뒤흔드는 감정의 진앙지였다. 샘솟는 비통함을 견디지 못한 세시나의 하얀 뺨 위로 투명한 눈물 선이 그어졌다.
"육신은 얼어붙고…… 오직 슬픔만이 남아 있을 뿐이군요……"
스카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리관은 생명 유지 장치가 아닌, 단순한 냉동 장치였다. 그녀의 육체는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존되어 있지만 두 번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 몸(肉身)은 오래 전에 얼어붙었고 넋(靈魂)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오직 그녀의 얼(自我)이 슬픈 사념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 로리아 -
스카리인은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15년, 15년이었다. 그녀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여행이었고 머나먼 방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이유를 손에 들고 있었다.
- 로리아, 15년 전에 미처 당신이 데려가지 못한 에릭을 돌려주러 왔소 -
스카리인은 손전등으로 빈 유리관의 머리맡에 붙어 있는 카드 크기만한 조작 패널을 비췄다. 나란히 늘어선 버튼 아래 씌어진 글자를 확인하고는, 손톱만한 크기의 하얀 버튼을 찾아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힘주어 눌렀다. 털컥, 투명한 유리 뚜껑이 푸스스 먼지를 떨어트리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스카리인은 그 혐오스런 기계 뭉치의 내장에 나무함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주인님, 그 상자는……?"
세시나의 물음에 스카리인은 이렇게 답했다.
"에릭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녀는 입을 가리고 짧은 비명을 토하더니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연신 고개를 수그렸다. 스카리인은 버튼을 눌러 뚜껑을 닫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 차라리 잘 된 일이야. 저 애가 내 과거를 알 필요는 전혀 없고, 나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다시 로리아를 내려다보며 주변을 떠도는 잔류 사념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 진작에 전해줬어야 하는데…… 모두 내 잘못이오, 로리아 -
산들바람 불듯이 공기가 흔들리며 가늘지만 뚜렷한 정신이, 부드럽지만 달콤하지 않은 목소리가, 뼈에 사무치는 슬픔에 물든 그녀의 사념이 전해졌다.
- 아니에요, 데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
감겨진 눈꺼풀은 미동도 않고 생기를 잃은 입술은 달싹이지 않는다. 강력한 사념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비통함 때문일까, 바다를 유랑하는 쇳덩이와 하나된 그녀의 마음은 온전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저주였다.
- 아니, 나야말로 고맙소. 방금 전에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오. 정말…… 고맙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스카리인은 말을 계속했다.
- 그날, 당신이 떠난 이후…… 나는 에릭의 유골 앞에서 모든 배신자들을 처단하기로 맹세했소. 그날 이후…… 나는 수십, 수백,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소. 앞으로도…… 에릭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배신자들에겐 가차없이 죽음을 선고하고 집행할 거요! -
격동하는 분노,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공기를 뒤흔들었고 소녀는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주인님?"
그는 세시나에게 분노와 증오의 근원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로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분별한 칭찬이건, 아니면 따끔한 질책이건, 어느 쪽이건 개의치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의 결과는 침묵뿐이다……
시간은 그녀의 분노를 집어삼켰고…… 고독에 침몰한 정신은 망각을 강요당했다…… 애써 슬픔을 일깨우기보다는 내버려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 로리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소? -
그는 미약한 희망이나마 붙들고자…… 억겁의 적막함이 통치하는 바다를 떠도는 이유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 아뇨. 아마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죠, 데스…… -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스카리인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집착은 물거품이 되었고 희망은 꺾어졌다.
- 저는 에릭과 함께 먼 길을…… 아주 먼 길을 떠날 거에요…… 영원히…… 아주 영원히…… -
그녀는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종말의 순간까지 함께 할 반려자를 다시 만났다. 스카리인은 먼지와 함께 아쉬움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녀를 찾을 필요도, 이유도, 모두 없어진 셈이군……
- 안녕, 로리아…… 영원히…… -
이별, 내세(來世)에서의 재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별, 하지만 사나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세시나의 손목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미약한 손전등의 불빛이 벽에 반사되어 스카리인의 얼굴에 떨어지며 침통한 그림자를 덧씌웠다.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 가자."
스카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타실을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는 별리(別離)의 선언이고…… 차갑게 죽어버린 연인들은 어둠으로 남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빛으로 돌아간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던 세시나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두터운 철벽 너머, 머나먼 저편에서 새까맣게 타 들어간 마음이 잿빛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분이…… 아까보다 더욱 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느낄 수 있다…… 차마 에릭의 사멸(死滅)을 인정하지 못해 유골을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고…… 그와 같은 종말을 갈구하며 냉동 장치에 몸을 눕혔지만 편안한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고…… 즐거워야 할 여행길은 고통스러운 유배길이 되었다……
그리고 한 줌 잿더미로 화한 육신은 말이 없으니…… 둘이 함께 있는 지금…… 서로 절실히 사랑했던 기억은…… 그녀를 슬프게 한다…… 소리 없이 통곡하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벗어나 침침한 통로를 지나 밝은 선내로 돌아오며, 스카리인은 등 뒤에서 차례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공기가 빠져나가고 안전 장치가 해제되고 잠금쇠가 풀리면서 전함과 요트는 하나에서 둘로 돌아갔다.
스카리인은 함교로 통하는 복도에 발을 올리며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빛 요트는 연결 통로를 뱃속에 집어넣고 가볍게 몸을 털며 떠나려는 참이었다. 아득한 저편으로……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서 애써 부인하려 했던 사실이, 한사코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날카롭게 관자놀이를 찔러 들었다. 그는……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스카리인은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 은빛 요트의 자취를 쫓아 복도를 내달렸다. 세시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한 낯빛으로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미끄러지는 복도 위로 요란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추억의 한 조각을 단 1초라도 오래 시선에 담아 두고자 하는 절망적인 질주. 하지만 조그만 쪽배는 아쉬움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 황량한 암흑의 바다로 몸을 던지며, 항적(航跡)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스카리인의 발이 느려지고, 둔해지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벽면에 길게 붙은 스크린에선 고즈넉한 어둠을 등지고 무심한 별들이 반짝이는 모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쓰라린 아픔이 되살아나는 왼쪽 얼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가슴 깊이 파묻었던 감정은, 마음 한구석에 묻어 놨던 진실은 쓰디쓴 고통으로 되살아났지만…… 결코 눈물이 되지는 않았다……
그의 등뒤에서, 세시나가 조용히 말했다.
"주인님, 늦었습니다. 이미 떠나갔습니다……"
물기 어린 눈동자, 그리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렇게 후회하실 거라면, 어째서 그분을 그냥 떠나보내신 겁니까? 차라리 진작에 붙잡으실 것을……"
소녀는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마음이 흔들렸을 뿐이다. 빛 바랜 추억과 낡은 감정에 붙잡혀서. 하지만 그것도 잠깐, 아주 잠깐 동안에 불과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처절한 녹색, 보이는 것은 무정한 암흑.
"그녀는 방랑자야. 절망과 고독을 부둥켜 안고 끝없는 바다를 방황하는 영혼이지. 하지만 붙잡을 순 없어. 그건 그녀가 선택한 운명이야. 그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란 말이야……"
스카리인은 자신이 그녀와 비슷한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세시나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지 못하고, 강요당한 소녀의 눈망울은 하늘의 숨결처럼 순수하고 투명했다. 그의 마음을 믿고, 그의 몸을 염려하고, 그의 광기를 슬퍼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는 소녀의 눈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어둠에 눈을 담근다. 성간 물질이 핏빛의 강물이 되어 흐르고 덧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 별빛이 되어 반짝이는, 두 팔을 활짝 벌려 갈데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반기는 광대하고 막막한 흑해(黑海)…… 그 유혹에 굴복한 스카리인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조그맣게,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 역시 방랑자니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