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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헤드기어를 벗은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카리인은 재차 명령했다.

"배다! 배를 찾아!"

"죄송합니다만, 주인님. 어떤 배를 찾으란 말씀이십니까? 적 함대는 철수하고 있습니다만……"

스카리인은 목을 돌려 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놈들을 찾으란 말이 아냐." 그리고 딱딱한 말투로 설명했다. "반경 3해리 안에 다른 배가 있을 거야. 전함이 아니라 소형 요트일 테니까 레이더의 해상도를 높여서 찾아 보도록 해."

세시나는 황급히 패널을 조작해 해상도를 높인 레이더 화면을 살피고 보조 스크린을 확인하더니,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거리 0.85해리, 상대방위 8-1에서 질량 및 에너지 반응 확인, 크기 약 100빌(35미터), 무게 약 14반테렌(81톤)의 소형 요트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이런 배가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주인님께선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까 우리를 도와준 사념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나?"

그 물음에 세시나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느끼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적의 사념을 막아내느라 기진한 상태였으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스카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망 대신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괜찮아. 신경 쓸 것 없어.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면서 조종간을 꺾어 배의 방향을 바꿨다. 15년, 15년만이었다.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쿠데타와 굴욕적인 항복 선언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심이 싹트고 배신이 판치고 음모가 소용돌이쳤다. 충직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야비한 자들이 부와 명예를 움켜쥐고 건실한 인간들은 개처럼 내쫓겼다. 그리고 혼란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요새에서 그는 둘도 없는 친구를 잃고 목숨처럼 사랑하던 여인과 헤어졌다……

"그런데 저건 어떤 배입니까?"

어린 소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해 질문을 던지자 스카리인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주지."

죽음의 날개, 에카무드는 죽음으로 더럽혀진 가스층을 떠나 순수하고 맑은 어둠이 펼쳐진 너른 바다의 품에 안겼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쩍이는 별빛은 삶을 관망하는 등대, 무채색의 소행성은 투박하고 위험한 암초, 그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바다는 진공(眞空)과 허무(虛無)로 충만한 세계……

"추적 중인 요트는 상대방위 2-10, 약 12.9해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시트 11번 순동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시나는 레이더 화면과 보조 스크린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따라잡으려면 약 20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이미 15년이란 세월을 기다렸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까, 스카리인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신을 집중하며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 로리아…… -

바위처럼 고요한 바다에 애타는 마음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추적 중인 배가 속도를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4, 5분 뒤에는 접촉할 수 있습니다." 세시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 저 배와 연결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상세한 설명이 생략된 단순한 긍정에 소녀는 만족하지 못하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친구분이라도 타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해야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분입니까?"

잠시의 망설임,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박하는 이름을 조그만 목소리로 뇌까렸다.

"로리아."

"로리아? 여자분입니까?"

세시나의 맑은 눈이 스카리인을 내려다 봤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자동 조종 장치를 켜서 상대편 함에 접근해 연결할 것을 지시하더니, 형형색색의 별빛에 매몰되어 있던 조그만 점을 왼쪽 보조 스크린에 크게 확대시켜 놓고, 그것을 홀린 듯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유성처럼 찬란한 은빛에는 변함이 없다…… 둘로 갈라진 뱃꼬리는 곱게 땋은 머리처럼 늘어졌고…… 몸통은 날개를 접은 비둘기 같고…… 허리에 두른 태양풍 돛은 금빛의 망토였고…… 머리통은 나이 어린 소녀가 흘리는 눈물 모양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것은 주박(呪縛)에 얽혀 이 바다를 떠도는 운명……

언제였더라, 그녀는 바다의 끄트머리에 서서 이 세상의 별빛들을 굽어 살피고 싶다는 희망을 털어놓았지. 외롭고 쓸쓸한 별들에게 귀여운 이름을 지어주며 품에 보듬어 안겠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젠 그녀가 외로운 별이 되었다…… 스카리인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남편이 모는 요트를 타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겠노라 말할 때, 그녀는 맑고 고운 웃음을 지었지…… 그러나 이제 그녀는 홀로 남았다…… 그녀의 남편, 나의 벗,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상쾌한 마음으로 망망대해를 누비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며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던 사내, 에릭…… 망각과 소멸의 심연에 빠진다 할지라도, 죽음과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할지라도 잊을 수 없는 친구……

[그녀에게……]


스카리인이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되새겼다. 잊을 수 없는 맹세의 한 조각을.

[그녀에게 반드시 전해줘야 한다……]

그는 오른쪽 팔걸이로 손을 뻗어 조작 패널 가장자리의 조그만 회색 다이얼을 왼쪽 끝으로 돌렸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팔걸이 안쪽의 얇은 금속판이 좌우로 열리면서 조그만 서랍이 스르르 튀어나왔다. 그 안에서 잠들고 있는 것은 작고 투박한 적갈색 나무함. 좌우로 손바닥 한 뼘 길이에 위아래는 반 뼘 높이, 쓸데없는 장식이나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는, 자연스런 나뭇결을 살린 종말의 상자……

스카리인은 성직자가 성물(聖物)을 대하듯이 경건한 태도로 나무함을 받쳐 들었다. 한없이 가볍지만, 끝없이 무거운 존재감. 그의 얼굴에 새겨진 상흔이 실룩거렸다. 눈에는 회한이 서렸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설령 피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할지라도 시간은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법이니까……

"거리 50키엔(6000 킬로미터). 이제 곧 연결 경로로 접근합니다." 세시나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주인님, 상대편이 연결 암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스카리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암호는 '에릭', '에릭'이다."

"에릭?"

세시나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건반을 두들겼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암호를 승인했습니다. 지금부터 연결 경로로 진입합니다. 연결 예상 시간은 약 5분 뒤입니다."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콩알만한 점이 쑥쑥 커지더니 전방위 스크린의 앞면을 가득 채우는 은빛으로 변하고……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탓에 낡고 더러워졌지만…… 예전과 다름없는 몸매를 자랑하는 우주선을 보며 …… 그는 짧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소녀는 탄성을 지른다……

"정말 아름답게 생긴 요트군요. 저런 디자인은 처음 봅니다.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저건 에릭이 만든 배야.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에카무드와 마찬가지로."

"예엣?" 세시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스카리인에게선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나의 전함과 하나의 요트…… 중무장한 파괴 병기와 맨주먹의 유람선…… 재앙을 초래하고 파멸의 불꽃을 찬양하는 거대한 배가 평화를 노래하는 자그마한 배의 왼쪽 옆구리로 느릿느릿 부끄러운 걸음을 옮기고……

노끈처럼 질긴 중력장이 이어지며…… 둘은 부딪힐 듯이 가까이 접근하지만 결코 부딪히진 않고……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좌현과 우현을 나란히 하며 팔짱을 낀다……

"지금부터 상대편 신호에 맞춰 감속을 실시합니다. 완전 정지까지 앞으로 50초."

잔잔하게 물결치며 흐르던 별빛들이 굼벵이처럼 느려지더니만 마침내는 지상에서 바라보는 밤하늘 풍경처럼 고요해졌다.

"감속 완료. 현재속도 0. 가속, 반가속 엔진을 정지시키고 '통로'를 연결합니다."

중력장이 여덟 팔자 모양으로 서로를 옭아매서 미묘한 균형이 유지된 상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연결 통로를 뱉어낸다…… 이쪽은 새카맣고 굵직한 원통이고 저쪽은 새하얀 육각형의 통로…… 겉보기엔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속으로는 같은 규격을 따르고 있기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입술을 부딪히며 견고하게 맞물려…… 내벽과 외벽이 빈틈없이 연결되며 사람이 숨쉴 수 있는 공기가 들어가…… 이쪽과 저쪽이 하나가 된다……

"세시나, 너도 따라올 테냐?"

그 질문에 세시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예."

스카리인은 계기판의 키보드로 복잡하고 긴 암호를 입력하고 계기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에카무드, 지금부터 항해를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전투 함교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자동 대응 태세로 대기해라."

보조 스크린에 '암호 확인', '명령 인식' 등의 단어가 주르르 떠올랐다. 함교의 뒤편, 관제사석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서 검푸른 어둠이 커튼처럼 밀려나며 하얀 벽면과 은빛의 출입문이 드러났다. 그리고 문이 소리 없이 좌우로 벌어지면서 밝은 빛이 밀려 들어왔다.

팔걸이 끝에 있는 길쭉한 하얀 버튼을 가볍게 두들기니 어깨와 허리를 붙들고 있던 안전 장치가 위로, 옆으로 벗겨졌다. 그는 나무함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따라 내려온 세시나는 그 옆에 바짝 달라붙어, 밋밋한 나무 상자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수십억 년의 어둠이 지배하는 함교를 떠나면 긴 복도가 나온다. 폭은 열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 양쪽 벽에는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끊김 없이 이어져 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푸르른 어둠과 검붉은 가스, 오른쪽에 자리잡은 것은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는 은빛 요트.

바닥엔 두 줄의 자동 복도가 새까만 양탄자처럼 깔렸다. 스카리인은 왼쪽 복도에 발을 올렸고…… 롤러가 회전하고 바닥이 앞으로 움직이며 느린 걸음에 속도를 더해주고…… 밖에선 붉으죽죽한 가스 띠가 냇물처럼 흐르고 별빛이 한낮의 백사장처럼 반짝이지만…… 우울한 눈동자는 요트의 외곽을 따라 광대처럼 춤추는 은은한 반사광을 쫓는다……

친숙한 곡선과 직선의 배합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는 외장(外裝) 타일은 시선을 빼앗는다…… 에카무드의 3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배지만…… 거기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길고 복잡하다……

문득,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갈색 눈동자의 존재를 깨닫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맑고 투명한…… 청순하고 다정한 소녀의 눈빛이…… 그의 심장을 꿰뚫는다…… 차라리 불안하고 겁먹은 빛이 섞였다면 마음 편하련만…… 거짓없이 솔직한 마음은 그를 괴롭힐 뿐이다……

"로리아란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스카리인은 그녀를 피하듯이 시선을 다시 바깥의 쇳덩어리로 돌리며 대답했다.

"친구의 아내였어."

세시나는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영혼을 짊어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는 사내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다리자, 저 분이 먼저 말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복도가 말없이 달려가고 터벅터벅 발소리는 규칙적으로 울리고 그림자는 앞뒤로 흔들렸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해 들어갔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크고 단단한 금속제 문, 로리아의 요트와 연결된 통로로 들어가는 문, 스카리인과 세시나는 자동 복도에서 내려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한 변이 7리크(약 6미터) 가량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문은 어두운 잿빛, 어깨 높이 부근엔 새하얀 인식판과 작은 스크린이 붙어 있었다. 스카리인은 재빨리 스크린의 글자를 확인했다. ……연결 완료, 통로에 공기 주입 완료, 안전 점검 완료, 최종 승인 대기 중……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들어 인식판을 눌렀다.

"에카무드, 문을 열어라."

인식판이 지문을 읽고 성문(聲紋)을 판별하면서 30여 개가 넘는 안전 장치가 차례차례 풀렸다. 1초, 2초, 3초……문 한가운데 X자 모양의 선이 그어지더니, 네 조각으로 쪼개지며 크게 입을 벌렸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콩알만한 돌기가 촘촘히 솟은 철회색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상자를 길게 잡아 늘린듯한 통로였다. 바닥은 노란 빛으로 지저분하게 얼룩졌고, 중간 즈음에선 흐릿한 어둠이 허리를 낮추고 그들을 기다렸다.

스카리인은 한 발 안으로 내디뎠다. 텅, 무거운 발소리가 텅, 텅, 텅 구슬프게 울었다. 세시나의 발은 탕, 탕, 탕, 박자를 맞춰 그를 쫓았다.

백여 걸음이 지났을 무렵, 천장에서 노오란 불빛을 선사하던 각진 조명이 사라졌다. 대신에 무분별하게 깜박이는 녹색 조명이 밋밋한 은회색 벽면에 줄지어 섰다. 타고난 하얀 빛을 잃어버리고 잿빛으로 퇴색한 타일 위에서 구둣발은 둥, 둥, 북소리를 냈고, 스카리인은 자신의 가슴에서 똑 같은 북소리를 들었다. 둥, 둥, 둥……

침침한 빛은 발치를 가까스로 밝히고…… 그림자는 시계추처럼 앞뒤로 흔들리고…… 구두 뒤축이 바닥을 쓸면서 정체된 공기가 요동치며 먼지가 날리고…… 세시나는 손으로 입가를 감싸며 연신 기침을 하지만…… 스카리인은 기나긴 시간에 걸친 지루한 기다림을 보상받기 위해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군데군데 자잘한 상채기가 새겨지고 페인트가 벗겨져 지저분하기 짝없는 벽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통로의 끝에선, 빛이 질식해서 숨져 버린 공간에선, 갓 캐낸 석탄처럼 새까만 금속제 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카리인은 문가의 패널에 손을 얹고, 눌렀다.

텅, 텅, 쇠파이프로 커다란 드럼통을 후려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삐그덕, 문짝이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안은 구원의 빛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공포의 심연, 바다보다 적막하고 암흑보다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나무함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주머니에서 몽당연필 크기의 손전등을 꺼내서 위아래로 흔들며 앞을 살폈다. 세시나도 손전등을 꺼내서 빛을 더했다.

흔들, 낮은 천장엔 불빛이 사라진 둥그런 조명이 열을 맞춰 늘어섰다. 흔들, 허망한 공백으로 가득한 스크린이 나란히 붙은 하늘색 벽에는 고독이 습기처럼 스며들었다. 흔들, 움직이지 않는 자동 복도 위에는 침묵의 세월을 증명하듯이 다갈색의 먼지가 엄지 손톱만한 두께로 살포시 쌓였다. 그리고 허공에는……

갑자기 세시나가 몸을 바르르 떨면서 손전등을 떨어트렸다. 툭, 데구르르, 빛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뽀얗게 피어 오르는 먼지를 비쳤다. 그녀는 현기증을 견디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스카리인의 굵은 팔뚝을 붙잡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주인님……"

세시나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파리한 얼굴을 어깨 사이에 파묻고 겁먹은 눈으로 힐끔힐끔 좌우를 쳐다봤다. 스카리인은 소녀를 달래듯이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겁먹을 것 하나도 없다, 세시나. 위험한 거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허공에는…… 살갗이 에이는 삭풍과도 같은…… 달도 뜨지 않은 밤길을 정처 없이 헤매는 몽유병자의 눈빛처럼 황폐한……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로 뒤덮인 사막에서 길 잃은 여행자가 느끼는 갈증처럼 애타는…… 가슴을 저미고 뇌수를 후벼 파는 감정이…… 회오리 친다!

그리고…… 억만 겁이 넘는 비애에 중독된 소녀의 눈에선 투명한 수정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여긴 슬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너무 슬퍼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겠지, 스카리인의 눈밑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통곡하는 마음이 폭포수처럼 흘리는 눈물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진한 핏방울을 토해내듯이 울부짖는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그리고 그 슬픔의 유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 하나뿐이겠지……

"그래, 그녀는…… 로리아의 마음은…… 울고 있는 거야…… "

"어째서……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는 거죠?"

천진하고 투명한 눈동자가 목멘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스카리인은 조그만 소녀를 부축해 가면서 세월을 먹을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을 되짚어 올라갔다.

"로리아, 그녀는 내 친구 에릭의 아내였지." 높낮이가 없는, 감정을 억누른 대사가 이어졌다. "에릭, 에릭 반더빌츠, 녀석은 진짜 천재였어. 내가 겨우 중위 계급장을 달았을 무렵에 이미 샤카무트 라인의 개발 책임자가 되어 있었지. 그리고 4년 만에 샤카무트 837형의 시제품을…… 에카무드를 만들어 냈어."

승리의 날개 샤카무트, 그것은 한때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목숨을 내맡겼던 믿음직한 동반자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그 이름은 승리가 아닌 패배를 뜻하는 초라한 상징물로 전락해 버렸다.

죽음의 날개 에카무드, 그것은 적들에게 궁극적이고 영원한 패배인 죽음을 안겨주라는 의미에서 에릭이 붙인 암호명이었다. 그러나 불길한 이름이 불러들인 변덕스런 죽음의 신이 제일 먼저 취한 목숨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에릭의 목숨이었다……

"로리아는 그의 아내였어……"

그는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사랑했지만…… 친구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아름답고 순수한 여인이었지. 그리고 뛰어난 사념 공학자로 에카무드의 사념 증폭 엔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눈앞에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화난 얼굴이…… 토라진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러나 슬픈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2차 십자 대전이 한창일 때, 나는 최전선에서 전우들과 함께 피를 흘렸고 에릭과 로리아는 후방에서 신기술을 개발하느라 비지땀을 흘렸지. 하지만 우리가 투쟁한 보람도 없이 랏스 연합은 어이없이 붕괴해 버렸어."

한때 대낮처럼 밝았던 복도, 지금은 몇 치 앞을 겨우 밝히는 손전등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때 쾌활한 사람들의 재담이 넘치던 객실, 지금은 오래된 지하감방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폐허가 된 유적과도 같은 침울함, 스카리인의 목소리는 저절로 무거워졌다.

"그건 세 사람의 배신자들 때문이었지. 제둑스, 뷔라아민, 그리고……"

한때는 형이라고 불렀던 이름, 한때는 벗이라고 일컫던 이름, 한때는 동지라고 믿었던 이름, 그러나 이제는 한 치의 용서도 않고 추호의 동정도 없이 찢어 죽여야 마땅한 이름!

"던컨, 그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던컨, 그가 또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상기하는 스카리인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당시 에릭은 구국회(救國會)의 주요 멤버 중 하나였어. 그는 샤카무트 837의 개발 정보를 가지고 이드문 제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지. 그를 경호하는 일은 내 몫이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사실을…… 대들보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던컨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지…… 그리고……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는 암살당했어…… 내 실수 때문에 죽은 거야……" 스카리인은 어금니를 앙다물며 뒤에 이어지는 말을 삼켜 버렸다. '던컨이 사주했고…… 무라하이와 렉클이 손을 썼고…… 밀레드르 대령은 방관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작지만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자신의 얼굴을 불태우고,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아내를……

"그리고 로리아는…… 엄청난 슬픔을 견디지 못해…… 삶을 포기하고……  몸과 마음을 이 배에 내맡겼지……"

에릭의 소망은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은퇴해서 전세계를 유람하는 것이었다. 그 소망에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가기 위해 쌈짓돈까지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일하는 틈틈이 짬을 내서 이 요트를 만들었다. 햇살이 따뜻한 곳에선 돛대를 높이 세워 태양풍의 힘으로 느긋하게 흘러가고, 망망대해에선 성간 물질을 끌어 모아 램제트 엔진으로 경쾌하게 달려가고, 항성과 항성 사이는 순동(瞬動) 엔진으로 건너뛰며, 겉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속은 거실처럼 편안하다고 자랑하면서, 만족스런 웃음을 짓곤 했다.

그러나 이 배는 웃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손전등이 그린 빛의 원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며 듬직한 철문의 윤곽을 비췄다. 가슴 높이께, 손바닥만한 검은색 덮개가 붙어 있었다. 덮개를 가볍게 누르자 딸칵 소리가 나면서 작은 키보드가 튀어나왔다. 스카리인은 검지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암호를 입력했다. 암호는 역시 에릭……

"로리아는 이제 이 배와 하나가 된 거야…… 그리고 끝없이 방황하는 거야……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버겁고 힘든 소리와 함께 짙은 먼지구름을 토해내며 문이 열렸다. 세시나는 얼굴을 가리며 재채기를 했고, 스카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전등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넓고 높은 반원형의 조타실…… 바닥엔 두껍게 먼지가 깔렸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스크린은 불이 꺼졌고…… 계기판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고…… 빈 의자의 행렬은 처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왼쪽 구석, 깊은 정적 속에 유리관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15년 전, 그 유리관을 처음 봤을 때 스카리인은 에릭을 이렇게 비웃었다.

'구명정도 아니고 우주선 조타실에 냉동 장치를 설치하는 건 난생 처음 보는군!"

에릭은 시원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이런 걸 보고 유비무환이라고 하는 거라고, 친구.'

그 말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설렘을 품고 다가갔다…… 유리관은…… 바닥은 길쭉한 은빛의 그릇이고, 앞뒤로는 굵은 케이블이 이어졌고, 위에는 갈색 먼지가 켜켜이 쌓여 안쪽이 겨우 들여다보이는 유리 뚜껑으로 덮여 있다…… 오른쪽 관은 비었지만…… 왼쪽 관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다……

스카리인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손으로 오래된 먼지를 정성스레 닦아냈다. 손바닥이 왼쪽으로 두어 번 수평으로 움직이고 오른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시간 속에 묻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 분이 로리아군요." 세시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상처 입은 마음을 품고 닫혀진 시간 속에 몸을 내던지고 탁 트인 바다로 떠나간 여인…… 밀랍처럼 창백하고 돌처럼 굳어진 얼굴…… 자물쇠로 잠긴 듯이 열리지 않는 눈꺼풀과 입술……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막기에는 너무나 얇아 보이는,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얀 상복(喪服)……

"아름다운 분이군요. 그런데…… 설마 돌아가신 건가요?"

"죽었다고 해야지." 스카리인의 입가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네?"

어린 소녀는 쪼그리고 앉아 허공을 맴도는 슬픔의 근원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아픈 기억이었고 가슴을 저미는 고통의 역사였고 마음을 뒤흔드는 감정의 진앙지였다. 샘솟는 비통함을 견디지 못한 세시나의 하얀 뺨 위로 투명한 눈물 선이 그어졌다.

"육신은 얼어붙고…… 오직 슬픔만이 남아 있을 뿐이군요……"

스카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리관은 생명 유지 장치가 아닌, 단순한 냉동 장치였다. 그녀의 육체는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존되어 있지만 두 번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 몸(肉身)은 오래 전에 얼어붙었고 넋(靈魂)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오직 그녀의 얼(自我)이 슬픈 사념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 로리아 -

스카리인은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15년, 15년이었다. 그녀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여행이었고 머나먼 방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이유를 손에 들고 있었다.

 - 로리아, 15년 전에 미처 당신이 데려가지 못한 에릭을 돌려주러 왔소 -

스카리인은 손전등으로 빈 유리관의 머리맡에 붙어 있는 카드 크기만한 조작 패널을 비췄다. 나란히 늘어선 버튼 아래 씌어진 글자를 확인하고는, 손톱만한 크기의 하얀 버튼을 찾아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힘주어 눌렀다. 털컥, 투명한 유리 뚜껑이 푸스스 먼지를 떨어트리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스카리인은 그 혐오스런 기계 뭉치의 내장에 나무함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주인님, 그 상자는……?"

세시나의 물음에 스카리인은 이렇게 답했다.

"에릭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녀는 입을 가리고 짧은 비명을 토하더니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연신 고개를 수그렸다. 스카리인은 버튼을 눌러 뚜껑을 닫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 차라리 잘 된 일이야. 저 애가 내 과거를 알 필요는 전혀 없고, 나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다시 로리아를 내려다보며 주변을 떠도는 잔류 사념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 진작에 전해줬어야 하는데…… 모두 내 잘못이오, 로리아 -

산들바람 불듯이 공기가 흔들리며 가늘지만 뚜렷한 정신이, 부드럽지만 달콤하지 않은 목소리가, 뼈에 사무치는 슬픔에 물든 그녀의 사념이 전해졌다.

 - 아니에요, 데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

감겨진 눈꺼풀은 미동도 않고 생기를 잃은 입술은 달싹이지 않는다. 강력한 사념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비통함 때문일까, 바다를 유랑하는 쇳덩이와 하나된 그녀의 마음은 온전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저주였다.

 - 아니, 나야말로 고맙소. 방금 전에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오. 정말…… 고맙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스카리인은 말을 계속했다.

 - 그날, 당신이 떠난 이후…… 나는 에릭의 유골 앞에서 모든 배신자들을 처단하기로 맹세했소. 그날 이후…… 나는 수십, 수백,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소. 앞으로도…… 에릭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배신자들에겐 가차없이 죽음을 선고하고 집행할 거요! -

격동하는 분노,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공기를 뒤흔들었고 소녀는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주인님?"

그는 세시나에게 분노와 증오의 근원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로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분별한 칭찬이건, 아니면 따끔한 질책이건, 어느 쪽이건 개의치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의 결과는 침묵뿐이다……

시간은 그녀의 분노를 집어삼켰고…… 고독에 침몰한 정신은 망각을 강요당했다…… 애써 슬픔을 일깨우기보다는 내버려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 로리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소? -

그는 미약한 희망이나마 붙들고자…… 억겁의 적막함이 통치하는 바다를 떠도는 이유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 아뇨. 아마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죠, 데스…… -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스카리인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집착은 물거품이 되었고 희망은 꺾어졌다.

 - 저는 에릭과 함께 먼 길을…… 아주 먼 길을 떠날 거에요…… 영원히…… 아주 영원히…… -


그녀는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종말의 순간까지 함께 할 반려자를 다시 만났다. 스카리인은 먼지와 함께 아쉬움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녀를 찾을 필요도, 이유도, 모두 없어진 셈이군……

 - 안녕, 로리아…… 영원히…… -

이별, 내세(來世)에서의 재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별, 하지만 사나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세시나의 손목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미약한 손전등의 불빛이 벽에 반사되어 스카리인의 얼굴에 떨어지며 침통한 그림자를 덧씌웠다.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 가자."

스카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타실을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는 별리(別離)의 선언이고…… 차갑게 죽어버린 연인들은 어둠으로 남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빛으로 돌아간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던 세시나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두터운 철벽 너머, 머나먼 저편에서 새까맣게 타 들어간 마음이 잿빛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분이…… 아까보다 더욱 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느낄 수 있다…… 차마 에릭의 사멸(死滅)을 인정하지 못해 유골을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고…… 그와 같은 종말을 갈구하며 냉동 장치에 몸을 눕혔지만 편안한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고…… 즐거워야 할 여행길은 고통스러운 유배길이 되었다……

그리고 한 줌 잿더미로 화한 육신은 말이 없으니…… 둘이 함께 있는 지금…… 서로 절실히 사랑했던 기억은…… 그녀를 슬프게 한다…… 소리 없이 통곡하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벗어나 침침한 통로를 지나 밝은 선내로 돌아오며, 스카리인은 등 뒤에서 차례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공기가 빠져나가고 안전 장치가 해제되고 잠금쇠가 풀리면서 전함과 요트는 하나에서 둘로 돌아갔다.

스카리인은 함교로 통하는 복도에 발을 올리며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빛 요트는 연결 통로를 뱃속에 집어넣고 가볍게 몸을 털며 떠나려는 참이었다. 아득한 저편으로……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서 애써 부인하려 했던 사실이, 한사코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날카롭게 관자놀이를 찔러 들었다. 그는……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스카리인은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 은빛 요트의 자취를 쫓아 복도를 내달렸다. 세시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한 낯빛으로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미끄러지는 복도 위로 요란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추억의 한 조각을 단 1초라도 오래 시선에 담아 두고자 하는 절망적인 질주. 하지만 조그만 쪽배는 아쉬움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 황량한 암흑의 바다로 몸을 던지며, 항적(航跡)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스카리인의 발이 느려지고, 둔해지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벽면에 길게 붙은 스크린에선 고즈넉한 어둠을 등지고 무심한 별들이 반짝이는 모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쓰라린 아픔이 되살아나는 왼쪽 얼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가슴 깊이 파묻었던 감정은, 마음 한구석에 묻어 놨던 진실은 쓰디쓴 고통으로 되살아났지만…… 결코 눈물이 되지는 않았다……

그의 등뒤에서, 세시나가 조용히 말했다.

"주인님, 늦었습니다. 이미 떠나갔습니다……"

물기 어린 눈동자, 그리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렇게 후회하실 거라면, 어째서 그분을 그냥 떠나보내신 겁니까? 차라리 진작에 붙잡으실 것을……"

소녀는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마음이 흔들렸을 뿐이다. 빛 바랜 추억과 낡은 감정에 붙잡혀서. 하지만 그것도 잠깐, 아주 잠깐 동안에 불과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처절한 녹색, 보이는 것은 무정한 암흑.

"그녀는 방랑자야. 절망과 고독을 부둥켜 안고 끝없는 바다를 방황하는 영혼이지. 하지만 붙잡을 순 없어. 그건 그녀가 선택한 운명이야. 그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란 말이야……"

스카리인은 자신이 그녀와 비슷한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세시나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지 못하고, 강요당한 소녀의 눈망울은 하늘의 숨결처럼 순수하고 투명했다. 그의 마음을 믿고, 그의 몸을 염려하고, 그의 광기를 슬퍼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는 소녀의 눈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어둠에 눈을 담근다. 성간 물질이 핏빛의 강물이 되어 흐르고 덧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 별빛이 되어 반짝이는, 두 팔을 활짝 벌려 갈데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반기는 광대하고 막막한 흑해(黑海)…… 그 유혹에 굴복한 스카리인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조그맣게,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 역시 방랑자니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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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방향에서 거센 광풍(狂風)이 불어 닥쳤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이온화된 수소 가스가 붉은색 고함을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가고 빛이 비뚤어지며 주변의 풍경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먼 바다의 별들이 한데 엉겨 붙었다가 길고 넓은 부챗살 모양을 그리며 떨어져 나가고 가까운 소행성의 윤곽이 걸레처럼 찢어지며 기괴한 추상화를 그렸다.

검붉게 녹슬어 이빨 빠진 칼을 부러뜨리고, 인간을 핏덩이로, 쇳덩이를 쇳조각으로, 물리적인 진공을 추상적인 허공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 에카무드에 육박해 왔다. 그것은 상상을 초극하는 충격이었지만, 세시나는 이를 앙다물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더욱 무겁고 더욱 강하게 도끼질했고, 그것을 막아내는 소녀의 방패는 파편을 흩날리며 부서졌다. 세시나는 가중되는 압력과 신경을 손으로 잡아 뽑는 듯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온몸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너무 강해요, 너무…… 더는 버틸 수가……!"

"조금만 버텨!" 스카리인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의식을 집중하려 애썼다. '한 놈이라도 떨어져 나간다면……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긴다면……'

적들의 사념은 에카무드를 완전히 휘어잡아 걸레 짜듯 비틀기 시작했다. 그 강대한 힘에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도망칠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며 전력을 기울여 방어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궤도를 일탈한 집념은 처절한 살의를 낳고 살의는 다시 광기를 낳았으니, 비뚤어진 광기는 고귀한 이성과 지성을 박탈하고 정상적인 사고(思考)를 마비시켜 오직 피 냄새를 쫓는 미치광이 야수를 낳았다.

'……그렇다면 저 개자식을 죽일 수 있을 텐데!'

그는 이빨을 부드득 갈며 사념을 확장했다. 그것은 방어를 위해서도 아니고 탈출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자신은 물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소녀의 목숨까지도 도외시한, 터무니없이 비정상적인 판단이었다.

 - 데스, 넌 정말 바보 멍텅구리야 - 렉클은 얄밉게 비아냥거렸다.

적들은 그의 공격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소모한 스카리인이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사념을 가다듬고 주포를 충전하고 어뢰를 장전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목숨이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순간, 하나의 느낌이 스카리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그것은 수천 년에 걸쳐 파도에 깎인 바위처럼 두리뭉실하고 수만 년에 걸쳐 풍화된 모래사장처럼 아름답고 수십억 년에 걸쳐 빛나는 별들처럼 반짝이는 머나먼 시간의 파편……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힘이 되어 적 함대를 꿰뚫었다.

예기치 못한 타격에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이어져 있던 여덟 갈래 사념의 정신적인 연결이 맥없이 끊어져 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 찰나에 불과한 기회, 그러나 스카리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한 가닥의 원념(怨念)이 여덟 갈래 사념 사이로 쏜살같이 쳐들어가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공간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내면서 여섯 척의 발스레인이 휴지처럼 구겨지고 세 척의 오뤽이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초신성의 폭발과 맞먹는 강렬한 빛이 어그러진 공간에 악령과도 같은 기괴한 잔상을 남기며 퍼져 나갔고, 열기와 파편 조각이 격자선의 위로, 아래로, 옆으로 질주하며 주변의 전함을 덮쳤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쇳덩이에 두들겨 맞아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오뤽 한 척은 피를 흘리고 배를 뒤집으며 전열에서 떨어져 나갔고 태양열과 같은 온도의 플라스마를 뒤집어 쓴 세 척의 발스레인은 순식간에 두부처럼 뭉개졌다.

그리고 충격파가 뒤를 이었다. 스카리인은 조종간을 잡아당겨 에카무드를 뒤로 뺐고 살아남은 적 함대는 빛으로 뒤덮이고 충격으로 뒤집힌 가스층을 황급히 벗어나 일렬 횡대로 진형을 다시 짰다.

'남아 있는 건 오뤽 네 척에 발스레인 다섯 척, 사념은 셋이라…… 해볼만한 싸움이 됐군.'

스카리인은 볼을 굴려 에카무드를 반전시켰다.

"세시나, 지금부터 최고 속력으로 적 함대 중앙을 돌파한다! 사념 방어는 네게 맡긴다."

아까의 충격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눈 밑에 그림자가 지고 피로가 덜 마른 땀방울로 남았지만,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소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방위 스크린의 옆으로 소행성들이 스쳐 지나가고 가스의 빛깔이 엷어지면서 어둠의 깊이가 더해졌다. 눈앞에 있던 흐릿한 점들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오뤽과 발스레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순간, 적함에서 쏟아져 나오는 입자포와 열선포의 섬광과 어뢰의 궤적으로 화면이 가득 메워졌다. 그러나 세시나의 사념에 붙들린 에너지는 휘어지고 꺾어지며 약화되고 마침내는 희미한 빛의 꼬리를 단말마로 남기며 암흑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았다. 그 어떤 물질보다 단단한 사념의 방패에 충돌한 중어뢰의 흑철빛 몸통은 찢어져 가루가 되고 플라스마는 빛을 뿌리며 안개처럼 흩어지고 육중한 탄심은 꺾어지고 부러졌다.

하얗고 노랗고 파란 빛이 교차하는 화려한 불꽃놀이, 에카무드는 부서진 쇳조각과 번쩍이는 불빛을 헤치고 비뚤비뚤 줄지어 선 오뤽을 향해 달려갔고, 스카리인의 시선은 꼬리가 끊어진 오뤽에 못박혔다.

'네놈은 두 번 다시 날 비웃고 욕하지 못할 거다. 왜냐하면 곧 죽을 테니까!'

다시 눈부신 섬광, 비껴나갔다. 비처럼 쏟아지는 어뢰들, 바스러진 가루가 흩날렸다. 거리가 10에서 5로, 다시 1로 줄어들면서 코를 벌름대는 오뤽의 주둥이가 화면을 가득 채웠고 세 갈래 사념이 교차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혼란과 공포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 렉클, 네 단짝인 무라하이가 기다리는 지옥에 보내주마! -

스카리인의 사념이 폭발했다. 그의 정신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적들이 허둥지둥 세운 마음의 벽을 단숨에 깨치고 무너트려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그 빈틈을 노리고, 에카무드는 자신이 품은 화력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유트라이드 고폭 어뢰가 2초 간격으로 발사되고, 충격 어뢰가 1초 간격으로 튀어나갔다. 보조포는 100분의 20초 간격으로 열선을 퍼부었다. 반회전 주포는 100분의 40초 간격으로, 회전 주포는 100분의 80초 간격으로, 빛의 속도로 가속된 입자를 쏟아냈다.

쇳덩이도 증발시키는 광자와 입자의 행렬이 오뤽-라팔레스 함의 옆구리를 두들기며 두터운 외부 장갑을 짓이기고, 충격 어뢰의 탄심이 단단한 내부 장갑을 찢어발기고, 뒤따른 고폭 어뢰의 탄체가 핵폭발을 일으키며 그 속을 남김 없이 갉아먹었다. 모든 적들에게 빠짐없이 공평하게 돌아가는, 차가운 침묵과 찬란한 섬광을 등지고 펼쳐진 창과 칼의 향연!

1초, 2초, 그리고 3초, 에카무드는 대부분의 어뢰와 입자와 광자를 토해내고 홀가분하게 날아갔다.

4초, 만신창이가 된 렉클의 전함은 공기를 내뱉으며 쭈그러들었다. 그리고 수백 수천 갈래의 빛을 뿌리며, 수만을 헤아리는 조각으로 분해됐다.

'저것이야말로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최후지!' 스카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솔직하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불길한 웃음소리!

5초, 한 척의 오뤽과 세 척의 발스레인도 렉클과 같은 운명을 밟았다. 소리 없이 울부짖는 죽음과 파멸은 어둠에 화려한 빛의 문양을 수놓았다.

6초,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크게 부서져서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는 오뤽이 충격파로 물결치는 가스층에 머리를 처박았다.

움직일 수 있는 전함은 오뤽 한 척, 그리고 발스레인 두 척. 그들 역시 깊은 손상을 입었기에 차마 에카무드에 맞서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가스층 속으로 가라앉았다. 대파된 오뤽의 생존자를 구출해 도망칠 작정이었다.

"적 함대의 생존 전함은 4척. 중전함 1척은 에너지 반응이 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든 엔진이 기능을 상실하여 정상적인 조타 및 항진이 불가능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중전함 1척과 경전함 2척은 전투 해역에서 빠르게 이탈하고 있습니다."

세시나는 보조 스크린에 떠오른 피해 상황을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도 순동 항행구로 진입하기 전에 로봇을 풀어 손상 부위를 점검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명예롭지만 죽음이 확실한 싸움을 하느니 치욕스럽더라도 한발 물러서는 것이 당연한 결정이라면, 섣불리 항전의 의지를 내보이는 대신에 등을 돌린 채 침묵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스카리인은 패배자들의 행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완벽한 무시로 일관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과거, 추억이었다.

스카리인은 헤드기어의 다이얼을 돌렸다. 생체 컴퓨터와의 연결이 끊기고 넓은 공간에 퍼져 있던 사념이 극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세포체가 헤드기어에 연결된 파이프의 컴컴한 구멍으로 스멀스멀 빨려 들고, 산소 마스크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묵직한 헤드기어가 나직하게 울어대며 위로 벗겨졌다. 무한대의 사념 공간에서 초라한 현실로 돌아온 충격에 손가락 끝까지 무력해지는 느낌, 탈력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내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세시나, 배를 찾아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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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리인은 가볍게 어깨 관절을 돌리고 조종간을 잡은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엄지 부근의 볼과 검지 부근의 휠을 살짝살짝 건드렸다. 쭉 뻗은 막대기를 상하좌우로 움직여 우주선의 상승과 하강과 좌우 롤링을 제어하고 둥그런 볼로 동체를 회전시키고 유연한 휠로 좌우 회전각을 미세하게 조절한다. 과도한 긴장이나 지나친 방심은 절대 금물이고 필요한 것은 얼어붙은 수면처럼 잔잔한 평상심이다.

헤드기어를 쓴 상태에선 구태여 조종간을 손에 쥘 필요가 없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듯이 본능적인 감각으로 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주먹을 휘둘러 탐탁잖은 사람의 턱뼈를 부수듯이 주포와 보조포와 어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게 제일이지.'

사관학교 시절의 혹독한 교육은 전선과 센서가 내장된 금속제 조종간을 여섯 번째 손가락으로 탈바꿈시켰다. 조종간을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과 다름없으리만치 자연스럽고 친숙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는 헤드기어를 쓰고서도 여전히 조종간으로 배를 움직이길 고집했다. 다만 생체 컴퓨터와 연동되는 화기 관제 시스템의 편리함과 효율성마저 외면하진 않았다.

 - 선두의 중전함을 주요 표적으로 설정한다 -

백일몽처럼 불분명한 사념의 경계선을 지나, 숫자의 재해석에 지나지 않는 레이더 화면의 한계를 뛰어넘어, 카메라가 잡아낸 실제 영상에 다섯 척의 중전함과 아홉 척의 경전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은 물론 상대편도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탓에, 그 윤곽선은 모서리가 흐리멍텅하게 뭉개져 보였다. 그리고 앞장서서 돌격해 오는 전함의 뱃머리에 반투명한 노란 원이 차례로 겹쳐졌다.

- 주포, 보조포 작동 준비 -

가상 공간을 부유하는 보조 스크린에 에카무드의 입체도가 투시되었다. 뱃머리의 회전 주포, 좌현과 우현과 상하갑판의 반회전 주포가 목표물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각부에 설치된 보조포도 함께 움직였다.

 - 전방 4개 발사관에 유트라이드 14식 충격 어뢰 장전 -

뱃머리 부근에 배치된 어뢰 발사관에 어뢰가 차례로 장전되었다. 번개처럼 날아가 끌처럼 날카롭고 바위처럼 묵직한 탄두로 중장갑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중어뢰는 좁은 발사관 속에서 무한대의 바다로 뛰쳐나갈 순간만을 기다리며 숨 죽이고 웅크렸다.

"접촉까지 앞으로 200초." 세시나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좋아, 이제 불꽃놀이를 할 시간이군."

먼저 중어뢰를 풀어놓고 순차적으로 주포와 보조포를 화려하게 쏘아대며, 적함을 젖히고 순동구로 뛰어든다, 그것이 스카리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념이, 단 하나의 사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그 계획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 데스, 너라는 얼간이는 아직도 악몽보다 못한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구나…… -

낯익고 익숙하지만 친근하긴커녕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파동(波動), 오래된 상처가 꿈틀대며 악물린 잇새로 짧은 이름이 새어 나왔다.

"렉클……"

무라하이와 렉클, 제둑스의 충실한 개, 간교한 언어와 막대한 뇌물로 순박한 사람들을 구워삶아 앞잡이로 삼고 저항하는 자는 쇠발톱으로 목덜미를 낚아채서 밑바닥 없는 갱(無底坑)에 처넣은 배신자들……

이미 적 함대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푸르죽죽한 오뤽의 뱃머리는 상어 주둥아리를 닮았다. 좁은 이마엔 칠흑같이 새까만 십자가가 양각되었고 콧잔등에선 두 문의 회전 포탑이 튀어나왔다. 몸통은 날치처럼 생겼고, 좁은 등에 길쭉한 포신을 짊어졌다. 금방이라도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이 과묵하고 도도하게 행보하는 그들의 모습에 세시나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스카리인은 달랐다. 그는 핏발선 눈으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목청이 터지도록 울부짖었다!

 - 표적 변경, 적 중전함 모두를 표적으로 설정한다. 어뢰 전탄 사출, 주포 발사, 보조포 발사! –

선두 전함을 겨눴던 노란 원이 흩어지더니 화면에 비친 모든 중전함에 하나씩 혹은 둘씩 겹쳐진다. 발사구가 열리면서 어뢰가 빗발치듯 쏟아져 나가고 고출력 레이저 포와 입자 가속포가 연달아 죽음과 파멸을 촉발하는 섬광을 던졌다. 광기(狂氣)어린 살의는 선체 내벽을 감싸고 있는 녹색의 세포체 사이를 야생마처럼 내달리다가 증폭 엔진을 관통하며 막대한 에너지로 전환되어 허공 속에 뿌려졌다. 어뢰와 포격의 합중주를 등지고 직선을 곡선으로, 사각형을 원으로, 둔각(鈍角)을 예각(銳角)으로 일그러뜨리는 충격적인 사념이 공간을 강타했다.

그것은 하나의 함대가 머문 자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 힘은 너무나 간단하게 소멸해 버렸다!

이미 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다섯 갈래 사념이 교차하며 어뢰를 우그러트렸다. 플라스마가 폭발하며 탄체가 찢어졌고 탄두는 엉뚱한 방향으로 멀리멀리 튕겨 나갔다. 거센 파도가 일렁이며 고열의 빛과 전자기장으로 가속된 입자의 흐름이 휘어지고 꺾어지더니 깊은 심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광포(狂暴)한 사념은 단단한 벽에 부딪히며 나동그라지고 세찬 바람에 휩쓸려 무력하게 꺾어졌다.

그리고 새빨간 적의(敵意)가 모여서 튼튼한 새끼줄처럼 꼬인 사념이 그의 목을 옥죄며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어.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이니까 -

 - 렉클, 네놈이야말로 날 쫓아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
스카리인은 다시 이빨을 갈았고……

 - 내가 널 쫓았다고? 천만의 말씀, 난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지난 2개월간 내가 흘린 미끼를 낼름낼름 집어먹다 덫에 채이고 사냥개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된 늑대가 발을 절룩대며 나타날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 데스, 이젠 알겠지? 네놈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인지를! - 소리 없는 도발적인 웃음이 공간을 뒤흔들면서……

적들의 사념이 회오리치며 에카무드를 졸라맸다!

만일 스카리인이 있는 힘껏 그들의 속박을 뿌리쳤다면, 당장의 위급을 피해 앞으로만 달렸다면, 만일 그랬다면, 아주 좁은 틈새를 찾아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전과(戰果)와 초라한 노획품이 자신을 치밀한 함정으로 꾀어 들이는 미끼였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고, 황폐한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배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중장갑함 오뤽-라팔레스의 위용에 겁먹지도 않았고, 다섯 명이나 되는 강력한 사념 능력자의 위협도 무시했다.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뜨거운 분노와 치열한 증오심에 영혼을 내맡기고 조종간을 잡아당겨 크게 만곡하는 곡선을 그리며 절망적인 전투를 준비했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지금은 적 함대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되돌려서 전투를 준비할 때가 아닙니다."

실속 없는 허세를 부릴 때도 아니었고 이득 없는 공격을 할 때도 아니었다. 그러나 광분한 야수에게 냉정한 판단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닥쳐!"

다음 순간, 전방위 스크린이 찬란한 섬광으로 뒤덮였다. 오뤽-라팔레스 함의 아케데우스 5형 입자포와 24식 열선포가 조그만 소행성을 분자 단위로 분쇄시키는 파괴적인 화력을 한 점에 쏟아 붇기 시작한 것이다. 1파, 에카무드는 짧은 반원을 그리고 몸을 비틀며 빠져 나왔고, 2파, 소나기처럼 퍼붓는 포격 사이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고, 3파, 스카리인의 사념이 확장되며 뜨거운 광파(光波)가 궤도에서 벗어나 어둠의 장막 너머로 퇴장했다.

오뤽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발스레인이 쇠꼬챙이처럼 생긴 경어뢰(輕魚雷)를 거푸 쏘아댔지만 견고한 사념의 방어막에 가로막혀 대나무 쪼개지듯 갈라지며 단속적인 핵폭발의 섬광을 남기면서 자멸해 버렸다. 에카무드는 넓게 퍼진 함대 사이로 진입해 사방팔방에서 덮쳐 드는 사념의 세례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렉클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오뤽과 그 주변의 발스레인을 향해 돌진했다.

죔쇠처럼 조여 드는 사념에 붙들린 발스레인 두 척이 기우뚱 몸통을 기울이더니 바로 옆에 있던 오뤽의 꽁무니에 머리를 처박았다. 탄약고와 연료고가 터지고, 엔진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장갑(裝甲)이 녹아 내렸다. 그리고 섬광, 두 척의 전함은 순수한 빛과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충격과 열기, 오뤽의 뱃꼬리(船尾)가 갈래갈래 찢겨나갔다. 거대한 선체가 휘청거릴 정도의 타격, 그러나 침몰할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다.

'제길!' 스카리인은 욕설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앞쪽에서 폭발했더라면 완전히 끝장났을 텐데!'

입자포와 열선포, 경어뢰가 우박처럼 퍼부어 내렸다. 에카무드는 몸을 위로 솟구치고 옆으로 비틀고 회전하면서 죽음의 속박에서 화려하게 탈출했다. 세계 최고의 기동력을 가졌다고 평가 받는 테리어스 성단 연합의 중전함 클로벨조차 흉내내지 못할 현란한 움직임이었다.

"세시나, 요격 어뢰의 남은 개수는?" 스카리인이 소리 높여 물었다.

"잔탄(殘彈)은 25기뿐입니다."

"적이 어뢰로 공격하면 요격 어뢰와 사념으로 처리해."

그러자 긍정적인 대답 대신 다급한 외침이 돌아왔다.

"후측방에 있던 적 함대가 상대방위 8-2, 30키엔(약 3600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 포위당했습니다!"

"빨리 사념을 확장시켜!"

세시나가 왼손을 들어 팔걸이의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머리받이가 접히면서 헤드기어가 올라왔다. 검은색 헤드기어는 그녀의 양쪽 귓바퀴를 가볍게, 포근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감싸 안았다.

에카무드는 등 뒤를 덮치려는 적 함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머리를 곧추세웠다. 레이더 화면은 뒤로 엎어지고 옆으로 회전하며 요동쳤지만 세시나의 눈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추적했다.

"적 함대 어뢰 발사. 전방 함대에서 76발, 하방 함대에서 104발의 중어뢰와 경어뢰를 발사했습니다!"

 - 처리해! - 스카리인은 사념으로 명령하면서 조종간을 당기고 볼과 휠을 굴렸다.

벌떼처럼 달라붙는 어뢰를 피해 에카무드는 불규칙하게 지그재그로 방향을 바꾸고 요란하게 회전하며 뿌연 가스의 바다를 헤집고 다녔고, 헤드기어에 흡수된 세시나의 사념은 증폭(增幅) 엔진의 힘으로 강화되어 넓은 공간으로 퍼져 나가 단단한 방패가 되었다.

 - 자동 대응에 들어갑니다. 후방 발사구에 요격 어뢰 장전, 발사! -

남아 있는 요격 어뢰 25기가 한꺼번에 발사되고, 그것은 다시 3000발의 요격탄으로 분리되어, 꽈배기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드는 어뢰를 둘러싸는 광범위한 그물을 쳤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요격탄이 촘촘한 그물눈을 그리며 어뢰를 잡아먹기 직전, 30여 기의 어뢰가 빈틈을 젖히고 빠져 나와 에카무드의 꼬리에 바짝 달라붙었다. 눈이 멀듯한 섬광이 번쩍이고 산산 조각난 어뢰의 파편이 벚꽃처럼 흩날리는 사이로, 적함의 입자포와 열선포가 뚫고 들어왔다.

세시나의 사념이 공간을 왜곡시키며 입자와 광자의 흐름이 크게 휘어지며 에카무드의 선체를 얇게 훑고 지나갔다. 뒤를 쫓던 어뢰가 궤도에서 벗어나 서로 머리를 부딪히며, 부서지고, 폭발하면서, 강렬한 충격파가 가스층을 난타했다. 순간적으로 배가 크게 흔들리며 사념의 방벽을 쌓아 올린 벽돌이 무너져 내렸고, 그 틈새로 두 기의 중어뢰와 세 기의 경어뢰가 날아들었다.

 - 적 어뢰가 최종 방어막을 돌파, 이젠 막을 수가 없습니다! -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를 연상시키는 경고음, 중어뢰가 망치처럼 두들기고 경어뢰가 끌처럼 파고들면서 전방위 스크린의 뒤쪽이 새하얗게 질렸다. 스카리인의 의식에도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몸뚱이가 덤프 트럭에 부딪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귀를 찌를 듯한 세시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발꿈치가 절단된 배는 고개를 떨구고, 거칠게 일렁이는 가스층 위를 비실거리며 날아갔다. 꽁무니에 휑하니 뚫린 구멍에선 귀중한 공기와 무가치한 쇳덩이와 부서진 기계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피처럼 흘러 나왔다.

 - 피해는? - 스카리인은 급히 세시나에게 사념을 보냈다.

반쯤 풀려 있던 소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보조 스크린에 떠오른 정보를 읽으면서 조작 패널 위에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렸다.

 - 충격 어뢰에 관통 당한 선미(船尾) 외부 장갑의 45%가 파괴되었습니다. 4번, 9번 창고가 유실되고, 20번부터 24번까지의 어뢰 발사구가 손상되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226번부터 242번 블록까지 격벽으로 폐쇄하고 '거품'으로 막고 있습니다 -

스카리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깊었고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뒤통수에 달라붙은 오뤽은 8척, 발스레인은 14척, 사념은 다섯에서 여덟으로 늘어났다. 뿌리치고 도망갈래야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그 동안의 전과(戰果)는 두 척의 발스레인을 격침시키고 한 척의 오뤽에게 가벼운 피해를 입힌 게 전부였다. 암담해지는 기분이었다.

 - 데스, 엉덩이에 불이 붙은 기분이 어떤가? -
불쾌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고……

 - 꼬리를 물어뜯긴 네놈보다야 훨씬 낫지 - 이를 갈며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 잘난 체 해봐야 소용없어. 이제 곧 통구이로 만들어 주마 - 뻔한 도발에……

그는 증오심을 폭발시키며 외쳤다!

 - 죽는 건 네놈이다! -

세포체가 숨가쁘게 빨아들인 사념은 강대한 힘이 되어 방출되고, 끓어오르는 분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분출되었다.

"화기 관제 등급을 1-1로 바꿔!"

"화기 관제 등급을 1-1 접근전(接近戰)에 대비한 수동 대응 방식으로 변경합니다."

스카리인은 사념을 제어하는 데 모든 의식을 집중했고 육신은 끝없는 우주로 탈출한 영혼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껍데기로 전락했다. 손끝에서 감각이 사라졌고 목덜미에 흘러 내리는 땀방울의 냉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터질 듯이 고동치는 심장의 리듬에 호응하듯이 꿈틀거리며 맥동하는 세포체의 미끈덕대는 불유쾌한 감촉마저 딴 세상의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꺾이지 않는 의지로 증오심의 원천이 도사리는 스무 남은 척의 함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발사관에 어뢰가 장전되고, 입자 가속기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투입되고, 레이저 발생장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세시나, 너는 방어에 전념해라. 나는 지금부터 놈들을 공격한다! -

육중한 전함이 가볍게 고개를 틀면서 집행자를 자처하는 사내의 차가운 사념이 줄지어 선 함대를 압박하고 소녀는 뒤에서 그를 묵묵히 지원한다.

그러나 여덟 명은 너무 많았다.

그들 하나하나의 능력은 스카리인은 물론이고 세시나에게조차 미치지 못했다. 사념 증폭 엔진의 성능에 있어서도 에카무드가 오뤽을 훨씬 앞질렀다. 하지만 낱개의 화살은 꺾기 쉬워도 한데 묶인 화살은 꺾기 어려운 법이다. 이십여 척의 전함과 초일급 사념 능력자 여덟 명을 단 둘이서 상대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스카리인은 수평으로 펼쳐지고 수직으로 세워진 격자선을 따라 넓게 흩어진 마음을 맹수의 이빨처럼 뾰족하게 곤두세웠다. 집채만한 돌덩이를 조그만 점으로 응축(凝縮)시키는 힘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폭풍우처럼 몰아치면서 공간이 크게 일렁이고 함대의 진형이 어그러졌다.

하지만, 무너뜨리진 못했다!

여덟 갈래의 사념이 한꺼번에 힘을 모아 반격했다. 원호를 그리며 떨어지던 칼날은 순식간에 녹이 슬었다. 티끌만한 손상도 입지 않고 왜곡장(歪曲場)을 벗어난 적 함대는 험악하게 웃으며 창칼을 곧추세웠고 스카리인은 녹슨 칼을 떨어트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고조되는 긴장감을 억지로 삼키며,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도무지 먹혀 들지 않는군……'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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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지 않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법이지, 스카리인은 속으로 그렇게 뇌까리며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적함의 종류는?"

"오뤽-라팔레스 함(艦) 3척, 종류가 확인되지 않은 발스레인 7척입니다. 상대방위 7-6, 거리 2.7해리, 알시트 19번 순동구에서 출현했습니다."

그는 레이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계기판 위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농구공만한 크기의 다층(多層) 스크린, 여러 층에 걸쳐 밝은 청록색의 격자선이 촘촘히 그어졌고 한가운데엔 하얀 점이 찍혔다. 그리고 화면의 끄트머리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삼각형의 불빛이 보였다. 앞장선 세 개의 붉은 삼각형이 쐐기라면 뒤따르는 일곱 개의 조그만 오렌지색 삼각형은 넓게 펼쳐진 날개, 각각의 삼각형 옆에는 그 속도와 질량, 예상 함종(艦種)이 적힌 조그만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들의 목표는 중앙에서 빛나는 하얀 점, 에카무드였다.

십자 연맹은 오래 전에 여기서 이동 요새를 철수시키고 인근 소행성에 소규모의 수비 기지만 남겨뒀다. 그곳의 주력은 낡아빠진 오뤽-샤오드 함 아니면 오뤽-크라오네스 함이었다. 중장갑(重裝甲)을 자랑하는 최신예 라팔레스 함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손끝으로 파충류의 비늘을 만질 때 느껴지는 불유쾌한 감각이 스카리인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아직 놈들의 레이더 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지금, 소행성 지대로 진입해서 몸을 숨기면 어떨까? 아니,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군.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포위당할 수도 있어. 차라리 최고 속도로 놈들을 따돌리는 편이 좋겠군.'

그는 머리를 돌려 세시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십성 동맹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순동구는 어디지? 출구는 어디든 상관 없다."

그녀는 스크린을 확인하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현재 열려 있는 것 중에서는 알시트 8번이 가장 가깝습니다. 상대방위 3-11, 거리 약 3.77해리, 변동 오차는 0.5%, 출구는 아데르 해역의 데인바르 3번입니다."

"좋아, 항로를 수정해야겠군." 그는 또다시 키보드를 두들겨 댔다. "최고 속도로 놈들을 따돌리고 알시트 8번으로 진입한다."

"속도 변경, 항로 수정, 알시트 8번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은 27분에서 31분입니다."

주변 풍경이 멀어지는 속도가 두 배 가까이 빨라지면서 득달 맞게 달라붙던 삼각형의 속도가 그만큼 느려졌다. 하지만 세시나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떨어트릴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순동구로 뛰어들기만 하면 녀석들은 쫓아올 수 없어. 제아무리 연맹 해군이라도 함부로 국경선을 넘을 수야 없을 테니까." 스카리인은 장담했다.

하지만 그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순동구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놈들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전방에 적함 출현!" 세시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뤽-라팔레스 함 5척, 발스레인-에피데우스 함 9척입니다."

반투명한 푸른빛의 레이더 화면이 앞뒤로 붉고 누런 삼각형에 에워싸인 모습을 보면서, 스카리인은 사냥개에 쫓겨 막다른 굴로 쫓겨 들어간 여우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포자기해서 혀를 길게 빼물고 쓰러지기엔 너무 이르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당황할 것 없다. 우린 아직 놈들의 레이더 범위 밖에 있어. 탐지 범위 밖으로 조용히 우회하면 녀석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겠지." 그는 빠른 박자로 손가락을 놀려 패널의 버튼을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적함의 레이더 탐지를 피해 진로를 변경, 만일을 대비해 화기 관제 등급을 3-2로 변경한다."

"화기 관제 등급을 3-2, 원거리 어뢰전(魚雷戰)에 대비한 반자동 대응 방식으로 변경합니다."

스카리인은 자신이 입력한 숫자와 문자가 3차원의 경로로 재해석되어, 레이더 옆의 반구형 스크린에 떠오른 해도(海圖) 위에 하얀색의 실선으로 겹쳐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로 변경 완료. 속도는 그대로 유지한다."

유유히 옆구리를 지나 뒤로 흐르던 소행성이 갑자기 빙글 반 바퀴를 돌면서 멀어져 갔다. 배가 머리를 들어 방향을 바꿨다는 신호와 함께 레이더 화면의 중심부를 향해 기세 좋게 달려들던 삼각형들이 와수수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1분, 2분, 시간이 흐르면서 적함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세시나는 한숨 돌린 얼굴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피아노를 치듯이 리드미컬하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가닥의 악의적인 시선이 선체(船體)의 두꺼운 장갑을 꿰뚫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손톱이 옷을 찢어발기고, 끈적거리는 혓바닥이 피부를 핥고, 음탕한 손가락이 자궁까지 파고드는 느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느낌, 그 느낌에 전율하며, 소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적들이 눈치챘습니다, 주인님!"

"나도 알아." 스카리인의 미간과 눈 밑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군용 레이더의 2배 가까이 되는 공간을 이렇게 빨리 읽어낼 정도라면 보통의 사념 능력자는 아니군. 일급 중에서도 초일급의 실력이야.'

이미 위치가 발각된 이상, 일부러 길게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적함이 예상 진로를 파악하고 미리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곧장 치고 나가느니만 못했다.

"진로 재변경. 알시트 8번까지 일직선으로 뚫고 나간다. 세시나, 화기 관제 등급을 2-3으로 바꿔라."

"화기 관제 등급 2-3, 돌격전(突擊戰)에 대비한 자동 대응 방식으로 변경합니다."

울긋불긋한 빛깔의 가스로 뒤덮인 침침한 어둠이 관자놀이 옆에서 매끄럽게 한 바퀴 반을 돌았다. 궁지에 몰렸지만 자긍심을 잃지 않은 야수는 당당하고 도도하게 뱃머리를 내밀며 앞으로 치달았다.

"강행 돌파는 오랜만이군요."

세시나는 양쪽에서 잡아당긴 가죽 벨트처럼 팽팽하게 긴장했지만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오뤽 8척에 발스레인 16척, 적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함에 포위당한 적도 있었다. 사방에서 어뢰와 광선포와 입자포가 쏟아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정면을 뚫고 나가 탈출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정도면 포위망치곤 허술한 편이지.'

스카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손으로 조종간을 잡고 왼손으로 팔걸이의 조작 패널을 더듬어 사각형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두꺼운 강철 걸쇠가 풀리고 모터가 회전하면서 의자가 등받이가 흔들렸다. 그리고 헤드기어가 천천히 내려와 머리에 씌워졌다.

그것은 순수한 강철 모자였다. 정수리 부위는 둥그스름하고, 귀를 덮는 돌출부에선 두꺼운 케이블 가닥이 튀어나와 등받이 뒤로 이어졌다. 뺨은 차가운 철판으로 가렸고, 눈가엔 가느다란 선처럼 보이는 검푸른 빛의 방풍 실드가 붙어 있었다. 스카리인이 왼쪽 귓가의 다이얼을 돌리자 금속 케이블이 연결된 산소 마스크가 튀어나와 입과 코를 덮었다. 철컥, 철컥, 쇳소리를 내뱉으며 잠금 장치가 걸리면서 헤드기어는 완전히 밀폐되었다.

그리고 신선한 산소가 들어오는 것과 함께 점액처럼 끈적이는 녹색의 세포체가 스멀거리며 귓구멍에 스며들었다. 10여 년의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 본능적인 저항감에 손끝이 저절로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스카리인은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띄웠다.

'마음으로는 납득해도 몸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걸까……'

녹색 세포체는 귓구멍 안쪽에 숨겨진 생체 컴퓨터의 단말(端末)에 접속한다. 그리고, 오래 전에 중추신경계에 이식한 세포체가 에카무드의 세포체에 직결되면서, 정신은 육체라는 감옥의 한계를 탈출해 풍선처럼 팽창한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선체와 하나가 되었다.

외부 장갑에 배열된 십 수만 개의 카메라와 센서로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는 짙푸른 바다를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직시하며 그 차가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무한한 허공엔 10분의 1 해리 간격으로 희뿌연 격자선이 좌우로 끝없이 늘어서고 위아래로 기둥처럼 들어서서 수없이 많은 입방체를 그렸다. 의식의 한쪽에 공 모양의 레이더 화면이 입체적으로 떠올랐고 다른 쪽에는 십 수 개의 보조 스크린이 반투명하게 겹쳐졌다.

사념은 그보다도 훨씬 넓은 범위를 장악했다.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오는 중전함과 경전함의 모습이 유령처럼 흐릿하게 잡혔다. 희미하지만 확실한 위협, 조종간을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가고 뱃머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서둘지 말자. 아직 서둘 필요는 없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수천억 년의 고요함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진 영혼은 고독했다. 인간이란 존재의 왜소함을 새삼스레 느꼈고 적막함이란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헤드기어 내부의 스피커가 수억 년의 정적을 깨치고 단조로운 소녀의 목소리를 전달해 주었다.

"적함의 레이더 범위 안에 돌입합니다."

"곧 뭔가 날아오겠군."

산소 마스크 바깥쪽에 붙은 스피커를 통해 나온 기계적인 소리에, 세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아마도……" 잠시간의 평탄한 침묵, 그리고 위험에 대한 높은 경고. “적 함대 어뢰 발사! 전방에서 30발, 후방에서 18발의 중어뢰(重魚雷)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서른 개, 뒤에서 스무 개 가까운 주홍 색의 날카로운 화살이 쏟아지는 광경이 레이더에 비쳤다. 스카리인은 화살 옆에서 어른거리는 문자와 숫자를 읽어 내렸다.

"이카넥 78식 어뢰군. 화기 관제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자동 대응에 맡긴다."

"자동 대응 개시, 요격 어뢰 장전, 발사합니다. 예상 요격 시각은 5분 78초 뒤입니다."

뱃머리와 꽁무니의 어뢰 발사구에 요격 어뢰가 차곡차곡 실리는 느낌은 마치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발사구를 감싸는 코일에 전류가 흘러 방대한 자기장이 형성되고, 그로써 막대한 추진력이 일어나, 뚜껑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어뢰가 총알처럼 튀어나가면서 마치 정액을 배설하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확대된 시야로는 앞으로 예순 개, 뒤로 마흔 개가 넘는 가늘고 뾰족한 어뢰가 직선을 그리며 공간을 분할하듯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잠시 후에는 시간이 초 단위에서 분 단위로 착실하게 누적되어 예정된 충돌의 순간에 무사히 당도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5, 4, 3, 2, 1 …… 요격에 들어갑니다."

세시나의 구령에 맞춰 요격 어뢰의 몸통이 분해되고 앞 뚜껑이 열리면서 어뢰 하나당 120기의 요격탄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물에 사납게 달려들면서 어둠 속에 광대한 그물이 펼쳐졌다.

요격탄의 강고한 아이크만 탄두(彈頭)가 중어뢰의 일루미니언 탄심(彈心)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우그러졌다. 뒤이어 탄체(彈體)에 실린 핵폭탄이 터지면서 적 어뢰가 추진제로 사용하는 플라스마와 반응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다문다문 눈부신 별빛이 깔린 끝없는 암흑에 촛불처럼 초라한 빛이 깜박이고 좁쌀만한 파편이 비산(飛散)하며 레이더에서 화살표가 차례로 자취를 감췄다.

"요격 어뢰 전탄 소멸, 적의 중어뢰도 전부 소멸했습니다."

스카리인은 레이더를 보면서 전방의 적 함대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했다.

"4분 내로 놈들과 코를 부딪히겠군. 세시나, 접근 2분 전에 알려 줘라."

"알겠습니다."

그는 의식을 다시 배와 합치시켜 컴퓨터에게 직접 명령했다.

 - 레이더 10배 확대 -

시야를 가로세로로 분할한 격자선의 단위가 단숨에 100분의 1해리로 변하면서 레이더 화면이 크게 확대됐다. 손톱만한 크기의 붉은 화살표가 주먹만한 크기로 커지며 투박하게나마 전함의 모양새를 갖췄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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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방랑자


바다에서 들리는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다.

바다에서 보이는 것은 아득한 별빛뿐이다.

발 아래부터 시작해서 머리 위까지, 눈 앞에서 등 뒤까지 사방에 펼쳐진 전방위(全方位) 스크린에는 침중한 어둠이 깔렸고 솜덩이처럼 뭉글뭉글한 가스가 흐르는 너머로 수억을 헤아리는 별들의 광채가 아른거린다. 멀리 혹은 가까이에선 울퉁불퉁한 얼굴의 소행성들이 서로 박자가 맞지 않는 춤을 추며 흘러간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흘러가는 거지.' 스카리인의 생각이었다.

그는 랏스 연합의 새까만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목 깃은 자유롭게 풀어헤치고 손가락 구멍이 뚫린 갈색 가죽 장갑을 끼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시커먼 장화를 신고,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은 왕좌처럼 엄숙한 조종석에 앉았다.

'불확실한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기다리는 건, 언제나 지루한 일이야.'

깜박, 눈꺼풀이 깜박인다. 정면에 놓인 계기판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가로지른다.

'하지만 바다를 떠도는 사람은 인내를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고…… 분명히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었지.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쓰게 웃었다.

조종석의 넓은 팔걸이에는 두 개의 보조 스크린과 커다란 트랙 볼이 딸린 조작 패널과 키보드가 나란히 붙었다. 왼쪽엔 항해 일정과 화물 내역이 평면적으로 보여졌고 오른쪽엔 에카무드의 내부 상태와 무장 상황이 입체적으로 표시되었다. 얇은 가죽 쿠션이 붙은 등받이 뒤엔 전기 의자의 머리덮개와 흡사한 검은색의 헤드기어가 얌전하게 접힌 채 굵고 얇은 케이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양쪽에 두 개씩 붙은 발판 사이로 은회색의 조종간이 길게 솟아났다.

강철과 납의 조종석, 그는 허리와 어깨를 두터운 쿠션이 붙은 안전 장치로 고정하고 두 발을 발판에 찰싹 붙이고 눈으로 계기판에 다닥다닥 붙은 보조 스크린에 떠오른 숫자와 그래프에 주의를 기울이고 양손으로는 계기판 곳곳에 붙어 있는 버튼과 키보드를 누르고 귀로는 스피커가 뱉어내는 경고음을 들었다.

'어쨌든 이곳도 정말 오랜만에 와 보는군.'

그는, 눈을 들어 스크린을, 스크린 너머를, 알시트 해역을 바라본다.

알시트 해역은 반지름 50해리(海里:약 600만 킬로미터)의 둥글넓적한 원반이었다. 원초적인 어둠, 그 광막한 캔버스 위로 수소와 헬륨 원자와 티끌만한 먼지가 엉성하게 뭉친 희끄무레한 가스층이 강물처럼 흐르고 자잘한 소행성이 유유자적 떠다녔다. 그리고 곳곳에 십자 연맹(十字聯盟)과 십성 동맹(十星同盟)을 연결하는 27개의 순동구(瞬動口)가 흩어져 있었다.

이곳은 예전부터 약삭빠른 무역선과 사치스런 호화 여객선이 활발히 오가는 항로였고, 수많은 해적들이 약탈감을 찾아 파리떼처럼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랏스 연합 시절에는 거대한 이동 요새, 알시트 14를 배치시켰다. 국경을 지키고 사나운 무법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하지만 이젠 다 지난날의 이야기, 과거일 뿐이지.'

전쟁, 패배, 그리고 극적인 몰락이 찾아왔다. 알시트 14는 사라졌다. 활기차게 오가던 무역선도, 빈틈을 노리던 해적선도, 언제나 긴장하고 있던 전함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가끔 가다 가난한 상선(商船)과 싸구려 여객선이 오락가락 하는 게 고작이었다.

"반경 20해리 안의 순동구 분석이 끝났습니다. 상대방위 0-3, 거리는 약 18.1해리 떨어진 곳에 알시트 6번 순동구가 위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치 변동 오차는 8%, 출구는 아데르 해역의 잉야르 13번입니다."

세시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퍼진다.

보통의 중전함이라면 운동장처럼 널찍한 함교(艦橋)에 적게는 10명, 많게는 30명이 근무한다. 하지만 에카무드의 전투 함교는 대단히 비좁았다. 바닥은 길쭉한 직사각형, 천장은 반구형, 위아래로 2층 구조, 앞쪽 1층은 조타수와 항해사가 앉는 자리고 뒤의 2층은 관제사와 함장의 자리다.

그리고 항해사는 스카리인, 관제사는 세시나였다.

관제석의 구조는 조종석과 흡사했다. 다만 얕은 머리받이에 귀가리개처럼 생긴 헤드기어가 달려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의자는 기계처럼 딱딱한 직선을 그렸고, 소녀는 몸에 밀착되는 순결한 흰색 겉옷을 입었다. 그것은 명백한 부조화.

'벌써 9년째군.'

키보드로 손을 옮기던 스카리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9년 전 뒤라인의 노예시장, 철창 속에서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오들오들 떨던 가녀린 어린 소녀였다. 그는 힐끗 눈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이제 아름다운 장미처럼 자라난 - 하지만 날카로운 가시를 감춘 치명적인 무기, 그리고 충실한 노예.

"항로 수정." 스카리인은 키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1시간 30분 가량 걸리겠군."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두 달간의 원정(遠征), 여섯 번의 전투, 그 대가로 에카무드는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었다. 외부 장갑(裝甲)은 20퍼센트 이상 마모되었다. 주포 한 문과, 보조포 세 문이 파괴됐다. 어뢰의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주 엔진은 모두 무사했지만, 보조 엔진은 전체적으로 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카무드를 상대한 적들은 훨씬 더 비참한 꼴을 당했다.

오뤽 11척과 발스레인 23척이 격침되거나 반파됐다. 백여 명의 인간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고, 삼백여 명이 우주를 떠돌며 구조대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파괴와 죽음, 그 뒤에는 언제나 약탈이 있었다. 스카리인은 수십 척이 넘는 십자 연맹군의 전략 물자 수송선을 나포해 이 잡듯이 털어냈다. 하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노획품은 강괴(鋼塊)나 우라늄 원석 같은 싸구려뿐, 값나가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스카리인들은 그것들을 아사 족(族) 유랑상인 벨머트에게 70만 지타라는 헐값에 넘겼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뱃머리를 돌려 잉야르로 향했다. 상처를 치유하고 이빨과 발톱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그러나 스카리인은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승냥이보다 교활하고 독사처럼 집요한 인간이 자신을 노리고 어딘가에 함정을 파 뒀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렉클, 녀석은 쉬운 상대가 아냐. 비겁하지만 무섭도록 똑똑하니까.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전엔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겠지.'

드레이트 렉클, 그의 비열한 웃음을 떠올리며, 그의 간사한 얼굴을 떠올리며, 스카리인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편으로 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어. 그래, 여기 있을 때부터……'

스크린에 지나가는 숫자를 보며 스카리인은 문득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천여 척의 전함을 품에 아우르는 이동 요새 '알시트 14'가 있던 좌표…..

자신의 청춘이 살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무참하게 종결된 무덤이자, 이 배가 태어난 요람, 하지만 지금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공허, 공허, 공허함뿐! 어두컴컴한 바다는 단조로운 침묵을 노래했다.

'그는 이곳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여 한 줌의 재로 화했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눈빛은 허공을 맴돌고,

'그녀는 그 죽음이 주는 충격에서 도망치고자 삶을 저버리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었으니……'

야속한 여인을 원망하는 마음은 한숨이 되어,

'나는 대체 언제쯤에나 그녀에게 그 친구의 마지막 흔적을 전해줄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앞길은 검푸른 절망의 늪이 되어 사방을 에워쌌다……

15년, 15년 전이었다. 그는 친구의 몸뚱이가 화장터의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장면을 목도하며, 증오와 분노로 얼룩진 맹세를 피를 토하듯이 쏟아내며, 잿더미나마 - 한 줌의 잿더미나마 그녀에게 전해 주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15년 전에!

매일같이 피바다를 헤매며 온몸에 피갑칠을 하고 미약한 자취를 쫓아 먼 바다를 떠돌았지만 맹세를 이루고 약속을 지킬 날은 요원하기만 했다. 한 해, 한 해가 거듭될수록 초조해졌다. 좌절을 곱씹었다. 그리고 그리움이 더해졌다. 허망하게 상실한 청춘에 대한 그리움이.

이곳에서 유령선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헛된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십성 동맹 정보국은, 그것을 상상력 풍부한 선원들의 창작으로 폄하했다. 랏스 연합 정보부의 친구들은, 그것이 십자 연맹의 신형 전함일 것으로 추정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느 쪽이건 실망스런 이야기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곳에 돌아올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지. 그를 잃어버린 장소로, 그와 영원히 이별한 장소로 새삼스레 되돌아올 리가 없잖아.'

불안한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비실거리는 정적과 강가에 피어 오르는 아침 안개만큼이나 몽롱한 회상은 갑자기 튀어나온 세시나의 새된 목소리에 망치로 두들겨 맞은 유리판처럼 산산이 깨어지고 부스러져 흐트러졌다.

"질량 반응과 중력장 확인, 적함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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