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
유금호 지음 / 개미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유한한 삶을 우리는 흔히 여행에 빗대곤한다. 시작과 끝, 출발과 도착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진 길 위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걷다가 사랑도 하고 걷다가 이별도 하고 걷다가 지쳐 가끔은 길 위에 그냥 드러누워 끙끙거리며 앓기도 하다가 다시 일어나 또 걷는다. 길은 한없이 직선이다가 또 어느순간엔가 구불구불했다가 가시밭길이기도 하다가 하염 없이 걷다보면 산도 만나고 바다도 만난다. 그러다 어느날인가는 우리도 길 아래에 한줌 흙으로 묻힌다. 그게 여행이고, 그게 인생이다. 여행은 이렇게 삶을 닮았다. 삶은 이렇게 여행을 닮았다. 하지만 유금호의 여행은 죽음을 닮았다.

삶과 죽음이 뭐 그리 다르겠느냐마는 그의 작품집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한권의 텍스트 안에 길이 있고 그 길 위에 또 겹쳐진 길이 있어 독자는 헤메이게 된다. 적어도 작가는 안개가 자욱한 새벽 어느 길목, 현실 세계와 초현실 세계, 유년과 장년, 속과 성이 잠시 혼재하는 문명과 야만이 다르지 않은 세계를 경험했거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텍스트 안에서 헤메고 또 헤메이다가 다 포기하고 망연하게 안개라는 벽 앞에 힘없이 주저앉는 순간 훅하고 코끝에 와 닿는 이름 모를 진한향에 나 또한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안개에 휘감긴 못 생긴 자연석 위에 서툰 글씨체로 새겨진 시실리....시실리라는 이름의 마을, 꿈인듯 죽음인듯, 바다 가까운 그 마을을 작가를 통해 이번 겨울 다녀오게 되었다.

꿈과 현실이 구별 안 되는 의식의 경계에서, 때때로 살아나는 대숲을 지나던 바람소리, 파도소리와 돌탑, 금목서 향기와 샤샤의 그윽한 눈빛...을 만나기 이전의 소설 속 '나'를 이제 떠올려 보자. 내가 보기엔 소설가인 '나'는 이 작품 중간에 삽입된 반짝 떠올랐다가 침잠한 젊은 소설가와 동일한 인물로 여겨진다. 10년 동안 가난하게 소설을 써오다 어느 순간 등단하게 되어 문단의 온갖 주목을 받고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게 되지만 그는 더이상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에 썼던 소설 만큼의 작품을 써내지 못하고 오히려 글쓰기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다 도피 겸 재충전의 목적으로 인도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조차 영혼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돌아오고야 만다.

다시 작중 화자인 '나'의 경우를 보자. 그는 무작정 목적지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무작정 떠나 차에서 내리면 탈진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걷다가 아무차나 타고 내리기를 거듭한 끝에 온몬의 힘이 소진하여 죽음의 향기를 맡게 된 때에 비로서 꿈을 꾸듯 시실리라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다만 웃음과 눈빛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는 거기서 지내면서 말, 언어라는 허망함에 대해 생각한다. 그 동안 '나'는 언어로 쌓아 올린 말의 감옥(언어의 모래 바람은 이제 작가의 발목을, 다리를, 온몸을, 심장을 찔러대며 )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마을에 머물며 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건데 화자에 의해 이야기 형식으로 개입된 좌절한 젊은 소설가와 30대 초반 시실리에 다녀온 화자인 '나'는 결국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하겠다. 왜냐하면 언어로 쌓아 올린 공허한 탑에 의해 억압당한 소설가는 '나'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젊은 소설가이기도 하고 나아가 이는 작가 모두를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있기때문이다.

작중인물처럼 죽음이란 근처(시실리)에 가 보싶다는 충동을 불쑥, 아니 매순간 느낀다. 말과 글이 필요 없는 곳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보다는 더 자유로운 곳이리라 짐작된다. 이 단편소설을 5,6번 정도 되풀이 해 읽는 여러 날 동안 시실리 그리고 샤샤라는 이름의 처녀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실리...샤샤....이름에서조차 정말 투명한 바람소리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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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흔적
이윤기 지음 / 문학사상사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흔적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람들과 교감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며 상처를 입는 상호적인 관계에서 뚜렷하진 않지만 누구나에게 지워지지 않게 남아 있는 일종의 그림자라고 생각해본다. 어둡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음영 속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형태의 그리움 같은 것들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프로이드는 정신에 항상 흔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직접적인 자각이 불가능함을 말해주는 것이고 즉 우리는 비록 그것이 곧 의식적인 기억의 일부는 아니라해도 후에 곧 의식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기억-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윤기에 있어서 그리운 흔적이란 어떤 이미지의 흔적이며 기억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소설의 연재당시 원제목이 '그리운 터부'였듯 금기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금기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때론 너무도 가혹하게 잔인할 수 있다. 금기는 그러나 때론 너무도 달콤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 향긋하며 우리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도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에게 있어도 신애누나는 그런 존재로 다가왔으리라. 금기를 범하게되면 가시밭길을 걷게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반면, 범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물러서서 다른 길을 걸어갔을 때, 우리는 늘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게 마련인 것이다. 작중인물 또한 그런 우유부단함과 사람들의 비난을 의식하여 그만 보편적이고 넓고 밝은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을 걸음으로 해서 다른 두 여인의 삶과 그의 삶 전부는 크게 상처 입는 결과를 낫는다 이러한 삼각형의 구도는 결국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얼핏 보면 진부한 줄거리이면서도 이 작품이 매력을 발산하는 이유는 긴장된 인연의 끈을 존재론 적으로 풀어낸 작가의 인식 때문이다. 그리움의 형태로 남은 위반의 욕망과 그것의 새삼스런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끌고 다니는 긴 그림자와 같은 진실과 해후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도저히 속단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작가는 기막힌 비유와 문체를 통해 그려낸다. 이 이야기는 삼각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화살 맞아 죽게되는 노루는 이 작품에서 삶의 본능을 감추지 못한 채 상처 입는 한 여성의 불행한 삶을 얘기한다. 그것은 융이 말한 그림자의 세계를 의미한다. 사냥꾼은 우리의 현실 다시 말해 강한 페르소나에 해당하며 이 작품에서 패르소나는 현실적인 사랑을 꿈꾸는 한 여성의 모습 '유지'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노루를 숨겨주었다가 결국에는 그 노루의 희생을 방조하는 처녀는 세속적인 사랑과 현실에 순응해버린 그림자를 벗어버리고 페르소나를 쫓아가는 남자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다. 융의 심리학에서 다뤄지는 그림자의 태고유형은 인간의 인격에 충실하고 3차원적인 특성을 준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력, 창조력, 활력, 가능성을 본능을 통해 일깨워 주기도 한다. 그림자를 지나치게 거부할 경우 우리는 무미건조한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림자는 이처럼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원시적 생명력으로서의 그림자는 예술이라든지 삶의 열정을 가져오지만 반면에 파괴적인 속성으로서의 그림자는 악마적이고 살생적이며 사나운 형태로 현현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림자와 반대되는 개념인 페르소나 인간의 현실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가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페르소나는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가면 또는 외관이며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다. 또한 자연스럽고 개인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너무 한쪽에 치우치다 보면 불행을 초래하게된다. '묘적(신애누나의 법명)'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유지'의 탈속(脫俗)은 찌릿찌릿한 반전과 함께 '아니라고 못한 죄'의 대가가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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