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수첩 김승옥 소설전집 2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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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또다시 김승옥이냐고 묻는다면 "끈기를 시험하는 거죠."(p19)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환상수첩>은 문학을 꿈꾸거나 예술을 하는 이들이 하나씩 환상처럼 자살을 선택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버러지같은 화자(임수영)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거의 대부분은 정우의 소설형식의 수기가 채우고 있다.

 

채울 수 없는 구멍.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는 구멍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은 결국 김승옥에 의해서 먼저 사용되었구나.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나는 그것을 하나씩 습득해나가고 있다. 또 다시 뻥뚫린 구멍. 선애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정우씨는 가령 이럴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한번 불에 데어서 혼겁이 나간 적이 있는 어린애가 불은 무서운 게 아니라고 한들 곧이들을까요? 혹은 한번 쾌락을 맛본 자가 쾌락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을까요? 요즘 난 그런 것과 비슷한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어쩐지 뻥 뚫린 구멍을 보아버린 것 같아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별수 없이 눈에 보이는 구멍이지요. 찬바람이 술술 새어들어고........."(p21)

 

환멸밖에 남지 않은 대학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가지만 그곳은 또 다른 환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라는 이야기. <환상수첩>은 작가의 대표작 <무진기행>의 연장선에 있다. 아니,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환상수첩>이 62년작이고 <무진기행>은 64년작임으로.

 

너무 많이 보아버린 자는 눈이 멀거나 자살을 선택한다는 명제. 고흐가 그랬고 요절한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다. 세상은 뻔뻔하게 자살을 도와주는 영빈과 춘화를 팔아 목숨을 연명하고 가족을 욕되게해도 태연한 수영과 같은 이들이 살아남는다. 이런 비관적인 이야기에서 나는 무슨 힘을 얻는가. 배짱있게 능청을 부리며 살아야 이런 소설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환상?. 그것이 좋겠다. 제목도 <환상수첩>아닌가. 제목 한번 기가 막히다.

 

고향친구, 윤수, 수영, 형기 모두 사회부적응자이며 결국 60년대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김승옥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구멍이 뻥 뚫린 자들이다. 지식인 소설답게 카프카와 카뮈, 사르트르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반갑게 등장해주니 지적 호기심도 채워주고 시 한 줄 못쓰고 사는 귀여운 시인(윤수)과 같은 캐릭터도 살아있으니 읽을 맛이 난다.

 

"시는 그만두겠어. 이제부터 생활전선이다."(p89)라던 윤수의 화려한 음성은 사라지고 죄책감에 의해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하지만 수기 속 화자는 그 죄책감에 의한 죽음을 어설픈 미덕이라고 비웃고 있다. 환상적인 기준을 만들어두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려고 했기에 미친놈처럼 죽은거라고 말한다.

 

"산다는 것, 우선 살아내야 한다는 것. 과연 그것이 미덕이라고까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야 출발하는 것이다."(p96) 병마앞에서 강한 것인지 아니면 환상이나 쫓는 이들에게 대한 조소인지 몰라도 수영은 살아남은 자신을 추켜세운다. 대학에 왜 다니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던 선애가 두려웠던 것은 작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자기가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는 모두 좌절시켜버렸음으로. (정우가 선애를 범하고 영빈에게 떠넘김으로써 타락시켰던 것처럼)소설가는 소설 속에서만은 신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리뷰를 아주 거창하게 쓰고 싶었으나 어둠의 세계를 보아버린 수영의 어두운 방을 윤수가 질투했듯이 작가의 소설을 살릴만한 리뷰는 쓰지 못할 것 같다. '죽이지 않고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었나'라고 작가에게 묻고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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