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시인의 한 편의 시에 이어서 ‘작가의 말’과 같은 짤막한 산문이 붙어있다. 시도 좋았지만, 나는 산문들도 좋았다. 글 쓰는 일에 대한 마음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과 다름없었다.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vid Orr)가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펴내는 글시집을 읽고 젊은 시인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김락, 남지은, 김정진 시인의 시가 좋아서 몇 번 더 읽었다. 알지 못했던 시인과 시를 만나게 된다는 것. ‘사랑하는’ 시인과 시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첫만남을 제공한 시집. 그것만으로도 이 기획시집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밤마다 조금씩 아껴읽던 책을 모두 읽었다. 6개월은 더 걸린 것 같다. 장강명 작가가 이 소설을 읽고 쓴 감상이 있었는데 그것에 백 퍼센트 공감한다. “인간들을 깊이 사랑하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슬퍼하는 천사가 날아다니며 사람들 사연을 살피고 쓴 것 같았다. 천사가 몇 번쯤 인물들의 입을 빌려 말도 한다. 이호 선생님처럼 늙고 싶다.”피프티 피플을 읽던 밤마다 행복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목차대로 성실하게 천천히 읽었다. 마치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듯이.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그래야만 했던 책이란 걸 깨달았다. 포스트잇을 붙이던 페이지마다 옮기고 싶은 말들이 많고 많지만, 피프티 피플 중에 이설아의 말을 전하고 싶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 나에겐 올해의 소설이다. 덧붙여 나도 이호 선생님처럼 늙고 싶다.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수억만 개의 얼굴들.나의 얼굴, 당신의 얼굴, 그리고 누군가,당신이 결코 알 수 없을 어떤 인물의 얼굴.어쩌면 자연은 우리에게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모든 걸 유지하기 위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자연은 낚시질을 시작한다,망각의 거울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건져 올리기 위해.- ‘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 중에서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낯선 이름의 폴란드 시인의 시와 생애를 읽는다. 그것들이 너무나 좋아서. 어느 미래에는 과거에 사용했던 나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이었으면, 혹은 그녀의 얼굴이 나의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 - 여든이 넘은 나이에 그녀는 이런 시를 적었다. 어느 미래에서 나는 그녀처럼 늙고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그러고 싶어졌다.
황정은 작가를 좋아한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선량하고 하찮은 존재들의 삶과,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는 그들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쩐지 슬프다. 슬프지만 따뜻하고, 약하지만 힘이 차오르는 이상한 마음이 든다. 그녀의 소설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데 백의 그림자만 읽지 못했다. 마침 선물받아 뒤늦게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 한참 멍하니 있었다. 그냥 지금 이 마음을 가만히 느끼고 싶었다. 울 것 같았다.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 황정은 작가의 말.소설을 읽는 동안에 나는, 영화 ‘타인의 삶’에서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들으며 울던 HGW XX/7이 된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만났던 풍경과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째서 나는 그런 존재들만 바라보게 되는지. 그때마다 왜 그렇게 먹먹하고 뭉클했는지. 백의 그림자를 읽으며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런 눈을 가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