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리바 브레이 지음, 이원경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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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 브레이의 『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이 출간된 때는 작년, 내가 런던 생활에 겨우 적응해 정신 없이 보내던 때였다. 당연히 스쳐지나가며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서점에서 보자마자 펄이 반짝이는 까만 표지에 끌렸다. 제목을 보아하니 판타지. 또 보니까 학원물. 뒤쪽 광고문구를 보니까 영국 빅토리아 시대다. 고민할 게 뭐 있나. 사는 거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아닌가. 



환상을 보는 소녀

제머 도일은 인도에서 자랐다. 이제 10대 중후반, 런던 사교계에 멋지게 데뷔해서 멋진 남자도 만나고 싶지만 어머니는 도대체 제머를 영국에 보낼 생각을 안 한다. 이에 뿔이 난 제머는 어머니에게 모진 소리를 한 후 달려가버린다. 그렇게 달려가던 중 자신을 잡아끄는 환상을 보게 되고, 그 환상 속에서 어머니가 검은 그림자를 피해 자살하는 모습을 본다. 어머니의 자살 이후 제머는 슬픔을 안은 채 런던의 여자 기숙학교로 가게 된다. 그 '환상'의 비밀을 밝혀가는 것이 바로 제머가 해가는 일이다. 어쩌다 발견한 메리-정체야 뻔하다-의 일기장, 환상의 능력을 쓰지 말라는 남자, 제머를 찾는 마녀 키르케. 이것이 바로 환상으로 대변되는 마법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따돌림 당하는 전학생
그렇지만 현실은 바로 학교 생활 적응. 스펜스 기숙학교의 삶은 쉽지 않다. 여학생들이 모이면 언제나 그렇듯 '무리'가 있고, 그 무리 중에서도 소위 제일 잘 나가는 '아가씨들'이 있다. 제머는 그 어떤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룸메이트인 앤과만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지만 앤 또한 마뜩찮다. 제머는 사실 상당히 말괄량이면서 복잡한 심성의 소유자라 제머의 마음에 꼭 드는 인간이 있을리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이런저런 사건이 생기고, 사이 안 좋은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고, 어울리는 친구들-제머는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이 생긴다. 여왕같이 군림하는 여왕벌 필리시티, 아름답고 낭만적인 피파, 소심한 완벽주의자 앤이다. 서로 내키지 않는 상태로 모임을 만들게 된다.

"앤을 끼워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냐. 저애의 삶이 우리의 삶과 같을 수 없을 뿐이지. 넌 친절을 베푼다고 생각하지만, 바깥 세상에서 저애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아. 괜한 친절로 오해하게 만드는 게 더 잔인한 짓이야." -p.89

 

 

 


현실과 환상
현실과 환상의 이야기는 겹칠 것같지 않으면서도 잘 섞여 들어간다. 초반부에는 환상보다는 현실 쪽에 더 비중이 높은 편인데, 이후 환상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현실의 관계들도 더욱 견고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의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라고 하면 낭만적이고 화려한 문화라고 인식이 되지만, 실상 그 안에서 살고 있던 소수의 고위 계층 남성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사회였다. 숙녀가 되기 위해 교육 받는 아가씨들 사이에도 엄연한 신분격차가 존재하고, 괜찮은 젠트리 계층이라고 해도 절대 여성에게는 쉽지 않은 사회.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은 숙녀의 흠집이 되고 자신의 사랑마저 숨겨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환상은 이 숙녀들에게 현실에서의 도피처가 되어준다. 나이 많고 뚱뚱한 약혼자로부터, 여성이라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하는 억압으로부터, 못생긴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그리고 도피의 결과 그들은 변해간다. 처음부터 돈독한 우정으로 시작했던 사람들마저 틀어졌으니, 이 마약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가 처음부터 서로 별로 탐탁찮아하던 그들의 관계에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그 옛날의 아가씨들은 사라졌어. 죽어서 땅에 묻혔지.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여자들이야." -p.333
'내가 세상을 바꾸면 세상이 나를 바꾼다.'-p.357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서로를 못마땅해하던 아이들을 환상이 묶고, 서로 이해하는 친구가 되나 싶었다. 실제로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우정이 생겨나고 친구가 된다. 하지만 갈라진다. 현실에 무너져 환상을 선택하는 이, 환상에 현혹되어 현실을 배반하는 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끝내는 이. 이게 끝인 줄 알았다. '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은 단권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짜여졌고,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시리즈물이더라. 회수 안 된 떡밥들이 있긴 한데. 무어 선생님 과거라거나, 시작이 된듯 만듯 한 카르틱과의 로맨스, 앤의 톰에 대한 연정 같은 것. 영 어덜트는 역시 시리즈인 걸까. 근데 문학동네에서 이 이후 이야기는 나올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내 취향!
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은 리바 브레이의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한다. 첫 소설 치고는 꽤 괜찮다. 여러가지 요소를 잘 섞었다. 절대 내 취향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아니, 내 취향이라서 하는 소리인데 재미있다. 일단 로맨스 요소는 영어덜트 치고 그리 많지 않다. 시리즈 진행되면서 로맨스가 강화되겠지만 적어도 이번 권에서는 상당히 약했다. 학원물로서도 괜찮고-저게 진짜 여학교지-, 판타지이면서, 무엇보다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이니까! 근데 진짜 다음 권 안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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