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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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다른 세계에서도>에는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전하는 울림의 폭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책을 덮었을 때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기 적힌 이야기들이 얼마나 다양한 사회적, 시대적 맥락을 지니는지- 우리와 다른, 하지만 다를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에 왜 귀 귀울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 있게 써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한참을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다가, 그냥 책을 다시 읽기로 했다.



오래전 자신과 어머니를 두고 동성 연인과 떠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자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마는 의사인 '나', 낙태법 폐지에 찬성하는 언니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위해 임신을 선택한 동생, 80년 5월 광주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정혜와 항상 프랑크푸르트로 떠나고 싶다던 간호보조원 언니, 산업재해 현장에 있었던 우재와 그의 집에 들어가 살았던 희곤, 신종 바이러스를 알아차린 탈북민 출신의 의사와 관성으로 그의 말을 무시한 한국의 의사인 나. 그들은, 또 그들의 이야기는 때로 너무 멀어서-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쉬이 보이지 않았다.



보호의 문제, 동성애, 산업재해, 낙태죄, 북한. 이야기가 택한 키워드는 하나같이 묵직하다. 표제작 <다른 세계에서도>에서 낙태법 폐지에 찬성하는 목소리에 힘을 싣다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위해 임신했다는 동생을 바라보는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도 완강하게 가지기 어려워진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마주하는 대개의 문제들이 이런 식이었다. 어느 한쪽에 마음 편하게 서 있기 어려웠다. 오른쪽도, 왼쪽도 모두 자기 자리에 진심이었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틀렸다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늘 어정쩡한 자세로 '그러게, 네 말도 맞긴 한데...'의 입장만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대로도 괜찮은 걸까. 어느 한쪽이 완전하게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어떤 입장도 가지지 않은 채로 지내는 것 말이다. (그래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다. 분명히 변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여덟 개의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 전하는 '참고한 내용과 약간의 덧붙임'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 그게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한 것인지, 어떤 책이나 기사를 읽었고, 누구와 만나 이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나가는 동안 이야기 속 인물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내게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모든 게 그냥 '소설'인 것만은 아니라고. 이렇게라도 해서 네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노라고,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야 더 이상 픽션일 수 없는 이 이야기들은 한참을 나를 어지럽게 했다. 그것은 마치 그동안 나의 삶이 얼마나 비겁했던가를 비추는 거울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수야."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본문 중에서, 57쪽)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다고 말하면서 살고 싶다. 항상 옳은 선택, 멋진 선택만을 할 수는 없겠지만- 선택할 수 없었던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야 적어도- 인간이라는 단어 자체에 낙담을 느끼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시대를 사는 나와 그대,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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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 - 애매하게 가난한 밀레니얼 세대의 '돈'립생활 이야기
신민주 지음 / 디귿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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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지 꼬박 두 달. 지난달 중순쯤 실업급여를 신청했고, 지난주 금요일에 처음으로 한 달 치 실업급여를 받았다. 하루에 60,120원, 한 달에 168만원이 조금 넘는 그 돈은 막상 통장에 들어왔을 때 더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통장을 한참 들여다보며,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상상했다. 해보고 싶었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프로그램을 해볼 수도 있을 테고, 쌓아뒀던 책을 실컷 읽을 수도, 가보고 싶었던 독립서점에 모두 가볼 수도 있을 터였다. 당장 일을 안 한다고 우리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계획과 실험들로 올해를 채워 넣어 보겠다고 생각한 데는 실업 급여의 역할이 컸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가능성'으로서, 지난날의 나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나를 상상하고 계획하는 데 쓰일 시간을 가져다준 것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월 30만원씩 꼬박꼬박 받는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 같나요?


이 책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의 저자 신민주는 '기본소득'을 상상한다.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30만원이든 50만원이든 70만원이든- 모두 똑같이 '매달' 지급받는 것이다. 이는 장애나 질병, 나이나 개인의 특성을 심사하거나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상정하지 않고 언제나 '모두'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임금노동을 하는 사람도, 안 하는 사람도,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도, 안 하는 사람도 모두- 기본소득 수급의 대상자가 된다.


정말 '기본소득'이 현실화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 나는 실업급여가 내게 주었던 '가능성'이 '기본소득'으로 모두에게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니기에,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왔던 많은 일들이 점차 제 가치를 찾게 될 것이라고, 또- 돈을 벌기 위한 일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회적 믿음이 생기게 될지 모른다고도 생각하게 됐다. (한때 영화 만드는 일을 했었고, 지인 가운데는 글을 쓰거나, 공연을 만들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끼리는 웃으면서 생계를 걱정하지만, 타인들이 건네는 '그거 해서 어떻게 먹고살아요?'하는 질문은 여전히 따끔따끔하므로. 적어도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에서는- 좀 더 마음 편하게 나의 세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이 아니라 '가치'를 쫓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데 삶을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어쩐지 아직 꿈같은 얘기로만 들린다. 코로나19로 한시적으로 지급되는 지원금도 계층을 나누고, 대상자를 세분화한다. 전국민에게 지급되었던 지원금은 1회성이 짙었기 때문에- 다들 쇼핑을 하거나 외식을 하는데 쓰고 말았다. (물론 이것도 중요했다. 지역 소상공인들의 고통이 너무도 컸으므로) 그러니 '매달', '모두에게' 지급된다는 기본소득은 아직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일단 나부터도 재원을 걱정하게 된다. 저자와 기본소득당은 종합부동산세를 없애고 땅에 대한 과세를 의미하는 '토지보유세'를 신설하자고 주장한다. 12억이 넘는 집을 가진 사람에게만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가진 모든 사람이 용도 구분 없이 세금을 내고- 모아진 세금을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으로 분배하자는 주장이다. 땅을 가지고 있지만 그 땅이 별로 비싸지 않은 사람들이나 아예 집이 없는 사람들은 낸 세금보다 기본소득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것만으로 재원 마련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삶을 살아갈 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잘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연결된다. 잘 의존할 수 있는 사회의 시작은 위기 상황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지 자격을 묻거나 증명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가난해야만, 몸이 아파야만, 가족이 있어야만, 세대주여야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여서는 안된다. 그게 얼마건 간에- 기본소득으로 주어지는 몇 십만 원은 많은 사람에게 '가능성'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게 할 것이며, 보고 싶었던 공연을 향하게 할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우리 모두의 삶을 평등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밑바닥을 다져줄 수는 있지 않을까. ... 그런 상상을 하게 한 이 책이 고맙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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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활 건강
김복희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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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물받고도 한참을 멀리했던 것은, 나의 삶이 건강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최근의 일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자주 아팠고, 적어도 2년에 한 번쯤은 입원했더랬다. 병명도 다양했다. 한 번쯤은 그냥 지나쳐도 좋을 전염병에 꼭 걸렸고, 천식이 있어 오래 달리거나 높은 산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눈은 고사하고 얼음도 얼지 않는 남쪽 나라에서도 '콜드 알러지'를 진단받고 겨울 내내 몸을 벅벅 긁었어야 했다(그때 우리 엄마는 얼마나 황당해했던지). 고1 때는 갑자기 장이 멈춰서 일주일 동안 금식을 명령받은 적도 있었고, 하필 고등학교 졸업사진을 찍던 주간에 입원했던 탓에 전학생처럼 단체사진마다 쏙쏙 빠져있다. 그뿐인가, 하이라이트는 대학 때 신나게 술을 마시고 위궤양에 걸려 수업 도중에 쓰러졌던 거겠지.



어쨌거나, 그럼에도 건강을 돌보지 않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일단 움직이는 게 싫었다. (한결같이 그랬다) 대신 누군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걸 '보는 것'은 좋아했다. (아, 야구장 가고 싶다. 우리 유격수의 라인드라이브 호수비 보고 싶다)(우리 유격수가 그런 게 가능하다면;ㅁ;...) 위궤양을 앓으며 생명에 위협을 심각하게 느꼈던 시절에는 아침마다 양배추를 갈아 마시기도 했었으나 그마저도 증상이 조금 호전되자마자 그만두었다. 요리를 즐기는 편도 아니어서, 먹는 것들도 건강과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반찬을 매주 사 먹는 요즘은 좀 건강한 음식들을 먹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커피는 엄청 마셨다. 의식적으로 커피를 꾹꾹 참아낸 날도 예닐곱 잔은 꼬박꼬박 마셨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생활은 규칙적인가. 아, 기상시간만은 규칙적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생활이 규칙적이라는 것에 기상시간 외에도 일정한 시간에 밥을 먹는다든지, 운동을 하고 일을 한다든지 하는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것도 아니겠다.



그러니까- 이 책에 손이 쉬이 가지 않았던 것은 뻔한 말로 '혼날까 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책은 순한 맛이었다. 읽고 쓰기 위해서 요가와 필라테스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매일 아침 어떻게든 내 입에 음식을 넣어주던 엄마 이야기나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애써보는 이야기도 있었다. 게다가 이야기는 건강과는 점점 멀어져 건축이나 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갔다. 그제야 책을 앞뒤로 살펴보니 '다친 마음에 힘을 주고 지친 몸을 눕게 하는, 여성 시인 열 명의 생활 건강 에세이'라는 띠지의 메인 홍보 문구가 읽혔다. 아, 모두 시인이었구나! 시인에게 '건강'이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늘 포함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진정으로 내가 돌보아야 하는 것은 어떤 건강인가. 전염병이 창궐한 이 시대에. 몸일까, 정신일까? 아침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정의학과 의사가 말하는 것처럼 스트레스는 정말로 만병의 근원이란 말인가? (본문 중에서, 72쪽)



'건강'이라는 단어 앞에 나도 모르게 '육체적'이라는 말을 숨겨두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니, 나의 정신 건강은 안녕한가 안부를 묻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이러이러한 것들을 먹고, 이러이러하게 살고 있으니 육체적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정신 건강에 대해서는 좋은지, 나쁜지,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어쩌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몸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이 더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조금 슬퍼졌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안 하던 무엇인가를 새로이 하게 되지는 않을 테지만- 그냥, 왠지 텁텁한 맛이 자꾸 났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건, 나도 알겠다. 하지만 아직은 건강을 위한 움직임보다- 좋아하는 자세로, 옆에는 커피 한 잔을 둔 채 책이나 실컷 읽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 젊어서 모른다'라고 할 테지만. (정말 때가 되면 스스로 운동을 찾게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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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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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이 책 <동물농장>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더라. (블로그를 뒤적여 예전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그때 나는 혁명의 달콤한 순간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 고려 후기의 '만적의 난'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이- 동물들이 인간의 착취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는 사실만으로 희열을 느끼며, 그 이후로 동물농장이 어떻게 변해갔던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읽은 <동물농장>에서는 어쩐 일인지 혁명, '그 이후'가 읽혔다.


자, 동지들, 우리들의 삶의 본질은 무엇이겠소? 우리 그것을 직시합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되고, 짧소. 우리는 태어나, 단지 우리 몸에 숨이 붙어 있을 만큼의 음식이 주어졌고, 우리 중 그것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마지막 한 톨의 힘까지 일하도록 강제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용성이 다한 바로 그 순간 끝이 찾아오고 우리는 끔찍한 잔학행위로 도살당하는 것이오. 영국의 동물들은 한 살이 지나면 누구도 행복이나 여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오. 영국의 동물들은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동물의 삶은 비참함과 노예 생활이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입니다. (본문 중에서, 13쪽)



사실, 다시 만난 혁명의 순간은 여전히 짜릿했다. 하지만 혁명, '그 이후'를 생각하다 보니 혁명은 오히려 쉬웠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동의할만한 혁명의 명분은 언제나, 어떤 형식으로든 잠재워져 있었고, 누군가 그것을 터트리면 사람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 이후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달콤하고 짜릿했던 순간이 지나자- 그들은 다시 지워내고 싶었던 모습으로 자연스레 회귀했다. 대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그러니까 동물들의 무지 때문이었는지, 돼지들의 탐욕 때문이었는지, 권력욕 때문인지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스노볼이 악으로 규정되어 쫓겨나고, 나폴레옹과 인간 중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우리는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 하지만 동물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언제부터' 잘못되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는 7계명 조항 아래에 '그렇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문장이 쓰일 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뒤돌아 봤을 때 불현듯 나타난 그 문장을 읽을 수 있는 동물도, 사실 몇 안 됐다. 그러나 그 문장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챘을 때,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어떤 동물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고- 얼마간은 그것이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했을지 모른다. 돼지들은, 늘 그렇게 말해왔으니까.


동물들은 돼지들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존스 씨의 장원농장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시절에 그들은 노예였고, 지금 그들은 자유인이므로. 아무리 돼지들의 결정이 이상하다 한들, 그들의 자유까지 빼앗아간 것은 아니므로. 그것만으로 동물들은 많은 것들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에게 진정 '자유'가 있었던가. 그들이 같이 꿈꾸었던 '동물농장'은 여전히 그들의 이상 세계에 있던 동물농장과 닿아있는가.



만약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더라면, 자신들이 수년 전 인간 종족을 타도하기 위해 임할 때 목표했던 것은 이게 아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한 공포와 학살 장면은 늙은 소령이 처음 그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던 그날 밤 자신들이 고대했던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미래에 대한 어떤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건 동물들이 굶주림과 채찍으로부터 해방되고, 모두 평등하며,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소령의 연설이 있었던 날 밤 자신이 어미 잃은 오리 새끼들을 앞발로 보호해 준 것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본문 중에서, 98쪽)



+


1.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는 요즘- 몇 가지 사건과 <동물농장>이 겹쳐 보였다. 먼저는 고려 후기에 일어난 '만적의 난'이 그랬다. 이는 만적과 노비들이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이었는데, 천민 계층의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조직적 신분 해방 운동이었다고 한다. 만적은 노비였지만 똑똑하고 사회의식 역시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는 노비들을 모아놓고 매우 논리적인 연설을 하며 신분 해방을 주장했다고 한다.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그것도 가장 낮은 계급인(사실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던) 노비가 봉기를 부추겼다는 것은 <동물농장>에서 혁명이 시작되던 그 짜릿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2. 스노볼이 악으로 규정되어 쫓겨나고 나폴레옹이 유일한 권력자가 되어가는 모습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웃으면서 같은 민족들을 수탈했다. 특히, 누가 돼지인지- 누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그들만의 파티 장면이 그랬다.


3.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했던 동물들의 모습에서는 오늘의 우리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지금보다 더 이상한 것이 분명했던 일제강점기나 유신시대에는 그래도 분명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들이 존스 씨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과 같이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외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뭔가 이상한 게 확실한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모습은, 동물농장의 동물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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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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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한 슬픔... 어떻게 두 가족은 그렇게까지 엮일 수 있었던 걸까요- 이번에도 역시, 이정명 작가만의 촘촘한 서사가 빛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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