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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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하면 된다'는 약속 위에 서 있다. 누구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근대 사회는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그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사회를 말한다. 이 약속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개인들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취된 능력에 따라 자기 삶을 성찰하고 생애를 기획해 나간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노력이 아닌 '노오력'을 해도 쉽사리 삶의 방향이 보이지 않았다. 삶을 기획하기는커녕 누군가 기획해놓은 삶에 나를 끼워 넣는 것도 어렵기만 했다. "너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를 들으며 자라왔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 부딪힌 벽은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삶을 긍정하려 했고, 할 수 있는 갖은 노오력들을 해가며 벽에 오르길 시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해져버렸다.

2016년 10월,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비단 국정 농단의 처참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해왔던 노오력들이 정말이지 부질없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사건이었고, 나아가서는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최소한의 약속조차 지켜지고 있지 않음이 확인되는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232만 촛불이 말하는 것, 그것은 애써 믿어왔던 긍정의 신화를 무너뜨림에 대한 분노였고, 어디를 향해야 좋을지 몰랐던 우울의 정체를 실체화함으로써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내 안을 향해 뻗어있던 화가 방향을 틀어 누군가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표적이 없는 화는 쉬이 해소가 안된다. 지난 20년간 쌓인 그것이 이제야 터져 나온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표적이 생겼다. 누가 뭐래도 잘못한 것,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이 명백한 죄. 그 앞에서 우리는 드디어 그 오랜 화를 꺼내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국민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탄핵이 통과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쩌면 (정말이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험들이 우리 시대의 우울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는 "이게 나라냐", "싸그리 망해버려라"라고 말하는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지난 3년간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우리를 '주변화'시켜왔는지, 우리는 얼마나 처참하게 국가로부터 내버려진 국민이었는지를 직면하게 된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 강남역 10번 출구, 구의역... 이 국가와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와 그리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슬픔. 무고한 죽음 앞에서 숨이 턱턱 막혀와도 또 오늘을 버텨냈던 시간들이 이제 와 한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은 제일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앞으로의 우리'를 말하는 부분이었다. 리셋하고 싶다, 리셋하자! 하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리셋 이후, 리셋 너머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고민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 '리셋 너머'일 것이다. 그 소중한 질문에 감사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일은 자기를 잃는 것이고, 가장 피곤한 일은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51쪽)

무-사유와 무-성찰성이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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