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여자 -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새로운 개인의 탄생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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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웹서핑하다가 네 블로그 봤다?"
순간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대개의 글이 전체 공개로 설정되어있고, 굳이 별명 대신 실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꽁꽁 숨겨놓은 일기장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 감정의 기원을 찾을새도 없이 그날 밤 당장 컴퓨터를 켜고 너무 개인적인 것 같은 포스팅들을 다 비공개로 전환해버렸다. 그렇게 드러나있으면서도 숨어있는 공간, 그게 바로 여기- 내 블로그였다. 한 오백 개쯤인가, 그간 썼던 글들을 다시 읽고 내키지 않는 것들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나니- 그제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 그랬다. 모든 것을 드러내면서도 그 어느 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전체 공개이거나 비공개.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공개되는 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누군가'를 만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그런 관계가 주는 소속감 같은 것 역시 갑갑하다 여겨졌다. 그래서 때로 미치도록 말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꾹, 참고 애써 넘기기도 했다. 그런데 임경선의 산문들을 읽으면서, 내게 좀 더 솔직해지고 싶어졌다. 깎다 말아 뭉툭한 내 연필을 더 오래 다듬어 뾰족하게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에 내 상처는 다시금 찔릴지 모르겠지만, 그 고름을 터트리고 나면 언젠가 말끔히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처'라는 단어는 '나 바빠'라는 말만큼이나 내가 금기시하던 것이었다. 스스로를 과대하게 보는 자기중심성처럼 느껴져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산문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상처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피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마치 내 상처나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전시하거나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나의 여건상 왠지 불평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무리한 겸손도 작용했다. 하지만 내가 자신의 결핍을 정면으로 바라보거나 받아주지 않는다면 대체 이 세상에서 누가 그걸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임경선, 나라는 여자, 에필로그:상냥한 상처 중에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는거지, 라는 생각은 에필로그의 몇 개의 문장 속에서 해결되었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결핍과 상처의 맥을 조심스럽게 짚어가면서 '임경선이라는 여자'를 더 정직하고 선명하게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나라는 여자>는 묘한 느낌을 준다. 분명히 상처투성이인데, 상처로 읽히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그것들을 상처라고 말한 순간, 이미 그것들은 상처가 아니게 된 것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때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솔직한 그녀의 글들을 읽고 있자니 내 안에 있던 단단한 무언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간 꾹꾹 눌러 담아 꽤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표피만 단단해진 것처럼 보일 뿐- 그 속은 아직 액체 상태라는 것 역시 그녀의 글 덕분에 알게 되었다. (어쩌면 절대 단단해지지 않을 액체 상태의 무엇이야말로, 진짜 '나라는 여자'일지 모르겠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내게 솔직해져보려고 한다. 속마음을 들킬까 걱정돼 굳이 빙빙 돌려쓰던 글들을 좀 더 단순하게, 직설적으로도 써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운이 좋다면, 내 상처와 결핍들이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원시적인 힘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힘이 됐다. 그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힘을 얻으니 그것 역시 참 묘한 일이다. 산문의 힘이란. 허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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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0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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