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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옹고집이 진짜 옹고집 - 옹고집전 ㅣ 처음부터 제대로 우리 고전 5
김혜원 지음, 순미 그림 / 키위북스(어린이) / 2025년 1월
평점 :
요즘 우리 집에서는 작은 책토론이 자주 열립니다. 아이의 독서 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하면서, 한 꼭지씩 같이 읽고 질문과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중심 문장을 찾거나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요약해서 써 보기도 해요. 이런 과정들이 아이는 물론이고 저에게도 새로운 읽기 자극이 됩니다. 최근에는 아이와 고전을 같이 읽고 있어요. (표지의 그림체가 순정만화 같아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세계명작 시리즈를 한 권씩 보고 있는데 재미가 쏠쏠하더라고요. (아이들용 고전에서는 어떤 장면이 생략되거나 축소되고, 어떤 장면이 중요한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도 흥미롭고요) 쨋든, 서양 고전을 읽다 보니 우리 고전도 아이와 같이 읽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최근에 아이와 재미나게 읽은 책은 ‘옹고집전’입니다. 조선시대 후기 소설로 짐작되는 ’옹고집전‘은 ‘옹고집 타령’이라는 이름의 판소리로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소리는 물론 활자본이나 목판본으로도 남아있지 않고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다고 해요.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세도 가문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부정부패를 일삼는 사람들이 늘어났겠죠. 돈으로 벼슬을 사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악독하고 파렴치하게 구는 사람들도 많았을 거예요. 당연히 평민들의 삶은 더욱 퍽퍽해졌을 거고요. 그런 사회문화적 맥락 위에서 불린 ‘옹고집 타령’은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못돼먹은 옹고집을 아주 혼내주는 이야기니까요.

학 대사는 옹고집과 똑같은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그를 혼쭐냅니다. 어떤 묘기를 부렸는지 옷자락에 난 구멍의 크기나 모양은 물론이고- 두 사람만의 은밀한 비밀 이야기까지도 몽땅 알고 있었기에 진짜 옹고집은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낼 길이 없습니다. 외려 가짜 옹고집보다 말주변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은 진짜 옹고집은 결국 자기 집에서 쫓겨나고 말죠. (허구헛날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던 옹고집이 벌받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얼마나 낄낄거렸을까요)
어려서부터 숱하게 읽어왔던 이야기인데, 요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아이와 이야기 나누니 이야깃거리가 꽤 풍성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들이요.
- 진짜 옹고집은 자신과 똑같은 가짜 옹고집을 보고도 결국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 내지 못했잖아. AI 기술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한 누군가가 나타나 우리인 것처럼 행세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아무리 옹고집이 못되고,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고 해도)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며, 진짜를 괴롭히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아니라면) 왜 사람들은 진짜 옹고집이 괴로워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걸까?
- 만약 네가 학 대사였다면, 옹고집에게 어떻게 했을까? (혼내지 않고도 옹고집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여기에 더해 책 말미에 있는 여러 역사 이야기를 읽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했어요. 백성을 괴롭혔던 삼정(전정, 군정, 환곡)에 대한 설명은 물론, 옹고집이 왜 스님을 괴롭혔는지, 학대사는 왜 가짜 옹고집을 만들었는지 등등에 대한 해설이었답니다. 해설을 읽으며 한때 판소리로 불렸던 이 이야기가 왜 지금은 판소리로 계승되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어보고- 소리꾼이 옹고집과 학대사를 어떻게 연기했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어요. (가짜 옹고집과 진짜 옹고집을 동시에 연기하는 소리꾼의 모습이 정말이지 재미났겠지요?)
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줘 고전이 되었나 봅니다. 어려서 읽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AI를 옹고집전을 보며 떠올리게 되다니! 아이와 읽을 다음 고전도 기대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