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다 작가정신 시그림책
박완서 지음, 이성표 그림 / 작가정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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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 일부입니다. 이 그림책 <시를 읽는다>는 인용한 박완서 선생님의 시를 이정표 삼아 만든 것이에요. 책은 한 행을 두 페이지 가득 할애하여 표현합니다. 푸른색 연필을 많이 움직여 표현한 한 여인이 주인공인데요.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몰라서, 위로받고 싶어서 시를 읽는다는 가녀린 여인입니다. 시를 읽었을 때도, 그녀를 떠올렸을까요. 몸을 옆으로 길게 늘어트리거나, 제 몸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파란 소용돌이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거나, 몸의 질량이란 건 애초에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는 듯 두둥실 몸을 기류에 맡길 때도 그는 시의 한 행, 한 행 속에 있습니다. 그렇게 있거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있는 그녀의 모습 사이에서 우리는 언젠가의 나를 발견합니다. 어딘가로 가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나. 도어락 앞에서 비밀번호를 찾지 못하고 헤매었던 나, 모두들 가볍게 넘어가는 허들이 내게만 유난히 크고 높게 보였던 어떤 날의 나. ... 그런 날은 누구나 겪게 마련이고, 오늘이 그런 날이라고 해서 내일도 그런 날인 건 아닐 테지만- 막상 그 시간을 지날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걸음걸음이 무겁지요.



그녀는 그런 순간, 시를 읽는다고 했습니다. 시를 읽으면 정신이 무디어져 있을 때도 정신이 번쩍 난다고요. 저는 왜 그런 날에 시를 떠올리지 못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시를 읽을까요.



불현듯, 아도르노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물쇠들을 여는 것과 같고,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 모든 것은 특정한 암호로 열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문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이 참, 재미있지 않나요?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니요.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비밀번호는 꼭 '여기-지금'이어서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건데요. 이게 무슨 말이야, 싶지만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시를 곰곰 읽으며, 삶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물과 사건들, 그리고 소중한 모든 가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던지 자문해 봅니다. 예전에 열렸으니까, 다시 열 수 있을 거야! 하고 너무 쉽게 자신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는 거예요. 분명히 열 수 있을 것 같았던 문도 아무래도 열리지 않는 순간, 스스로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 깨닫습니다. ... 아무래도 그때그때, 암호를 새로 만들어야겠지요? 그때 그 암호로는 다시 이 문을 열 수 없을 테니까요.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도, 아마 그래서이지 않을까요.


마음에 꼭 와닿아 표시해두었던 시가 다음에도 꼭 와닿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그때의 마음을 여는 시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한 권의 시집 안에 오랜 시간이 담깁니다. 누구에게나 꼭 알맞은 감상법이 없고, 어떻게 읽어야 한 권의 시집을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싶은 것도 이 때문일 테지요. 그러고 보니, 그림책도 시집을 닮았군요. 그래서, 어제의 여인과 오늘의 여인이 달리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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