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건너뛰기 트리플 2
은모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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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꿈꾸던 시절, 틈만 나면 영화제에 가서 하루 종일 상영관을 지키곤 했었다. 빽빽한 상영 스케줄 사이에서 요리조리 보고 싶은 영화들을 골라(무려 1순위, 2순위, 3순위까지 매겨가며) 상영관에 들어서면 묘한 성취감과 안도감에 취하게도 됐더랬다. 그때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작품들, 그 가운데는 '단편영화'도 있었다. 섹션별로 정리된 단편영화는 러닝타임이 짧다는 특성상 세 편에서 네 편- 많을 때는 다섯 편까지도 한 섹션에 묶였다(두 시간 정도의 전체 러닝타임을 맞추기 위해서다). 모더레이터는 일면식도 없을 영화들을 한데 묶어 어떤 타이틀을 붙이곤 했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던가, '희극지왕'이라던가. ... 영화제에서 하루에 네 편씩 꽉꽉 채워 영화를 보던 시절이야 이제는 까마득하지만-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이 책 <오프닝 건너뛰기>가 마치 그렇게 잘 꾸려진 '단편영화선'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 <오프닝 건너뛰기>에는 표제작 '오프닝 건너뛰기'를 포함하여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신혼부부인 수미와 경호, 적당한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해 아직 혼자인 은우,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일정을 함께하게 된 세영과 가람.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봤거나 가까운 누군가의 경험담으로 들어봤음직한 소재를 그린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삼십 대 중반으로 살고 있다면- 누구나 고개를 열 번쯤은 끄덕일만한 이야기들. 막 결혼한 부부이거나 연애하지 않고 사는 중이거나, 이전의 연애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거나. 혹은 취업, 연애와 결혼,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지는 '삼십대의 미션'을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해보려는 중이거나, 혹은 해보려는 데 마음처럼 쉽지 않아 불안해하는 중이거나 외면하는 중이거나. 서로는 서로의 삶을 힐긋거리며 '아, 왜 나만...'하고 한숨을 쉬고 창 너머의 타인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는 언니, 아무래도 나랑 잘 안 맞는 사람이랑 결혼한 거 같아. 그걸 왜 살아보고 나서야 알았을까?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내가 멍청한 걸 가지고 누굴 탓할 수도 없고 참..."


"너 요가에서 이제 호흡이 좀 되는 것 같다고 했었지."


"응. 시선에 신경 쓰느라 호흡이 자꾸 흐트러졌는데 이제 좀 좋아지고 길어지고 그런 것 같아."


"그런 거지 뭐. 평생 숨을 쉬고 살지만, 막상 요가에서 호흡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걸리잖아. 누구랑 살아보기도 전에 파악이 다 되겠어? 그래도 너희 집 미대 오빠는 손맛은 좋다며." (본문 중에서(오프닝 건너뛰기), 54쪽)



당연한 것 아닌가. 서로를 흘긋거리게 되는 시선도, 나에게 유난히 뾰족해지는 잣대들도.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지금은 무려 2021년이라고.'라며 친구의 어깨를 무심하게 토닥일 수는 있지만, 막상 내게 쌓여온 문제들은 묵직하게 오늘도 내려앉는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 잡은 오래된 기대들은 오늘의 나와 불협화음을 내며 괜히 마음 한구석을 긁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낯선 풍경을 향해 홀연히 떠나고 싶다가도, 풍경에 감탄하는 것에 지루해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누군가 나를 포근하게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알면서도.



다섯 명의 주인공들이 겪는 오늘의 마음 쓰임들이, 딱히 불안할 것도 없는데 불안해지는 무엇이, 오늘의 나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 모든 것들이 삼십대여서 그런 것이라면- 우리 같이 조금 더 흔들려도 좋지 않은가, 하고 맥주캔을 따보겠다. 이 모든 흔들림이 모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 거라고 믿으며. (어쩌면, 십 년 뒤에도 어른 되기는 틀렸어,라고 깔깔깔 웃어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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