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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것인가? - 평정심을 찾고 싶은 현대인을 위한 고대의 지혜 ㅣ 아날로그 아르고스 1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제임스 롬 엮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가 엘리베이터에 붙은 층간 소음 예방 포스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엄마, 보복 소음이 뭐예요?" ... 보복? 위에서 쿵쿵거리면서 뛰어놀면 아래층 사람들은 너무 시끄럽잖아.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위층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는 거야. 설명하고 보니 구차했다. (포스터에 보복 소음 관련 내용이 실렸다는 것은) 그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남의 반증이었으므로 부끄럽기도 했다. 그것은 명백히, 우리가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1세기 중반, 세네카는 이렇게 썼다. "너의 분노는 일종의 광기다. 무가치한 것에 높은 가격을 매기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6쪽) 오랜 시간을 버텨 오늘의 내게로 온 문장은 나의 분노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내가 분노하는 그 일은 정말로 분노할만한 일인가. 그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 세 개의 질문을 노트에 차례로 써 두고,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다. 어떤 분노는 너무 사소해서 민망했고, 어떤 분노는 더 많이 분노하고 행동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다스려야 하는 분노는 다스려지지 않았고, 타협해서는 안 될 분노는 너무 쉽게 수그러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왜 분노해야 할 일에 제대로 분노하지 못하고, 분노할 가치가 없는 일에는 크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 생각한 끝에, 더 많이 분노하고 행동해야 하는 일에는 분명한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지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문제나 누군가의 부주의로 저지른 실수에 분노할 때는 분명한 대상이 늘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은 대상에 화를 내는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유가 훨씬 가벼운 것이더라도 내 앞에 있는 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근거로 화를 내는 쪽이 훨씬 쉬웠다. '어떻게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니'로 시작하는 분노는 끝을 모르고 들끓는다. 그러다 보면 그 끝에서 우리의 무지와 오만을 마주하게 된다.
각자의 내면에는 왕의 정신이 존재한다. 완전한 자유가 자신에게 쥐어지기를 바라지, 반대하는 자들에게 쥐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본문 중에서, 64쪽)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쁜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뭐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라는 말은 그제와 늘어놓는 변명일 뿐이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예상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아무리 좋은 인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상당히 불미스러운 뭔가를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분노할 수 있다. 때로 분노는 삶의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잠깐이다. 분노가 만들어내는 힘은 너무 뜨거워, 타인뿐만 아니라 분노하고 있는 자신마저 태워버린다. 이는 화를 유난히 쉽게 내는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건한 신체와 부지런한 건강 관리도 병약한 사람과 건강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력하듯, 분노는 천성이 예민한 사람에게나 느긋하고 침착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아주 위험하다.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분노할 수 있고, 나 역시 분노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됨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분노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