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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평점 :
1. 때로는 깜짝 놀랄 만큼 개방적이고, 때로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보수적이어서 늘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하는 다나베 세이코. 그녀를 만나게 해 준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수록된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이야기는 모두 남녀 사이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어떤 관계는 얇고 연한 선으로, 어떤 관계는 굵고 진한 선으로- 또 어떤 관계는 얇고 진한 선으로 그려졌다. 그 미묘한 차이들은 각기 다른 공기를 만들어 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때)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다른 공기를 만들어내는 감각이 좋았다.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베이스 노트가 뭘까, 생각했었는데 작품 해설 속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인생을 사랑하는 재능을 갖추고 있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거였구나. 그래서 자기 안의 이중인격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되기도 했던 거구나. ...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종종거려왔던 내게 소설 속 주인공들은 조화로운 삶을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오는 것 같았다. 무엇에건 (나보다) 조금 더 여유롭고, 느긋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아는 그녀들은 삶을 우아하게 사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2. 표제작인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호랑이처럼 강하면서도,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영화가 남겨둔 잔상으로 조제의 이미지가 다소 울퉁불퉁하기도 했었는데, 소설을 읽는 사이 그 모난 부분이 부드럽게 깎여 내려갔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순간들을 지켜보며, 우리에게 사랑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찬찬히 곱씹게 되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진실했던 사랑의 경험은 삶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니까.
3. 소설을 읽는데, 시를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숱한 단편소설을 읽으면서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이었다. 작가에게 포착된 삶의 한 장면이 글로 박제되고, 그것이 내게 와 읽힐 때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페이지 사이에서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말갛고 빠알간 소설 속 얼굴들이 보이는 듯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거의 십이삼 년 만에) 한 생각이었다. 마음이 쫀득쫀득한 사람들과 언제나 끝까지 갔다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오바와 이와코를, 전처와 아이들에게 남편을 보내던 날의 에리코를, 여동생의 예비 남편을 맞이하는 고즈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단 몇 페이지 사이에서 그토록 생생한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적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어제와 일주일 전, 일 년 전, 십 년 전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텍스트가 팝콘처럼 펑, 하고 터져버려서- 그래서 이 소설들이 '시'같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4. 맛있는 귤을 사 와서 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도 다시 봐야겠다.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 벌써 시간이 이만큼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