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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꽃은 잘 모르지만, 길가에 핀 꽃이 무작정 예뻐 보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엔 걸음을 늦추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하늘 흔들리는 꽃들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렇게 오래 보고 있노라면 예쁘지 않은 꽃이 없다. 어떤 꽃은 색이 유달리 예쁘고, 어떤 꽃은 꽃잎의 모양이 유난하다. 같은 종의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그것대로 장관이고, 딱 한 송이 핀 꽃은 그대로 귀하게 여겨진다. 꽃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런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벚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벚꽃을 보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간은 집안에서 꽁꽁 싸매고 있는 게 좋다는 어른들의 이야기에도 나는 꽃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동생은 "언니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벚꽃이야. 작년에도 그렇게 한참 쳐다봤던 그 꽃. 올해는 좀 참아. 벚꽃은 내년에도 피잖아."라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더욱이 달래지지 않았다. 올해 핀 벚꽃은 작년에 핀 벚꽃과 다르며, 내년에 필 벚꽃과도 다를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 나와 세계에 대한 감수성은 이렇게, 때로는 이상한 고집으로 발현되어 나를 움직이게 하곤 했다.
이 책 <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그 살뜰한 마음 씀씀이에, 따뜻한 시선에, 단단한 마음에 나도 같이 흔들렸다. 흔들린다는 것은 세상과 관계 맺는다는 것. 온실 속에서 크는 식물은 바람에 흔들릴 일이 없다. 오직 야생에서 자라는 풀들만이 바람에 흔들린다. 때로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때로는 모래바람이 잎사귀를 따갑게 할퀴어도 그 자리를 지킬뿐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니, 우리가 봐왔던 말갛게 갠 날의 하늘거리던 꽃잎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것이 된다. 저자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작은 꽃잎에도 다정한 인사를 건네며 그 안에서 삶의 지혜를 담아내는 모습이 그렇게나 소복할 수 없었다.
길가의 잡풀들은 힘주어 주장하지 않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를 설득시키고야 만다. (본문중에서, 35쪽)
그녀의 매일매일 안에서 나는 새삼스럽게 '무위'를 떠올렸다. 무위를 탐하노라고 한 적 없었다. 그저 매일 산책을 하고, 일주일에 몇 번 정해진 날에는 요가를 하고, 글을 쓰고, 책방을 운영하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말이 툭, 튀어나왔을까. 흔들리는 꽃잎처럼, 그녀 역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려나. 거센 폭풍우가 오면 오는 대로, 비가 오랫동안 내리면 그런대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비바람을 거슬러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않고, 지키려 했으나 지킬 수 없는 것은 그런대로 또 보내주고- 그럼에도 내게 남아있는 것들은 소중히 보듬어 또다시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내는 삶. 그 안에서 나는 '무위'를 읽어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언제나 흔들린다. 아무리 버텨내려고 해도 버텨내지지 않는다. 길가에 핀 한 송이의 꽃이 유난스럽게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피기까지 많은 흔들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조건들이 다 맞아떨어졌을 때, 꽃은 제 얼굴을 말갛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또 다른 꽃들을 기다리며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 사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내일이 걱정된다. 하지만 아무리 걱정한다 한들, 내일을 살아볼 수는 없는 일. 그저 오늘을,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내면 그걸로 될 일이다. 길가의 잡풀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