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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 ZERO 零 ㅣ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뒤표지에 이렇게 쓰였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게 전부예요, 여러분. 목소리에 꽤 힘이 들어간 것 같으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씨익 미소 짓는 짧은 문장에서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모르긴 몰라도 아주 센 캐릭터임에는 분명했다. 소설 <0 영 ZERO 零>은 오롯이 그녀의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와 4년 만난 성연우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그녀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사악한, 상상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 아니 타인의 고통을 일부러 창조하고 적극적으로 즐기며 세상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성연우의 말은 맞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타입이었다. 남을 어떻게든 착취하려는 뱀파이어적인 경향이 있고 동시에 나르시시즘적이면서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이었다.
때로 그녀는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구원할 수 있으며, 또 언제라도 내팽개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마치 사람을 인형 가지고 놀듯이. '나'는 나쁜 애였다. 그런데 '나'라는 아이는 이름도 없이 그냥 '나'여서, 또 그 애의 목소리로만 이 이야기를 듣는 거여서 어느 순간부터 모호해져 버렸다. 생생한 대사와 나(독자)를 향한 질문은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게 했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성연우의 다그침에 정신이 확,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묘했다. 소설은 소설 속에서 '나'가 세영이의 글이 그렇다고 한 지점과 닮아있었다. 가볍고, 빠르고, 딱 적당한 지점에서 사람을 찌르는. 굉장히 유능한 침술사 같았다. 세영은 난해하고 자기 파괴적인 독일 문학의 세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찢어져 버렸지만, 작가는 그 무거운 독일 정신을 어깨에 이고도 힘차게 날아오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이처럼 호의적인 마음이 되니, '나'가 뱉는 아무 말도 다 괜찮아졌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인생에 교훈 따위 없다는 것.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있다. (본문 중에서, 187쪽)"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섬뜩하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기도 하다. 모두를 환대하는 값싼 도시는 돈을 충분하게 가지기만 하면 다른 사람을 죽고 살게 마법을 부린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 '나'는 그것을 재미라고 불렀고 그에 비하면 물건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시시한 일이라고도 했다. 그녀는 마치 무대에 올라있는 듯했다. 스포트라이트는 그녀를 향해서만 빛을 내리쬔다. 무대에는 분명 다른 사람도 있을 텐데, 그녀의 이야기 속에 타인은 그저 엑스트라일 뿐 결코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러다 어느쯤에선가 성연우가 그 빛 속으로 성큼 들어온다. 아무것도 없다는, 인생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허무주의적인 그녀의 삶에도 의미 있는 타자가 생기기를. 하고 짧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