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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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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과거란 환영일 뿐이야. 과거란 지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실체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란 소리야. 과거는 단지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
기억이란 건 절대 정확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거야. (108쪽)
과연 그럴까? 과거란 그렇게 하찮은 것에 불과한 걸까? 지나가면 그냥 지나간 일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현애와 헤어지고도(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이 되고, 아내가 되었음에도) 그녀의 오늘이 걱정되어 뒤척이는 동수나, 독립운동한 동네 사람들을 밀고했다는 누명을 쓰고 67년동안 더러운 잡년으로 살아야 했던 할머니에게- 과거는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소설 <할매가 돌아왔다>는 돌아가신 줄 알았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빠와 고모가 100일을 갓 넘겼을 때 일본 순사와 집을 떠난 할머니. 67년 세월이면 다 잊었을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집으로 돌아온 걸까? 그녀의 지난 67년에는, 동수네 가족의 지난 67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동수네 가족은 (으레 모든 가족이 다 그렇듯)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다. 수십 년간 정치판을 기웃대며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쓴 아버지나 그의 빈자리를 메꾸려 슈퍼마켓을 운영해 온 어머니, 직장도 번듯하고 이혼하며 받은 건물도 있어 든든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탄탄하지 않은 동생, 그리고 십 년째 취업 준비만 하고 있는 백수 주인공. 큰소리치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들과 한숨 푹푹 내쉬면서도 그 빈자리를 매워주는 여자들의 모양새는 한국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가족에게 진짜 '특별한'일이 일어났으니, 할머니의 등장이었다. 할머니는 그냥 돌아오지 않았다. 60억과 함께였다. 세금을 떼도 40억은 될 거라는 할머니의 심드렁한 말 한마디는 온 가족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60억이라니! 6억이면 가족들이 눈도 깜짝 안 했을 것이고, 600억은 비현실적이니- 이 얼마나 적당한지(??!)
진짜 60억이 있는 걸까, 의심하면서도 가족들은 할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동분서주 바삐 움직인다.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60억을 가운데 두고 가족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그 돈을 쥐고 있다는 할머니도 은근슬쩍 가족의 중심부로 들어온다. 블랙코미디가 신파가 될 때- 책의 띠지에 적힌 것처럼 '10초마다 웃기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할머니의 지난 67년은 오롯이 할머니 개인의 몫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다. 이 땅의 진한 슬픔이, 쉬이 부서지지 않는 편견이, 의심이, 질투가- 할머니의 마음에 끝없는 생채기를 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우리는 그저 가만히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종이공예에 대해 할머니는 이렇게 조언했다. 말기가 어렵다고, 종이 말기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오려 붙이기를 하면 전체적인 느낌이 달라진다고, 언젠가 말기엔 말기를, 접기엔 접기를 해야 작품이 살아난다고. 어렵다고 피하지 말고, 돌아가지 말고 끝까지 정면 승부를 해야 비로소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고. (203쪽)
다행하고 감사한 것은, 할머니가 씩씩하다는 것이다. 종이 말기가 어렵다고 오려 붙이지는 말라는 할머니의 종이공예 조언에서 그녀가 왜 집으로 돌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60억의 유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저, 이 씩씩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여서-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할머니, 60억 진짜 있는 거 맞죠?)(흐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