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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대에게 - 여성을 지킬 최소한의 법률상식
이찬숙.송지혜 지음 / 페이퍼타이거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결혼 전, 8년을 살았던 집이 있었다. 짐이 하나도 없어도 좁아 보이는 원룸의 월세도 만만치 않던 서울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방이 2개나 되면서 부엌이 따로 있는 (옥상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집은 서울 자취 판타지의 원형이었다. 그곳에서 20대를 보냈다. 살면서 큰 문제가 없었기에 주인과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전세 세입자와 주인이 연락할 일은 전세금을 올려달라거나, 이사 가겠다고 하는 일 외에는 없지 않은가. 이번에도 전세금을 올리지 않고 지나가 나보다-할 때마다 솔직히 안도했다) 문제는 결혼을 앞두고 터졌다. 이사를 하려고 하는데 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다. 8년 전 전세 계약서에 적힌 연락처는 없는 번호였고, 주소지는 이미 다른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알고 보니 주인은 외국인이기도 했다. (90년대 후반에 이민을 간 것 같았다) 주인과 연락이 닿아야 부동산에 집을 내놓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변호사를 찾아갔다.
잘 모르니까 그냥 서초동에 있는 큼직한 로펌에 갔다. 돈을 주고 일을 맡기러 가는 입장인데도 왠지 모르게 (면접이라도 보는 듯) 떨렸다. 변호사가 아니라 실장정도 되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았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전세금 반환 소송은 해보자고 해서 진행했다. 당연히 승소했고, 공시도 했다지만- 여전히 주인과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불안한 마음에 주소지도 이전하지 못하고, 그저 법률적으로 나는 아직 그 집에 머물러 있다. 이게 벌써 5년 된 이야기.
법은 생각보다 느슨하고, 또 생각보다 촘촘하게 짜여 있다. 두꺼운 법학 사전을 뒤지지 않아도, 나와 당장 관계된 법령은 쉽게 검색해 읽어볼 수도 있다. 딱딱한 문체에 지레 겁부터 먹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법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정의만 익힌다면 크게 무리 없이 읽히기도 한다. 그래도 시작이 어렵다면, 이 책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대에게>를 추천한다. 책은 법을 필요로 하고 법에 관심도 많지만, 막상 필요한 법률 지식은 갖추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쓰였다. 여성들이 일상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문제들- 성범죄, 이혼, 직장에서의 문제(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불평등), 쇼핑(환불, 교환), 저작권, 중고거래 사기 등-을 법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중요한 부분만 콕콕 집어 정리했다.
이 책의 내용이 당장 필요 없을 수 있다. (그리고 부디, 필요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요즘, 보험 들어두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둔다면 언젠가 한 번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권리는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면서 겪는 온갖 크고 작은 부당한 문제들에서 좀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내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이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망으로는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