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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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Grow Review

상처와 꽃이 그 안에 있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제3시집



두 번째 시집 이후 15년 만에 시집을 낸다. 

350여 편의 시에서 56편을 모았다. 

<웅이> 외에는 모두 미발표작이다. 

시집을 묶는 것이 늦은 것도 같지만 

주로 길 위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채 마음의 갈피에서 

유실된 시들이 많았다.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ㅡ 류시화 




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다. 사람 관계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다. 그래도 내가 책을 읽으면서 주기적으로 시집을 꺼내는 이유는 나의 눈을 위해서다. 산문으로 부지런히 문장을 받아들이다가 운문을 읽을 때면 눈이 휴식하는 느낌이다. 곧이어 생각의 숨돌리기가 시작된다. 오늘은 류시화 작가님의 시집을 꺼냈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제목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한껏 열린다.


시인 류시화가 1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돌'과 '꽃'의 대화이다. 꽃에게 손을 내미는 돌, 돌에게 말을 거는 꽃, 돌과 꽃이 지구별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미 시인이다. "새의 폐 속에 들어갔던 공기가 내 폐에 들어온다"는 사태를 수용한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시다.

이문재 (시인)의 글


오늘도 여러 편 내 마음에 와닿았지만, 2편의 시를 꼽아보자면 <어머니>라는 시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당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함께 숨 고르기 하며 시를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조심스레 권해본다.


어머니

시가 될 첫 음절, 첫 단어를

당신에게서 배웠다

감자의 아린 맛과

무의 밑동에서 묻은 몽고반점의 위치와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뽑아 먹는 기술을

그리고 갓난아기일 때부터

울음을 멈추기 위해 미소 짓는 법을

내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맞잡으면

기도가 된다는 것을

당신은 내게 봄 날씨처럼 변덕 많은 육체와

찔레꽃의 예민한 신경을 주었지만

강낭콩처럼 가난을 견디는 법과

서리를 녹이는 말들

질경이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 시는 아직도

어린 시절 집 뒤에 일군 당신의 텃밭에서 온다

때로 우수에 잠겨 당신이 바라보던 무꽃에서 오고

비만 오면 쓰러져 운다면서

당신이 일으켜 세우던 해바라기에서 오고

내가 집을 떠날 때

당신의 눈이 던지던 슬픔의 그물에서 온다

당신은 날개를 준 것만이 아니라

채색된 날개를 주었다.

더 아름답게 날 수 있도록

하지만 당신의 경사진 이마에

나는 아무것도 경작할 수 없다

삶이 파 놓은 깊은 이랑에

이미 허무의 작물이 자라고 있기에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한쪽으로 비켜서 있는 이들

봄의 앞다툼 속

먼팔치에 피어 있는 무명초

하루나 이틀 나타났다 사라지는 덩굴별꽃

중심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많은 눈물 흘리면서도

비켜섯 것들을 위해서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산 자들의 행렬에 뒤로 물러선 혼들

까만 씨앗 몇 개 손에 쥔 채 저만치 떨어져 핀 산나리처럼

마음 한켠에 비켜서 있는 이들

곁눈질로라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비켜선 무늬들의 아름다움이었는데

일등성 별들 저 멀리 눈물겹게 반짝이고 있는 삼등성 별들이었는데

절벽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처럼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더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더듬어 본다.

숨 고르기. 한 번, 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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