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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역사 -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 필로버스 총서 2
김민호 지음 / 에디스코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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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적인 오해로부터 데리다를 구출해내는 가장 탁월한 시도이자 누구나 쉽게 데리다의 기본 전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쓰인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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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클럽 - 이지은 평론집 문학동네 평론선
이지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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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마다 중점을 두고 연마하는 관점이 상이하기 때문에 평론집을 읽는 일은 그 평론가의 렌즈를 잠깐 빌려 그의 시선에서 이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국문학 연구자로서, 문학평론가로서 이지은의 가장 탁월한 점은 '삶'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관심이다.

물론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 연구자나 평론가는 (있을 수) 없으므로 추가적인 설명을 보태자면, 이지은은 담론의 틀로 가공되거나 통계로 환원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삶에 주목한다. 결코 정합적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고, 그 스스로도 갈피를 알기 어려워 모순으로 들끓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머리말은 이지은의 평론과 논문이 어디에 뿌리 닿아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효한 단서가 되어준다.

머리말에서 이지은은 그간 '위안부' 연구를 통해 문학과 삶의 진실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음을 밝힌다.(이지은의 박사학위논문은 <일본군 '위안부' 서사 연구>(2023)이며 그는 '위안부' 관련 다수의 논문을 썼다.)

주지하다시피 문옥주는 어렵게 귀국 허가를 받아내고서도 귀국선을 타기 전날 아버지가 만류하는 꿈을 꾸고 귀국을 포기, 위안소로 돌아간 인물이다. 이후 사이공에서의 시간을 아름답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한 문옥주의 이야기는 역사부정론자들에 의해 합리화의 근거가 되곤 했다.

이지은은 이처럼 문옥주의 이야기가 위안소 변호에 소모되는 것에 대해 (지식이나 정치적 의도에의 복속 차원을 떠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7)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는 오히려 비극적인 모순의 증거로 읽혀야 하며, 피해자성 박탈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됨을 역설한다.


삶에 대한 이해, 그리고 비극적인 '모순'. 이지은의 섬세하고도 예리한 시각은 항상 이 지점을 겨냥하며 위로든 아래로든 납작한 환원을 거부한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도 중요한 문제의식은 "역사적 실체를 담론으로 대체하는 논법"(16)에 대한 경계였다. 그리고 이는 <소셜 클럽>을 읽는 데도 핵심 키워드가 된다.

또한 이지은은 현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경계, 새로운 틀의 구축 과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를 청하는데, 규율화를 통해 정상성과 합법성이 부여되고 이는 가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ex. 전시 강간이 성매매처럼 계약 관계로 호도되는 것)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이지은은 메스를 갖다대기 이전에 우리 각자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 모순덩어리인지를 먼저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장르가 왜 통계나 여타 기록물보다 '삶의 진실'에 더 맞닿아 있는 장르인지를 차분히 증거한다. 환원보다 확장에 관심을 둔 이지은의 글을 읽으면 미래를 꿈꾸는 방향이 다각도로 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소설을 읽는 일 또한 소설의 꿈을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개입'하는 일이다."(110))

8년 간 쓴 글을 묶은 이 평론집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이 소설에서 포착되는 삶의 모순을 통해 사회적인 차원에의 확장(소셜)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는 서로에게 관객이 되어주기를 청하는 대목에서도 일부 암시된다. 각자의 고유한 서사는 또 다른 고유한 개인들과의 연결 속에서, 서로를 승인하고 들여다보는 작은 실천들을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영화 <파묘>에 빗대어 한국문학장의 '파묘'를 다룬 흥미로운 미발표작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첫 순서로 읽고 다시 처음부터 읽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이지은이 지난 8년 간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느낀, 동시대 문학장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문장 - 문학사는 십 년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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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아웃
도니엘 클레이턴 외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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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주 기나긴 산책>은 꼭 장편으로도 나오면 좋겠다 ㅠㅠ 그리고 수록작들 다 너무 재밌고 사랑스러워서 하이틴 영화로도 제작되면 좋겠네 ㅠㅠ 표지도 진짜 센스 있고 제목 블랙아웃도 중의적 의미여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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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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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는 어떻게 처리했지? 부패되는 성인 남자의 몸을 도구나 조리 없이 맨손으로 다 뜯어먹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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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과 별 - 인아영 평론집 문학동네 평론선
인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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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가 어떻게 사유하는지 그 논리의 조직화 방식을 읽는 것과도 같다. 매끄럽고 정합적인 인과 구조를 따르며 정밀한 텍스트 읽기에 기반하여 다양한 질문들로 분화하는 인아영의 글은 비단 문학에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사유의 기술을 부단히 계발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


1. 질문의 '기술'


그러나 문학평론가로서 인아영의 가장 빛나는 지점은 문학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가 개별 작품론, 작가론에서 '질문'을 길어 올릴 때라고 생각한다. 방향을 돌려 새로운 질문을 발굴하고 시선의 전환을 유도할 때 말이다. 물론 모든 비평은 질문을 한다. 자문하고 반문한다. 작품에서 담론을 되묻는다. 문학은 '본래적'으로 질문과 뗄 수 없는 장르라는 구태의연한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아영이 유의미한, 생산적인 의제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질문을 하는 데 능하다.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익숙한 논의의 재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아영은 기존의 지배적인 해석이 지나친 낙관론으로 경도되는 것은 아닌지 신중히 경계한다. 자명하다고 여겨져온 명제를 곰곰이 들여다보며 의심하고 그 "각도를 틀어보"(7)는 일에서 그의 비평은 출발한다. 예컨대 의심과 가설, 촘촘한 검증으로 이어지는 몇 단계가 있다. 


(1) 그런데 2000년대 한국문학은 정말로 진정성이 와해·폐기·종언된 자리에 들어선 문학이었을까?(141)


(2) 진정성은 2000년대 문학에 이르러 사라져간 것이 아니라 시 장르에서 비평 장르로 이동해간 것이 아닐까? 문학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문학의 존재 가치를 안전하게 보증해줄 실재에 대한 열정을 필사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만큼, 한층 더 강화된 채로 말이다.(142)


(3) 어쩌면 우리는 여성들의 관계를 유독 연대 가능성을 묻는 패러다임과 더불어 상상하고 해석해온 비평적인 관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문학사에서 남성 간의 관계가 얼마나 다채롭게 해석되어왔는지를 떠올려보았을 대, '연대냐 아니냐'라는 질문을 통해 여성들의 관계를 이해하곤 하는 우리의 해석 틀이 충분히 가다듬어지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 여성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왜 그러한 독법이 너무나 익숙하고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남성에게는 연대를 묻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이 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독 불편해하거나 못 참는 거대한 압력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여성들의 관계에서는 왜 유독 연대가 중요하게 기대되는가? () 오히려 여성들과의 관계를 단순화하거나 그 안의 적대성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238)


이러한 질문은 무엇보다도 정교한 텍스트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가령 데뷔작이기도 한 박민정론에서 그는 해당 작가만의 특이점을 찾아내고, 이를 질문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후 비평장의 흐름을 변화시킨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연대를 최종적인 지향점으로 삼고 애써 그 흔적을 찾아내기보다는 박민정 소설이 왜 확실한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지 않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먼저 이렇게 질문해보자. 여성들의 연대가 미뤄지는 동안 이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251)


그렇다고 그가 또 다른 '답'으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아영의 비평 작업은 이러한 독해도 가능하다며 다른 방향으로 시야를 확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이런 논의도 가능하다며 다양한 가지를 내고 연결한다. ("돌봄은 이미 성애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돌봄의 섹슈얼리티와 연루되어 있는 권력의 다종한 측면에 주목해보는 일은 돌봄의 가장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가능성을 탐색해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49)) 인아영이 열어보이는 새로운 논의가 가져올 기대 효과와 유용성을 뒷받침하는 건 모호한 비약이 아니라 곧바로 이어지는 논리적이고 정밀한 분석과 논증이다.


2. 파편으로서의 삶의 가능성


그렇다면 인아영의 질문은 무엇을 위한 질문일까? 후술하겠지만 인아영에게 구조적 문제의 폭로, 파편화된 자아에 대한 새삼스런 재확인은 딱히 목표가 되지 않는다. 분류 체계를 나눠 놓고 그 안에 개별 작품 혹은 작가들을 배치 구획하는 일도 인아영의 관심 밖이다. 오히려 그는 "문학이 진실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제를 공유할 수 있었던 당시의 믿음"(163)이 정당화해온 독자적 판단체계의 기만과 그 유지 조건에 대해 되묻는다. 그에게 문학성이란 도달해야 할 보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167) 개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인아영이 정말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작업이라고는 하기 어려울 듯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총체성이 부서졌다는 인식이 아니라 이 부서진 조각들을 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 깨져버린 믿음 이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다."(5)라는 머리말에서의 언급은 어쩌면 이 평론집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심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합의에 이른 것이든, 그 기능상의 한계에 맞닥뜨린 것이든, 분리되어 외따로 존재하는 '문학적 진실'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금', 이러한 인식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2018년 당선 소감에서부터 이어져온 인아영의 주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억압하지만 동시에 '나'를 형성하고 유지하기도 하는 조건 속에서 개개인이 살고 있는데, 이 '진창' 속에서 삶을 어떻게?)


이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주어 자리에는 '문학'이 놓이지 않는다. 인아영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계도자로서의 역할을 말하지 않는다. 그 앞에 주어로서 놓일 단어는 차라리 '우리 모두'에 가까울 것 같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문학에 접붙이고 있는 개개인들이 각자의 글쓰기를 붙들고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주목한다. 빈번히 인용되는 버틀러의 문장에서도 언급되듯 말이다. ("나를 형성한 조건들을 갖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그가 일관적으로 강조점을 두고 있는 건 흔히 한계나 제약으로 여겨지는 삶의 조건들, 정체성을 가지고서 텍스트 안에서, 문단 제도와 비평 안에서, 문학 시장과 산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는지 등이다. 


(1) 이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제한하거나 추동하는 국적,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등의 조건을 부정하거나 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움직이고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그 조건을 기꺼이 전환한다. 나는 자신의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수행성이 시기 문학의 중요한 징후라고 생각하고 있다.(7)


(2) 평론가들이 어떤 쓸모를 요구받고 착취당하는지뿐만 아니라, 어떤 욕망과 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까지 동시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지기 어려울 수 있다.(211)


(3)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반복되는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그러한 상황에 저마다의 믿음과 실천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 대응에는 예정된 절대적 원칙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행위자들은 각자의 주체성과 우발성을 가지고 경합하거나 화합한다.(214)


그리고 인아영이 주목하는 저마다의 실천은 그 하나하나가 각자의 좌표를 점하며 기존 담론을 재구성한다.


3. 문학을 사랑하는 무수한 방식 중 하나로서의 비평


이 평론집의 수록작 중 단 한 편만 고를 수 있다면? 데뷔작 박민정론에서부터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가론일 백은선론, 김멜라론 등이 떠오른다. 필독 비평으로 자리매김한 「시차(時差)와 시차(parallax)」, <눈물, 진정성, 윤리-한국문학의 착한 남자들> 등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문학평론가 인아영의 이름을 분명히 각인하게 된 계기는 #문학은_위험하다에 수록되었던 <문학은 억압한다>를 읽고부터였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


나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이 궁금했다. () 사회의 일부로 환원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미묘하고 이상한 마음의 무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126-127)


지금 문학은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저 글을 읽는 동안 나 또한 '왜 하필 문학인가? 왜 다른 학문이 아니라 문학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표준집단이나 목적 대상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제각각 고유하고 특수한 복수의 삶들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진지한 고민을 거쳐 이런 마음과 이런 존중의 시선으로 글을 쓰는 평론가에게 자연히 신뢰가 갔다. 이전 글과 다음 글이 궁금해졌다. 문학 자신마저 반성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 끝맺음하는, 회의주의에 편하게 굴복하지 않는 태도 또한 참 오래 힘이 되었다.


오래 기다려온 이 평론집을 읽으며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여러 가지를 연결하는 비평의 즐거움을, 그러한 비평이 열어갈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들을 깊이 누리고 기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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