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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ㅣ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 책은 작가정신 서평단, 작정단 14기 멤버로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여름휴가 전날, 집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건 뜬금없는 빨간색 냉장고와 화분이다. 분명 내것이 아닌데 어떻게 내 방에 놓여 있는 걸까. 주인공 동하는 곧 자신과 헤어진 연인이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급히 휘갈겨쓴 메모를 발견한 덕분이다.
"동하씨, 냉장고를 부탁해. 화분도. ㅁ - 세주"
아마 이 책을 읽은 분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마지막의 문장 뒤에 붙은 ㅁ자에 단박에 호기심이 들었다. 둘만 아는 암호인가? 아니면 무슨 말을 쓰려다 만 건가?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계속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남자와 같은 상황에 처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만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무척 황당했을 것 같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내 집의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물건을 들여놓다니. 하지만 동하는 그런 황당함을 누그러뜨리고 세주의 입장을 헤아려본다. 세주의 친구에게서 세주가 한동안 식물상점을 운영하다가 상점을 접게 되었음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동하는 세주가 물건을 맡긴 사람이 자신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옷이 든 캐리어와 함께 화분을 전달받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향수와 화분을 전달받은 친구가 있고... 그런 식으로 모두 아홉 명이 세주에게서 선물 아닌 선물을 받은 상황이었던 것.
냉장고를 열어본 동하는 그 속에 책이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주의 소식을 기다리며, 그 책을 한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혹시 세주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잠적을 한 건 아닐까...?
나 역시 동하와 같은 식으로 생각했지만, 이 소설의 장르는 다행히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알쏭달쏭한 여자, 어떻게 보면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살아가는 여자, 세주의 이야기는 2장, "모든 세계의 끝에는" 이라는 제목으로 장 전체를 할애하여 진행된다. 2장을 읽으며 나는 세주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무지 되는 일이라고는 없는 삶. 헤어짐을 통보받은 후의 삭막한 일상.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식물상점을 열어보았지만, 예정된 것처럼 맞이한 폐업.
특기할 만한 점은 2장이 세주를 초점 화자로 두고 있음에도 결코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주는 어디까지나 3인칭 시점으로 담백하게 묘사된다. 그래서 이야기가 마지막 3장으로 진입할 때, 독자는 동하의 1인칭 시점에 다시금 무리없이 녹아들 수 있게 된다.
둘을 다시 연결해준 건 ㅁ자로 시작하는 인스타그램의 댓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둘이서 주고받는 미음자로 시작하는 해시태그가 꽤 달달하다.

그리고 사진 또한 빼놓을 수 없이, 둘을 연결하는 주요 장치이다.
위쪽은 세주의 사진이다.

그리고 이 사진 주인공은 동하다. 제미나이 AI를 이용하여 그린 이미지인데 소설의 느낌이 반영된 것 같다.
3장으로 완성되는 둘의 이야기는 연인 사이일 때는 결코 터놓지 못했던 자신들의 속내를 터놓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렇게 만난 둘은 어떻게 될까. 마지막이 주는 여운을 느끼면서 나는 둘의 멈추어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를 바라게 되었다. 서로를 오해하면서 헤어짐을 맞았다면 이번에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시작할 차례가 아닌가 싶어서.
중편소설 길이로서 카페에서 부담없이 읽어볼 수 있는 분량이다. 이 향 시리즈는 지금 작가정신에서 출간되고 있는 '소설, 향' 시리즈 중 하나라고 하는데, 앞으로 출간 예정인 작품들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