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에 경실련 알뜰가게에서 거의 줍다시피 한 책들이 있습니다. 에이브(ABE) 전집 몇 권과 메르헨 전집 한 권, 그리고 웅진에서 나온 [호피 인디언 전래동화] 한 권. 그 전에는 이런 책들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재미있겠다 싶어 호기심에 샀는데, 최근 들어 서재 마실 다니다가 어릴 적에 에이브 전집을 읽으신 분이 꽤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집에도 명작전집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건 삼성당 거였나... 가물가물하네요. 우리집에 있는 것 말고, 친구 집에 놀러가서 다른 출판사의 명작전집도 꽤 여러 권 읽었는데, 그건 또 어디 거였나 기억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문각? 계몽사?)

(책등 아래쪽에 있는 출판사 이름을 보니, 같은 에이브 전집인데 어떤 것은 학원출판공사에서 내고 어떤 것은 동서문화사에서 냈네요. 어찌 이런 일이. -.-)
경실련 알뜰가게는 아름다운 가게가 생기기 전에 문을 연 상설 재활용 가게예요. 1999년 신설동 전철역 근처 무슨 교원연수원인가 하는 곳의 한 귀퉁이에서 발견했지요. 거기서 멀쩡한 점퍼나 청바지를 1000원에 사들이곤 했어요. 기증받은 물품을 손질해 팔고는, 그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쓴다고 했으니 아름다운 가게랑 설립 취지나 운영 방식도 같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아름다운 가게 처음 생길 때, 자기네가 국내 최초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옆지기랑 저는 이상하다, 알뜰가게가 먼저 있었는데.... 했어요. 저렇게 전국적으로 조직을 갖춘 게 국내 최초란 뜻인가?
아무튼 메르헨 전집 한 권이 바로 [초콜릿 공장의 비밀]이에요. 로알드 달의 그 책이죠. 얼마 전 로드무비님 서재에서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시공주니어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란 제목으로 번역해 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마 시공주니어에서는 원작을 완역했겠지요. 그래서 시공주니어 책을 구해, 제가 가진 메르헨 전집의 책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번역되었나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났어요. 마침 연보라빛우주님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다른 책과 바꾸고 싶다고 하셔서, 그 책을 받았습니다.


두 책의 그림을 비교해 볼게요. 먼저 메르헨 [초콜릿 공장...]에서 찰리를 소개한 그림입니다. 책에 화가 이름을 밝히지 않아 불만스럽습니다만, 그림은 깊은 느낌을 줍니다.

시공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퀸틴 블레이크Quentin Blake라는 화가가 그렸는데, 가볍고 발랄한 느낌입니다.

두 권에서 각각 찰리네 집을 어떻게 그렸나 보실래요?

왼쪽 것이 메르헨 [초콜릿 공장...]의 그림이고 오른쪽 것이 시공주니어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문장만 보자면 메르헨 쪽 번역도 썩 좋습니다. 그림과 글이 잘 어울리고, 문장에는 나름대로 운율이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흔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납작한 직사각형 초콜릿을 “납작초코”라고 아주 적절히 번역한 게 마음에 들어요. 시공주니어 쪽에서는 “납작한 판 초콜릿”(11쪽)이니 “초콜릿 바”(29쪽)니 했는데 말이지요.그러나 메르헨 쪽에서는 앞부분에서 문장과 내용을 과감히 축약했네요. 이를테면 황금 카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비슷한 반응을 보이잖아요. 그렇게 반복되는 부분을 생략했더군요. 그러나 찰리의 생일 장면부터는 빠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움파룸파 사람들에 대한 것이에요. 메르헨 책에서는 움파룸파 사람들이 피그미족이라고 하거든요. 피부색도 초콜릿색이라고 나오고, 그림에서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시공주니어 책에서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냥 “난쟁이”라고만 하지요. 게다가 91쪽에서는 움파룸파 사람을 “발그스레한 하얀 피부에 머리카락은 황금빛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사실 한 흑인 부족을 몽땅 데려다 공장 노동자로 삼는다...는 설정이 조금 불편했거든요. 나중에 인종주의가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작가가 내용을 고치기라도 한 걸까요?
불편한 점은 다른 데에도 있었어요. 초콜릿 공장 사장인 웡카는 아이들이 질문할 때마다 면박을 주거나 무시한다는 점, 그리고 항상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이에요. 동화를 너무 삐딱하게 보는 걸까요? 하지만 그 점 때문에, 찰리 이야기가 애틋하고 흥미진진하면서도, 조 할아버지가 몹시 귀여우면서도,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걸요.
찰리와 초콜릿 공장 | 원제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1964)
| 로알드 달 Roald Dahl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