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린지 한참 지났지만 눅눅하고 습한 공기는 여전했다. 거리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유흥업소에선 토요일 밤이라 좀 더 분주해진 마담들이 서둘러 장사 채비를 하고 있었고, 엎어놓은 맥주 상자에 걸터앉아 매니큐어 칠을 하던 여자는 나를 보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싸게 해줄게.”
저 ‘싸게 해주겠다’는 말의 의미가 나는 늘 아리송했지만 만약 가격을 깎아주겠다, 라는 것이라면 그 이유가 내가 학생이어서인지 아니면 클럽 사장 아들이기 때문인지가 실은 더 궁금했다. 그녀는 한 번 더 재촉했고 나는 못 본척 그 앞을 지나갔다.
사는 집–정확하게 말해 자는 방-은 클럽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층 양옥의 1층 깊은 구석에 들어선 쪽방이었고, 현관에서 방향을 틀어 집 외벽과 담 사이의 좁은 통로를 간신히 비집고 지나가면 그 입구가 나왔다. 입식 부엌도 없는 말 그대로 잠만 자는 방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퀴퀴함이 코를 파고들었다. 나는 닫아놓은 창문을 연 뒤 선풍기를 틀어 회전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주위를 대강 정리하고는 가게에서 가져온 맥주를 꺼내 병째 들이켰다. 작은 사이즈의 업소용 맥주라 양은 많지 않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생각보다 일찍 술기운이 돌았다. 나는 쓰러지듯이 바닥에 누웠다. 처음 왔을 때 두 명은 넉넉히 누울 수 있었던 방이 그 동안 늘어놓은 책이며 옷가지들로 인해 이젠 한 명이 다리 펴기도 빠듯해져 버렸다. 방바닥은 차가왔다. 하지만 낮 동안 한껏 달아오른 방안 공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덩달아 내 몸도 빠르게 달아올랐고 곧이어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가게로 들어오라며 눈웃음을 보내던 주점 아가씨의 탄력 있는 다리, 끈적한 눈으로 하늘거리듯 춤추던 무희의 봉긋한 가슴, 그리고 오후 나절 동네 재개봉관에서 본 에로 영화 속 여배우의 요염한 얼굴이 감은 눈앞에서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오버랩 된 세 개의 이미지는 마치 3단 변신로봇처럼 차츰 하나의 완성체로 구현되더니 어느덧 몽환적인 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 바로 그때, 난데없이 불쑥, 그녀가 끼어들었다. ‘멜빵치마’-오늘 클럽에 찾아왔던 그녀-. 도대체, 왜 온 걸까? 그러니까 내말은 우리 가게가 아니라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이 순간에 말이다. 난 깨진 흥을 다시 살리기 위해 바닥에 굴러다니는 포르노 잡지를 펼쳐들었다.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이미 후끈해져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집 마당에 설치된 간이수도에서 대충 세수를 마친 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밤새 땀에 전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니 오랜 신자답게, 주일이다. 언제부터 교회에 다녔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 걸 보면 아마도 엄마 뱃속에서 부터지 싶다. 엄마가 죽고 이 세상에 신 따위는 없다고 단정했지만, 이후론 그저 습관처럼 다니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교회에 가야할 이유가 따로 있었다.
버스 두 정거장 거리의 교회에 들어섰을 땐, 늘 입구에서 깍듯한 인사로 신자들을 맞이하던 집사, 권사들도 이미 교회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따라서 나도 서둘러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에 앉던 2층 맨 뒷좌석이 아닌 1층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도 하겠습니다.’란 소리가 들려왔고, 난 고개를 숙이는 척 하면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앞에서 세 번째 줄, 나이 드신 할머님 두 분 사이에 그녀-멜빵치마-가 있었다. 오늘은 그녀가 자주 입고 다니는 멜빵치마가 아닌 흰 블라우스에 밋밋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매끈하고 귀여운 그녀의 다리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몸에 바싹 달라붙은 블라우스도 나쁘지는 않았다.
교장선생님 훈화만큼이나 지루한 설교와 십일조를 포함한 감사헌금 기부자에 대한 기도 형식의 명단 발표가 끝나자 예배는 곧 막바지로 내달았다. 성가대 찬송에 이어 순서 끝에 위치한 주기도문 낭독이 시작됐고 나는 그 틈을 타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르르 신도들 무리가 몰려 나왔고, 그 사이에서, 두꺼운 성경책을 가슴에 안은 멜빵치마가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슬쩍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고 가까스로 간격을 좁힌 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정아.”
그녀가 멈칫하더니 뒤돌아섰다. 나와 눈이 맞은 그녀의 얼굴이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우리 가게에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