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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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회사를 다니는 우리들에게 연말 연초는 참 중요한 시기겠지. 연말에는 한 해의 성과를 평가하고 또 연초는 새로운 한 해의 계획을 수립하고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도 쏟아져 나올 시기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직원들의 이동이 맞물리는 시기라서 그렇지. “어느 팀에 있던 누가 어느 팀으로 이동한다더라, 오랫동안 회사를 떠나 다른 계열사에 가 있던 그 친구가 다시 친정에 복귀한다더라, 팀장이 이번에도 누구를 놓아주지 않고 이동 안 시켜준다더라, 거기 몇 년 째야 그럼? 꼭 지박령 같네”, 이런 이야기가 무수히 돌고 도는 가운데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이동을 하지. 이제 회사에 입사한 지 만 9년이 지났는데, 9년 동안 이동의 소용돌이를 지켜 보며 깨달은 건, 직원들의 이동 시장은 아수라와 같이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회사는 굴러간다는 거야. 그 직원이 없으면 이제 그 조직도 운명을 다하겠구나 싶은 순간에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조직을 유지하고 성과를 내는 법이었단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조직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순간을 맛보았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어냈던 누군가가 있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개별자로 여겨졌거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곧 조직과 동의어인, 그래서 누구나 그를 뚜렷이 식별하고 기억하여 개별자로 존재하는 사람이 분명 몇 명은 있었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조직을 떠나갔음에도 조직이 영속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실제로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 소설에서 레이첼 로즌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안드로이드의 고백과 같이 – 약간은 허무한 생각도 들었단다. 그러니까 뭐랄까,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기계 부품이라고까지 스스로를 비하하진 않았지만, 조직을 이루는 한 요소로서 너와 나의 구분이라는 건 사실 굉장히 허황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우리 사이에 구분이 없다. 우리는 같은 직원이다.

그래서인가 ……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1968년 作)>을 읽었을 때, 앞서 이야기한 안드로이드 레이첼의 고백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어.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인간과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결여된 안드로이드의 대립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내가 주목한 건 존재와 존재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는 상황들이었어. 안드로이드를 식별하려고 개발한 테스트는 그 정확도가 100%는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식별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인간이 아니라고 지목된 이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분이 흐려지는 셈이지. 인간은 모두가 <감정이입 장치>를 통해 선지자 머서와 하나가 되고, 반대로 안드로이드는 모두가 인기 TV 프로그램인 <버스터 프렌들리>를 시청하고 있어. 레이첼 로즌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레이첼 로즌이라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똑 같은 모습과 성격으로 프로그램 된 수 많은 안드로이드 중 하나에 불과하지. 그들 사이에 구분이란 없었어.

이런 소설을 우리는 흔히 SF 소설이라고 구분하지. SF(Science Fiction)소설. 캐나다의 저명한 SF 작가인 로버트 J. 소여는 SF를 “현재에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루는 장르” 라고 정의했다고 하지. 그러니까 1960년대 필립 K. 딕이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 분명 안드로이드라는 개념도 없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경찰차, 감정 이입 장치, 인공 동물, 영상 통화 장치 따위의 것은 분명 없었겠지. 아마 이러한 개념을 생각해내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거야. 2019년을 통과하는 이 순간에, 2069년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런데 더 상상하기 어려운 건 과연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거야. 달리 말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존재할 것인가, 이런 말과 같겠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즐겁게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러한 삶이 도래했을 때 사피엔스라는 생명은 과연 무엇으로 다른 생명과 비교하여 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지, 이런 질문을 마주하면 단지 즐겁다기 보다는 조금은 섬뜩한 기분마저 들어.

그래서 나는 SF소설,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되는 것들은 조금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어. 아까 "SF소설은 현재에는 없지만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 지금 통용되는 규범, 기술,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공간을 상상하여 창조하고는, 이런 삶 또한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수 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거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안드로이드, 실제 양과 전기 양을 명확히 구분하고 식별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존재는 무엇으로 그 존재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 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 소중한 질문이야. 누군가 그 질문을 떠올리고 표현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와 큰 구분이 없을 거고,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어떻게든 이전과 같이 유지되고 시간이 흘러갈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SF소설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기 보다는, 현재를 조금 낯설게 만들어주는 거였어. 낯설게 느껴진 순간, 이전과 같아질 수는 없으니까. 이전과 같지 않다면 적어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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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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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 <빌리 앨리어트>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국 잉글랜드 북부 더럼에 살고 있는 열 한 살 빌리는 권투보다 발레가 재미있다.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상식을 깨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빌리가 처한 현실이다. 아버지와 형은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이고, 할머니는 정신이 가끔 오락가락하는 치매를 앓고 있다. 형편은 여의치 않고 세파(世波)는 험난하기만 하다. 윌킨슨 발레 교사의 도움을 받아 빌리는 발레의 세계에 빠지게 되고, 강경한 아버지 앞에서 마치 신기가 든 듯한 모습으로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왕립 발레학교의 오디션을 통과하고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발레를 선보이는 유명한 발레리노가 된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열 한 살 소년이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해준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인, 전기처럼 짜릿하기만 하다. 예술을 향한 生의 성장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빌리 앨리어트>를 두 번째, 그리고 여러 번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지만 실제 일을 하지는 않고 있다. 당시의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노조는 장기파업으로 대응하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와 형은 매일 현장에 나가 경찰을 마주하고 피켓을 들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에 맞서 대항했다. 빌리가 체육관에서 발레를 하는 것을 보고 나서, 아버지는 파업을 멈추고 다시 밥벌이를 시작한다. 아이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른의 현실이 꿈으로 도망쳐 버리게 놔둘 수 없었다. 빌리의 형편은 여의치 않고 세파(世波)는 험난하기만 하나, 그것은 단지 소설이나 문학이 특정 인물에 부여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공통의 상처이기도 했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1955년에 쓰여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제작 <롤리타>는 영화 <빌리 앨리어트>를 여러 차례 감상하며 겪은 생각의 변화와 정확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 소설은 여러 지점에서 아름답다. 아니 정확히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험버트 씨와 소설을 읽는 내가, 소설에서 언급하는 인물과 순간들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일 테다. 어느 여름 날 서른 일곱 살 험버트는 열 두 살 소녀 롤리타를 만난다. 험버트는 롤리타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책을 읽을 때,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테니스를 칠 때, 창 밖을 볼 때, 의붓아버지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같이 롤리타와 사랑을 나눌 때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 아름다움은 험버트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고 그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순히 유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生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이유가 무엇이든 험버트 스스로는 진실된 아름다움을 쫓고 있다고 믿었을 거다. 나의 님펫, 롤리타 곁에서.

<롤리타>를 다 읽고 났을 때 첫 장을 펼쳐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비단 이 소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른 후반의 남성은 스물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 아이를 성(性)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하고 위압하는 소아성애자다. 매 시 매 분 롤리타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던 그는 어느 날 롤리타가 불과 이십 팔 분 동안 자취를 감췄다고 격분하며 손등으로 롤리타의 광대뼈를 가격한다. 가까스로 도망쳐 그의 곁을 떠난 롤리타를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좌절한 것은 롤리타가 자신을 떠났다는 것보다도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마음을 주지 않은 것, 그러니까 롤리타가 험버트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쌍방향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고, 자기 대신 그녀의 마음을 유혹하고 희롱했던 사내를 찾아가 권총으로 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고서, - 처음 작품을 읽을 때는 다시 읽을 생각에 놓치고 읽지 않은 – 나는 앞서 <빌리 앨리어트>를 보며 떠올린 생각을 후회해야만 했다. 예전의 나는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예술이라는 포장 아래 놓인 현실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며, 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진정한 예술이 될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롤리타>의 나보코프는 딱 잘라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보코프는 소아성애자를 통해 현대인에게 왜곡된 성 의식의 문제점 …… 따위를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험버트라는 위인을 통해 심미적 희열을 추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 지점에서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소아성애자인 험버트의 삶을 따라 다니며 나 역시 아름답다고 분명 느낀 순간이 있었다. 험버트가 테니스를 치는 롤리타를 바라보며, 롤리타가 입은 옷, 바람에 옷이 살랑거리며 나부끼는 모습, 테니스 공을 처음 치는 순간의 우아한 동작, 그녀의 명랑한 표정, 청각적인 면에서도 하나하나가 맑고 또랑또랑한 타격음, 이런 순간을 묘사하며 너무나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험버트의 심리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었다. 험버트의 즐거움과 행복함에 어느 정도의 진실함이 깃들어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폭력이 깃들어있는지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것에 내가 교감하고 심지어 조금은 동화되었다는 것 …… 험버트는 롤리타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나는 완전히 평행선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험버트의 특별한 심리상태와 내가 조금은 연결되었다는 감정은 몹시도 불편하고 역겨웠다.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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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창비시선 198
조용미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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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찾았다. 서점의 벽 한 켠은 시집을 취급하는 다양한 출판사와 수 많은 시집들로 가득했는데, 수 많은 시인들은 놀랍게도 저마다 다른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어떤 이의 시어(詩語)는 투명하고, 혹은 언어유희적이고, 고요하고, 현실에 전투적이고, 生에 초연하고, 서정적이고, 혹은 우울하다. 놀랍게도 – 놀랍다는 표현을 한 번 더 반복해야 할 정도로 – 하나의 표현은 딱 하나의 시집에만 허락되었다. 여기 조용한 느낌의 시어가 쓰인 두 시집이 있다고 하자. 두 시집은 일견 조용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세세히 파고 들면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시인들의 세계에 표현과 감정의 중복이란 없었다. 비슷한 듯 보여도 읽다 보면 그 시인만이 전달하는 고유한 감정은 각자 다르다. 시인을 정의하는 고유한 단어, 그걸 찾아내어 명명하는 것은 시집을 읽는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 날 서점에서 시집 두 권을 샀는데, 하나는 조용미 시인의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였다. 지금까지 여섯 편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 두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2000년에 발표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작품이며, 1962년 生인 시인에게는 나이 마흔을 앞두고 쓰여진 것이기도 하다. 조용미 시인은 <종교적 인간>이다. 조용미 시인이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은, 그녀의 시가 종교적 정취로 가득하다는 말과 같았다. 종교라는 단어는 태생적으로 독실한 신앙, 나직한 기도, 조용한 묵상, 경건한 성상(聖像), 이런 감각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시인이 창조한 종교적인 공간에 신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만 가득하다. 낙선사 뜨락, 남양주 석화촌, 옥룡사터, 대원사 다층석탑, 능내리 ...... 시집에서 발견되는, 시인이 경험하는 공간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런데 현실의 공간 위에서 종교적 정취가 느껴진다. 의아했다. 

M.엘리아데의 <성과 속>구절을 인용해보자.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고 했다. 종교적 인간에게는 현실 속에 성스러운 공간이 있어 그것만이 실재적이고 현실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성스러운 공간은 머리 속에, 하늘 위에, 형이상학적인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창조된다고 했다. 그 이외의 공간은 무가치하다. 때문에 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균질하지 않게 다가온다. 반면 속세의 인간에게 모든 공간은 평등하며 균질적이다. 특별히 성스러운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모든 공간은 동일한 군상이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무대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을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소실점을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소실점 이외의 지점은 까맣게 덮이고 오직 소실점만이 시야에 담기는 무아지경의 세계, 아마 그런 것과 비슷한 시선일 테다. 

조용미 시인은 <종교적 인간>이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 위에 성스러운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여 계속 그것만을 응시하고 있다. 폐허가 된 거돈사의 천 년 묵은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한밤의 진불암에서 마주한 대숲을 보며, 점봉산 단목령까지 산을 오르며 시인은 현실 속에서 영적인 시간을 경험하고 공간을 창조한다. 시집을 읽으며 나도 거돈사에 가면, 진불암에 가면, 점봉산에 가면 시인이 만들어 놓은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체험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궁금한 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왜 시인이 그토록 종교적 인간을 갈망하는지, 왜 시인이 현실 위에 성스럽고 영적인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묻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시인은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이곳 저곳 남겨 두었다. 시인은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그래서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라며 노자의 <도덕경>한 구절을 읊조린다. 

몸이 없는 곳, 그래서 불행이 없는 곳. 고통이 없는 곳. 마음의 생채기가 없는 곳. 그런 곳이 있는지 시인은 끊임없이 현실 위에 영적인 경험을 덧대려는 것 아닐까 싶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의 물고기가 적멸(寂滅)하며 폭우가 쏟아지는 곳이 있어 그곳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런 곳에서는 어떠한 불행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없고 싶다는 마음, 이게 시인이 남긴 단서였다.

조용미 시인이 부러웠던 건 아니다. 나는 시인 그 자신이 되고 싶었다.

(2018. 12. 13.)
 

어비산(魚飛山)에 가면 물고기들이 날아다녔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산에 가는 것을 미루다 물고기의 등을 뚫고 나온 사리를 본다 물고기는 뼈를 삭여 제 몸 밖으로 산 하나를 밀어내었다 

날아 다니는 물고기가 되어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비가 쏟아지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만어산(萬魚山)과 그 골짜기에 있는 절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 물고기떼의 적멸, 폭우가 쏟아지던 날 물고기들이 내는 장엄한 풍경소리를 들으며 만어사의 옛스님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 조용미 시인의 <魚飛山>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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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의 형제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학수 옮김 / 범우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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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어떤 인터뷰에서 “당신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의 종점은 어디냐”는 질문을 받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 같은 책을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 안에는 너무 다양한 사실, 시스템, 세계, 스토리, 그러니까 全 우주가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종합소설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의 목표라고도 했다. 하루키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도스토옙스키, 그 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정점(頂點)이라고 여겨지는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하루키가 어떤 지점에서 이 작품을 질투하고 숭배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러시아 어느 시골 마을의 지주인 카라마조프 가문에서 발생한 친부(親父)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장남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를 둘러싼 재판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드미트리는 친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그의 살해 혐의를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사가 설전을 벌인다.

이폴리트 검사는 5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에 걸쳐 드미트리 혐의에 대한 최후 논고를 밝힌다. 그의 논고는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했고,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을 때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허약하고 개연성이 낮은 것인지를 파고든다. 이 지점에서 검사는 살해 전후 드미트리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논고의 결론은 이렇다. <드미트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친부를 살해했다>. 검사는 드미트리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반면, 검사의 논고에 맞서 페추코비치 변호사는 드미트리가 죽인 것이 아니며, 설령 드미트리가 죽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던 불우한 성장 배경을 언급한다. 즉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드미트리의 살해는 아버지에 대한 살해가 아니라 일반 타인에 대한 살해와 같다는 것이다. 변호사 역시 드미트리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사실은, 검사와 변호사 둘 다 틀렸다. 그들이 언급한 물리적/심리적 증거, 논리적 추론, 당시 정황 등을 토대로 그려낸 살해 당시의 현장은, 친부 살해의 실제 범인인 스메르쟈코프의 고백과는 영 동떨어져 있다. 타인의 심리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하더라도 타인과 나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 나의 심리, 나라는 개체의 진실은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타인의 추론으로 쉽게 그려질 성질이 아닌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모른다. 나에 대해서는 타인 그 누구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라면 어떨까. 나는 나에 대해서는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인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와의 대화에서,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만난 악마와의 대화에서 나 역시 나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실은 나 이반 역시 친부 표도르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던 것 아닐까. 그런 깨달음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것. 타인의 죽음을 원한다는 감정을 포함해 우리 내면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가 모여 있다는 것.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완결 지은 것이 1880,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칼 융이 태어난 것이 1875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도스토옙스키가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수 십 년 앞서 암시한 것은 놀랍기만 하다. <그림자(Shadow)란 우리가 숨기고 싶은 모든 불쾌한 것, 부정적인 것의 집합을 말한다. 열등하고, 가치 없고, 원시적인 부분이며 우리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갖고 있는데, 바로 이 그림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와 대화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깨달았고, 집으로 돌아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한 악마, 아니 자신의 그림자를 실제 마주한다. 이반이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반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을 만났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은 동생 알로샤에게 “사실 나는 그것이(악마가) 내가 아니라 그 놈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라고 고백했던 거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무의식의 감정, 열등하고, 가치 없고, 원시적이고, 어둡고, 추악한 인간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현혹하러 온 사탄이기를 바랬다. 이반은 곧 나이기도 했다. 나는 조직에 순응하며 가정을 지키며 예술과 선()을 꿈꾸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그림자가 – 누군가를 심지어 죽여버리고 싶다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이 – 나에게도 분명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그림자를 가진 인간인 것이다. 때문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으며 가장 깊게 감응했던 인물은 장남 드미트리도, 삼남 알로샤도, 혹은 친부를 살해한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도 아닌, 그림자에 눈 뜬 둘째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앞서 말했듯이 하루키는 全 우주가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우주에 빛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우주에는 어둠이 더 많았다.  

(2018. 12. 12.) 

추신1.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여러 출판사가 번역하여 책으로 발간했다. 그 중 고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 판을 읽었는데, 범우사 출판사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처음 발행한 것이 1986 11월이니 30년 전의 작품인 셈이다. 일부러 범우사 출판사의 책을 읽은 이유는, 민음사에서 같은 책을 번역한 김연경 번역가가 고등학생 때 이 김학수 번역본을 읽고 자랐다는 말 때문이었다. 번역가의 번역가가 번역한 책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손으로는 작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번역가의 손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났음에도 우리는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추신2.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함께 2018년의 책 읽기가 조금씩 끝을 향하고 있다. 매달 시집, 고전문학, 과학책, 인문학책을 읽는 경향이 정착된 것이 지난 3월이었다. 사놓은 지 2년이 넘어가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자고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매 달 다양한 고전문학을 읽는 시간은, 고전문학이 낡은 것이 아니라 이처럼 현대적이고 생명력이 넘친다는 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부터 <카라마조프의 형제>까지, 러시아 문학에서 시작해서 러시아 문학으로 맺음 지었다.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사실주의 문학에 더 빠져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2019년 책 읽기의 출발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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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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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물리(物理)에 대해 떠올려볼까.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학원을 갔던 게 중2 때였어.  이십 년 전이네. 그 시절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은 대개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과학고를 대비해서 수학과 물리를 공부하는 편이고 다른 하나는 외고를 대비해서 영어만 공부하는 커리큘럼이었지. 나는 첫 번 째 유형의 학원을 다녔는데 (생각해보니 학원 이름이 8학군 학원, 꽤 도전적인 이름이지) 수업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옆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느꼈던 에너지는 생생하단다. 중학생이라고 해도 잠시 뒤면 고등학생이 될 녀석들인데 과학고에 갈 법한 친구들은 이미 생기 넘치는 총명함으로 가득했거든. 머리 속에는 온갖 공식과 해법을 외우고 있었고, 벽에 걸린 나무판에 손바닥으로 직각의 방향으로 힘을 가할 때 나무판에 가해지는 장력의 크기를 정확하게 구하는 아이들이었지. 경이로웠단다. 물리란 천재의 과목이었어.

과학고를 준비하던 아이들로부터 느껴지던 알 수 없는 에너지 ...... 그 아이들의 몸으로부터 아주 작고 가느다란 용수철이 발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그걸 단지 머리 속의 느낌이라고 웃어 넘길 수만은 없을 것 같아. 물리 문제를 풀던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아주 가는 용수철이 떨리면서 그들에게서 뻗어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았거든. 그들은 정지된 질량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끝없이 떨고 있는 진동의 근원지이기도 했어.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지.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수천 년 동안 한자리에 말없이 서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떨고 있다 ......> 모든 것은 떨고 있고, 모든 사물은 진동이라는 책의 첫 머리를 읽으며 내 마음도 함께 진동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때 8학군 학원에서 목격했던 천재의 진동은 결코 거짓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었어.

이어 이 책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수를 갖는다. 당신 주위에 있는 책상, 자동차, 유리잔 모두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물체의 고유진동수로 그 물체에 진동을 가하면 진동이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것을 ‘공명(共鳴)’이라 한다>나도, 수경이도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지만 각자의 진동은 서로 형태와 움직임이 달라서 차이가 생겨나고 서로 다른 존재로 뻗어나가게 되지. 서로 다른 존재, 그건 위상 수학의 개념과 같을 거야. 위상수학에 따르면 야구공은 접시와 같지만 가운데가 뚫린 도넛과는 전혀 다르지. 다시 말하면 야구공은 절대 도넛이 될 수 없는 거야. 살아가며 몸무게가 늘거나 빠질 수도 있고, 가치관 역시 조금씩 바뀔 수도 있고, 生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이기 위한 고유한 진동은 마지막까지 변함없겠지. 바로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나만의 리듬, 나만의 감각, 나만의 주파수를 잃지 않기 위해 끈질기게 사투하는 것인지도 몰라.

그런데 말이야, 이어 이 책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우리 자신을 김수영 시인이 말한 팽이에 비유해볼까. 내가 하나의 팽이라면 나는 고유한 리듬으로 진동하면서 계속 땅 위에 서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겠지. 하지만 떨고 있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야. 내 주위에는 나와 같은 60억 개의 팽이, 그리고 모든 생명과 에너지로 범위를 넓혀가면 무한대의 팽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을 것인데 빠르거나 느리거나 서로의 방향과 회전을 인정하며 어느 하나가 쉽게 멈춤을 중단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태도. 그리고 언제든지 누군가를 위해 충분히 울어줄 수 있는 아주 손쉬운 사람이 되자는 것 ......  그런 태도를 소중히 가꾸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겪는 현실은 점차 타인에게 공명(共鳴)하는 삶에 가까워지게 될 거야.

물리에 대해 떠올려보자고 했지. 물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흔한 방정식, 원리를 말하지 않은 건, 물리(物理)란 모든 사물의 이치라는 뜻 때문이었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물은 저마다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고유한 진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동시에 고유한 진동이 만들어내는 삶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해. 세밀하게 파고 들면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며 나의 주파수와 정확히 같은 사람이 없어 보이지만, 나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무수한 내가 모여 우리 모두는 보편의 세계 속에서 보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란다고 말했지. 은하수를 여행하는 문과생이 바라본 물리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고 평범하게 이해 될 수 있는 보편의 언어였어. 누구나 고유하고 특별해지고 싶겠지. 그러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될 수 있다는 건 어려운 것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보편적인 것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고 싶었어. ▨


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너는

이 노래를 듣고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할까, 조금은

- <보편적인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 1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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