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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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다사다난했던 2020년. 올 해로 과장 3년차가 되었고 2010년부터 시작된 직장 생활도 만 11년이 되었다. 아직 Junior였던 사원 무렵이 생각난다. 그때는 내가 직장인으로서의 소명 의식도 높지 않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는 자부심도 없었고,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의식, 누군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느낌 역시 희박했을 때였다. 무엇보다 어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시절이 그립다. 항상 좋았다는 이상한 그리움이 피어난다. 돌아보면 우리 팀에 특출나게 잘 하는 (소위 에이스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재능과 열정을 비교하고 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했고 조화롭게 지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같은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공선(Public Good)이랄까? 그런 것이 존중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들과 일했던 그 순간이 참 마음이 편했고, 마음이 편했던 그 시절을 늘 그리워한다. 능력과 인정과 성공이라는 것에 눈을 뜨고 일하고 있는 요즘 더 그 시절이 그립다. 아마 2013년 무렵인 것 같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은 여러 의미로 아주 각별히 내 마음 여러 곳을 쓸어내렸다. 마 교수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조금 뒤에야 그의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 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으며 아주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옳은 것을 믿는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옳음을 강제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정말 좋았다.


오랜만에 그가 펴낸 신작이라 반가웠다. 무엇보다 올 한 해 내가 능력과 인정과 성공이라는 달콤한 덫에 빠져 회사 생활에 몰두했던 터라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묻는 마 교수의 질문이 더없이 날카로웠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이런 것이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 문장을 몇 번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점차 불평등해지기만 한다.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흔히 결과의 평등은 공산주의, 기회의 평등은 그나마 인정할 수 있는 자유주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 자체가 옳은 것인지 돌아본다. "야 너도 노력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에 가서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어. 그건 네가 당연히 얻어야 할 몫이야. 그러니까 야 너도 능력만 갖추면 할 수 있어 우리처럼 나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루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위너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틀을 깨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야너두'와 '야나두' 중에 뭐가 더 폭력일까? 너도 노력하면 나처럼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내려다보는 것과 (야너두), 나도 노력하면 저곳까지 갈 수 있다고 희망을 품은 채 올려다보는 것 (야나두)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자산 규모로 국내 3위의 그룹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나의 이 감정은 위선인가 아니면 뒤늦은 자각인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오랜 생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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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황제 J. P. 모건
진 스트라우스 지음, 강남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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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모 선배가 "금융시장을 이해하고 싶다면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존 피어폰트 모건의 자서전을 읽었다. 사실은 모 선배 역시 모 선배의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었지만. (정작 나의 모 선배는 나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도, 본인은 아직 읽지 않았다고 함)


1,2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요약하면 J.P.모건은 런던에서 금융가로 활동하던 모건 가의 금수저로 태어나 응당 그래야 할 필요성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위기를 막기 위해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을 최대한 활용했던, 그러니까 금융황제로서의 밥벌이를 아주 충실하게 하다간 위인이었다. 중요한 키워드는 "응당 그래야 할 필요성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는 대목이다. 경제적 부를 소유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꼭 그 경제적 자유를 공공선을 위한 방향으로 쓸 책임은 없다. 매일 쇼핑을 하며 예술품이나 모으고 감상하며 즐거운 개인의 삶을 살아도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그렇지만 이 책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건, J.P.모건은 그럴 책임이 없었음에도 기꺼이 시장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경제적 책임을 자각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등장한 "도덕적 지배" 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편하게 살기 원한다면 가진 돈을 펑펑 쓰며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신흥 국가가 남북내전을 이겨내고 강한 국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세상과 인류의 발전을 위해 가진 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했던 것, 그것이 금수저가 믿었던 도덕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다만 착한 사람 행세는 하지 않는다. 더 강하고 무섭게 다그치고 최고의 지위를 향해 달려간다. 최고가 되어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가 되려는 세속적인 욕망이 있다. 현실적이다. 때문에 "도덕적 지배" 라는 말이야말로 존 피어폰트 모건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J.P.모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다양한 산업에서 강력한 트러스트(Trust)를 구성했다. 트러스트는 요즘의 재벌 기업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강력한 단일 Entity를 의미한다. 철강은 US스틸, 철도는 노던 시큐리티스, 해운은 IMM(International Marcantile Marine)이라는 강력한 트러스트 설립을 주도하며 금융 제국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20세기 초에 독점을 규제하는 셔먼법이 입법된 뒤로 모건 제국을 둘러싼 바람의 방향이 정 반대로 바뀌게 된다는 거다. 독점적 기업 결합으로 성공한 그에게 독점은 위법이니 결합을 해체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독점으로 흥한 자 독점으로 망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다니는 그룹의 오너 일가 중 어떤 한 분이 "순풍 속에서 장사해야 한다" 라는 말을 얼마 전 구성원에게 남겼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또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바람이 바뀔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지금까지 성공 방정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응 아니야 라고 부정 당하면, 지금까지의 순풍은 역풍으로 바뀌는 것인데 그러면 바뀐 바람 방향을 따라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참고 견뎌야 하는걸까? 바람의 변화가 일시적인지 영속적인지 그 시점을 통과하며 직접 따지기란 쉽지 않다. 뒤늦게, 멀리서 바라봐야 비로소 보일 뿐이다.


J.P. 모건은 순풍 속에서 때로는 순풍을 직접 만들어내며 강력한 제국을 만들었다. 세기가 바뀌고 순풍이 역풍으로 바뀌었을 때 그는 늙어 있었고 강력한 제국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의 <도덕적 지배>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된다.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도 아니고, 시대를 불문하여 절대적으로 옳은 도덕이라는 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긍휼히 여겨라, 거짓말 하지 마라, 다른 이를 사랑으로 대하라 ...... 이 정도의 보편적 윤리란 그리 많지 않다. 약 100년 전에 J.P. 모건이 믿은 윤리란 <시장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가장 강력한 기업 결합체를 결성하고 금융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이것 아니었나 싶다. 금수저로 태어나 돈의 권력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믿은 이 사람의 가치관은 아주 흥미로웠다. 적어도 그가 믿은 가치관이 도덕으로 통용되던 시대가 있었던 거다.


모건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도회사의 증권이 모두 우량한 것은 아닙니다.

언터마이어 : 그렇다고 철도회사의 증권을 인수한 투자은행이 채권의 가치를 법적으로는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모건 : 투자은행이 책임지지 않습니다만, 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질문하시는 분이 살아 있는 한 보호되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을 집니다.


언터마이어 : (아주 냉소적인 어투로) 도덕적 책임이 돈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죠?

모건 : (투자자에게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며) 도덕적 책임은 돈이 됩니다. 회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다시 설립되어 채권을 발행합니다. 투자자들은 원금과 이자를 받습니다.


- J.P.모건이 증인으로 소환되어 독점적 기업 결합에 대해 해명해야 했던 1912년 '푸조 청문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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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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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여러 가설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원시 수프> 가설이 있다. 지구 상에 존재했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은 수많은 무기물이 뒤섞인 원시 수프와 같은 형태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인데, 무기물이 유기물로 진화하고 유기물이 형태를 지닌 생명으로 진화한다는 상상이다. 심연의 청색 혹은 아직 빅뱅의 열기가 식지 않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적색의 바닷속에 DNA 형태로 끝없이 부유하고 헤엄치는 무수한 무기질과 유기질들. 어느 것이 어떻게 진화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질료(質料)로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생명의 기원이 될 가능성을 모아둔 거대하고 총체적인 집합체가 있고, 그 집합체에서 꺼내어진 개별적인 존재가 생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합과 개별이 있는데,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는 것은 개별이지만 결국 개별은 집합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생명 이전에 생명으로 넘실거리는 거대한 '집합'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무엇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응집된 ......

2013년 악동뮤지션으로 데뷔하고 올해 9월 정규 3집 앨범을 발표한 이찬혁 작가의 <물 만난 물고기>를 읽으며, 소설 속 군상들은 거대한 원시 수프 위를 항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주 흐뭇한 생각이었다. 악동뮤지션 시절에 톡톡 튀는 노래와 가사로 주목받았던 그였지만 그런 재기발랄함은 동시에 저것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할까? 이런 의문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9월에 발매한 정규 음악 앨범과 그 앨범의 예술적 기원이 되었던 이 소설을 교차하며 동시에 읽어보니 그런 의문은 점차 기우에 가까워진다는 확신이 든다. 악뮤라는 음악가 내면에는 조용하고 깊숙하게 흐르는 예술의 원시 수프가 흐르고 있다. 그 원시 수프로부터 꺼내어진 것이 어떤 예술로 진화해 갈 것인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음악으로 어떤 경우에는 이처럼 텍스트로 표현될 것이니, 그렇게 보면 이들이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을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전혀 놀랍지 않다. 중요한 건 어떤 도구로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흐르는 거대한 예술의 바다니까. 그들은 바다를 지닌 예술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노래만 잘해도 가수는 될 수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해."> 노래를 잘하는 가수. 그걸 생명을 지닌 개별의 존재라고 생각해보자. 반면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 그건 표현해야 할 것이 있는 무언가를 끝없이 보유한, 집합의 존재에 가깝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름답고 위대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그것이 태동한 예술인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의 위대함이 어떤 묶음에서 풀려나와 밖으로 던져진 것인지 그 기원을 궁금해해야 한다. 그 궁금함에 언제나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한다. 아마 저 문장은 이찬혁 작가의 자기 선언문이라고 봐도 좋겠다. 어떤 음악 색채를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끝없이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바다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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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그림책 - 우리는 그림책을 함께 읽는다
황유진 지음 / 메멘토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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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어른의 뜻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다 자랐다는 것은 언뜻 몸이 다 성장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키가 크고 골격이 벌어지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어느 나이가 되면 조금씩 멈추기 마련이나 정확한 경계선은 찾기 어려웠다. 어제까지는 키와 몸무게가 늘었지만 오늘부터는 성장의 모든 문(門)이 닫힌다, 그런 지점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자란다는 것의 범위를 신체에서 정신으로 넓혔을 때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는 더 심해졌다.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하며 완성된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서른 다섯 해 동안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 정도면 조금은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겠다는 내일을 슬쩍 넘보았던 정도지, 나의 정신은 언제나 불확실했고 불안정했다. 나는 여러 모로 다 자라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 다음의 문장.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그 문장까지는 차마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이것이 어른이 마주한 어른의 정의였다.

<그림책>. 역시 사전에서는 <그림을 모아 놓은 책 또는 어린이를 위하여 주로 그림으로 꾸민 책> 이라고 그림책을 정의한다. 그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그림을 모아 놓고 그림으로 꾸민 책, 맞다. 그러나 어린이를 위하여 그림책이 쓰인다는 건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네 살 딸 아이는 잠들기 전 항상 다섯 권의 그림책을 읽고 잔다. 기분이 내키면 몇 권 더 읽고 잠에 든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 때로는 엎드려 그림책을 읽다 보면 옆에 아이는 블랙홀처럼 사라지고 없고 나와 그림책만이 존재하는 묘한 경험을 종종 한다. <고함쟁이 엄마>에서 엄마가 아이를 혼내고 그 아이의 몸을 실로 꿰매어 붙일 때, <그러던 어느 날>에서 주인공이 옷을 모두 벗고 식물과 일체감을 느낄 때, <알사탕>에서 동동이가 할머니와 풍선껌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 그 순간의 그림책은 어린이가 아닌 나에게 연결되어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 어딘가의 과장이라는 정의와 함께 서른 다섯 살이라는 데모그라픽한 정의가 내게 투영되었지만 가끔 그림책을 읽을 때는 그런 정의들이 모두 씻겨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어려지는 것 같았다.

<어른의 그림책>. 사전적으로 구현된 정의와 실제 현실에서의 온도가 이토록 간극이 큰 두 단어가 만났을 때, 그건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솔직한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결코 다 자란 적이 없었고 어쩌면 다 자란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책 짧은 生을 마감할 것이라고.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위치한 존재이고, 어른은 바로 자신이 끊임없이 불확실함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소년(少年)임을 자각한 존재라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정신 속에 그처럼 위험하고 제어 불가능했던 소년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주 가끔은 그림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잊고 있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고,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것을 아주 조금은 자각하게 될 거다. 작가는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가 대학에서 시를 읽고 썼고 대기업에서 10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두 아이를 낳고 지금은 어른들과 그림책을 함께 읽는다. 이 숨가쁜 여정만으로도 다 자란 삶이란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내 안에는 소년이 살고 있다. 그림책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것을 다시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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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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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나날이다. 출근 전 확인했던 뉴스에서는 오늘 서울 아침 기온이 -6도라고 했지만 체감 온도는 그것보다 더 추웠던 2월 어느 날 아침. 광화문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5분 남짓 시간 동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단다. 커피를 주문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는구나. 언뜻 봐도 가로 세로 각 5~6미터가 넘어 보이는 대형 그림이었는데 머리카락부터 눈썹, 얼굴 색, 입술, 손가락까지 모든 것이 파란색으로 채색된 여자의 초상화였어. 그림 속 여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시선을 정면으로 던지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파란 가운데 눈동자만큼은 하얗게 빛나고 있어서 그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돌릴 수가 없었단다. 생각해 보렴. 내 눈 한 가득 보이는 파란색의 얼굴, 그리고 나를 주시하며 내려다 보고 있는 커다란 눈동자. 나는 같이 앉아있던 아내에게 이건 꼭 <1984년> 소설에 나오는 빅브라더(Big Brother) 같은데, 라며 함께 웃고 말았어. 그리고는 이내 섬뜩해졌지. 커피숍을 떠날 때까지 내게 달라 붙었던 시선의 섬뜩함 ......

문학이라는 것이 세대를 건너 독자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인물을 단 한 명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조금은 성공한 셈 아닐까. 이런 인물의 존재감이란 너무나 선명해서 단지 작품 속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어딘가에 실제 살아 숨쉬는 것 아닐까 착각을 하게 하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 <롤리타>의 롤리타, <면도날>의 래리 ...... <1984년>의 빅브라더도 분명 그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아. 텔레스크린을 통해 우리들의 모든 순간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수집되어 빅브라더에게 향하고 있다는 설정은 섬뜩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매력적인 세계관이었어. 이 세상 어디에도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어 모두는 늘 자기 검열을 하느라 바쁘지. 이 매력적인 섬뜩함은 <1984년> 발표 이후 많은 매체를 통해 현실 세계에 빗대어 늘 환기되고 재생산되었던 것 같아. 확실히 빅브라더는 <1984년>에게 아주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했어. 빅브라더, 사람의 움직임을 쫓아 눈이 함께 움직이는 그의 커다란 포스터, 소리와 행동을 자발적으로 검열해야 했던 시민들의 모습은 <1984년>를 관통하는 첫 번째 메타포, <감시>를 상징하고 있어. <감시>라는 단어로, 이 책은 문을 열었단다.

그러나 미셸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을 떠올린다면, <1984년>은 <감시>로 시작해서 조금씩 <감시> 이후의 <처벌>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구조를 갖고 있었어. 작품 전체를 관통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이것이었단다. “구전제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 (p297) The command of the old despotisms was “Thou shalt not”. The command of the totalitarians was “Thou shalt”. Our command is “THOU ART” 주인공 윈스턴은 빅브라더의 눈을 이리저리 피해 세계의 틈을 넓혀 나가다가 끝내 감시망에 걸려 처벌을 받게 되지. 그때 당을 대변하는 오브라이언이 원하는 건 윈스턴이 겉으로 굴복하고 당의 방침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어. 당의 말은 언제나 옳은 것이며, 이들이 진심으로 빅브라더를 사랑하도록 그들의 마음은 뿌리부터 전면적으로 개조되어야 했어. 어떤 것을 해야 하거나 또는 어떤 것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할 것 자체가 태생적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그들의 몸과 정신은 빅 브라더를 향해 완전히 예속되어야 하는 것 ...... 그러니까 빅브라더의 <처벌>이란 이 세상에 더 이상 감시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도록, 모든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 아니었을까. 감시하여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할 것이 없도록 처벌하는 것 말이야.

 

 

그렇다면 <1984>에서 말하는 건 빅브라더와 같은 전체주의적 국가, 전체주의적 존재에 대한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끊임없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시와, 창문 하나 없는 101호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처벌.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건 <자유의 종말>, 그것도 신체와 정신 모든 측면에서 자유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어. 이 작품이 반(反)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걸 떠올려 보자. 자유가 완전하게 종말을 맞이한 지점이 반(反)유토피아라면, 유토피아란 우리의 자유를 통제하는 조건 – 끊임없는 감시,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의 강제화 – 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점을 의미하겠지. 여기서 두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들었어. 우선 유토피아(Utopia)란 말의 어원을 보면 그리스어 topos(장소)와 ou(부정)가 조합된 단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라고 하지. 어디에도 없는 곳 ...... 자유의 끝이 유토피아라면,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 모든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일까, 조지 오웰은 그런 지점엔 끝내 도달할 수 없을 거라고 예견했던 것인지도 몰라.

더 흥미로웠던 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Condition에 대한 거였어. 독재, 국정농단, 감찰, 사법농단, 블랙리스트, 억압, 방송출연금지 이런 단어들이 최근 몇 년 간 거리를 배회하며 <1984년>이 현실로 도래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져갔던 것을 기억한단다. 그때 우리들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훼방 놓는 세력에 대한 것이었지. 나를 구속하는 너희들. 그러니까 우리의 자유를 예속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타자였어. 이 말은 분명 맞아.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어딘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신체와 정신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외부의 타자도 그리고 내부의 자아도 모두 자유로움을 진실되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하겠지. 즉, 나는 예속 없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싶다는 희망의 무게만큼이나, 동시에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의지가 있는지 ...... 어떤 질문의 끝은 나 자신을 가리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걸 생각하면 아침에 보았던, 커피숍의 커다란 눈동자의 눈빛을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 그 여자의 섬뜩한 눈빛은 당신을 감시하고 통제하겠다는 눈빛이 아니라, 당신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을 쫓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눈빛이라고.

당신은 타자(他者)의 여집합에서 자유를 수집하려 했던 것인지를 묻고 있는 눈빛이라고,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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