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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리뷰대회] 폴 윤의 단편소설집 『벌집과 꿀』은 길을 잃고 헤매는 이들의 삶을 조용하지만 깊은 시선으로 담아낸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서, 그는 한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세계적인 보편성을 동시에 품은 인물들을 무심한 듯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낯선 곳에 내던져져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너진 삶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이 있다. 각기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곱 편의 이야기들은, 안식을 찾아 나서는 방랑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외로움이라는 공통된 정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전쟁과 이산, 탈북, 강제 이주 등의 역사적 격랑 속에서 떠밀려온 존재들이다. 누군가는 감옥에서 나와 낯선 마을에 정착하려 하고, 누군가는 외국의 거리에서 생계를 위해 청소를 하며 살아간다. 또 다른 이들은 오래전부터 소속되지 못한 채 이방인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어떤 드라마틱한 결말을 향해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그날의 생존과 감정에 충실하며,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정체성을 끌어안고 묵묵히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속하지 못한 자’들이 겪는 고립감과 단절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에 조용히 공감하게 한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그 정서의 깊이를 전달하는 작가의 문체에 있다. 폴 윤의 문장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길고 장황한 설명 없이, 감정의 결을 조심스레 따라가는 문장은 시처럼 응축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말없이 건네는 그리움, 침묵 속의 애틋함, 잊힌 기억의 조각들이 짧은 문장 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가 서서히 벽을 타고 흐르듯 가슴 깊은 곳에 이른다. 그의 글은 소리치지 않지만,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설명이 없는 대신 여운이 있고, 여운은 독자의 몫이 되어 오랜 시간 머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떠나고, 잃고, 무너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서로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낯선 이들에게 조용히 손을 내미는 장면들, 아무 이유 없이 건네는 작은 친절은 이 소설의 세계를 따스하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시나마 집이 되어주는 순간들은, 위로와 회복이 반드시 거창한 사건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살아남는다는 것, 견딘다는 것, 그리고 이따금 다정하다는 것은 어떤 의지라기보다는 인간의 본능이며, 가장 순수한 사랑의 방식이다.
『벌집과 꿀』은 하나의 민족적 역사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곧 모든 현대인의 이야기이며,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상실과 고독에 대해 말한다. 그 속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계속 걷게 하는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 물음은 문득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물음 속에서, 우리는 희미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얻게 된다.
이 소설집을 덮은 뒤에도 마음 한편이 오래도록 젖어 있는 이유는, 단지 인물들의 고통에 공감해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삶 역시 언제든 어딘가에 닿지 못한 채 떠돌 수 있다는 불안,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희망이 이 이야기들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폴 윤은 복잡한 세계의 경계에 선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쉽게 잊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끄집어낸다. 사람은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소속되지 못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삶은 존엄할 수 있는가. 『벌집과 꿀』은 이 질문들에 정답 대신 조용한 문장들을 남기며, 긴 여운 속에 독자를 깊은 사유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