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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없는 나라
양 얼처 나무.크리스틴 매튜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또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웬만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생들과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면 나는 이런 얘기를 자주 한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이나 양미인곡에서 느끼하다시피한 왕에 대한 지독한 아부를 보면서 아이들이 헛구역질을 할 때도. 또는 허균이나 박지원 작품을 대할 때도.
그러면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정철은 절대 아부꾼이 아니다. 봉건제도 하에서 살면서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불가능하다. 특히 한 시대의 사회 경제적, 문화적 제도를 넘어서서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왕 = 국가'이다. 근대 민족국가의 탄생 이래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아직도 '애국'이 절대적인 '선(善)'이듯이. 한 시대의 가치관을 넘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는 아름다운 책이다. 우리에게 시공간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책을 통해, 혹은 무수한 소통의 그물망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근대문명의 업적 가운데 몇 안되는 긍정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끝없는 다양함을 접하게 해준다는 것.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이 책의 서술자는 철없는 젊은 여성이다. 갓 접한 상업문화에 달뜨고 자본의 세속적 달콤함을 추구하는 소녀이다. 그러나 그녀를 길러낸 땅과 피는 한없이 놀라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를 얽매는 가장 핵심적인 틀이 '국가'와 '가족'이라면, 그 가운데 더욱 밀착적이고 더욱 사적이며 또한 매우 복잡하고도 원초적인 '가족'에 대한 대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이 형성되며, 어머니와 그의 자녀들, 손자 손녀들, 그리고 외삼촌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매우 따뜻하며 화목하고 부르럽다. '방문혼'이라는 특별한 혼인제도는 어찌 보면 혼인 제도의 가장 고급화된 이상적인 형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양 얼처 나무를 길러낸 모쒀족 남녀는 일부일처제를 고집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사랑을 서로의 완전한 합의 아래 언제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길러내는 일을 내가 본 어떤 문화보다도 가장 건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매우 축복받은 신성한 일이었다. 다산은 장려되었고, 모두 유능하게 노동하고 생산했으며, 그것을 나누었다. 질투나 분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마을의 승려(정신적 지도자)가 되거나 대상이 되어 바깥 세상과 거래하고, 목축을 했다. 물론 가족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좋아하는 헐리우드 배우가 쓴 통속적인 연애 소설에 빠져서 요즘 몇 권을 읽었다. 유럽과 미국의 연애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섹스에 대한 끝없는 허기'라고나 할까. 이런 문화 속에서 일부일처제란 결혼 제도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은? 한국에서의 결혼제도에 대해서는 훨씬 더 회의적이다. 나는 수없이 불행한 가정을 목격했고, 혹은 대외적으로 행복한 가정 속에서 개인적으로 불행한 개인들도 보았으며, 혹은 그 가족이 만들어내는 이기주의가 사회 전체를 불의로 몰아가는 것을 보았다.
모쒀족 남자들이 가족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것은 평화와 유대, 효율적인 사랑이었다. 평생 한 사람을 정해 놓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정말 합리적인가. 물론 사랑은 배타적인 것일 수 있다.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상대방과 누릴 수 있는 '신뢰'의 최대치를 누리며, 지상에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마주선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평생의 소소한 일상의 구속과 요구를 감당할 만한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크리스틴 매튜의 후기에서 다음 구절이 내게 남았다.
그런데 모쒀족은 독특한 문화적 선택을 했다. 그들은 성적인 자유와 사랑, 경제적인 안정과 혈통 유지,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결혼제도를 폐기했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본질들(음식과 애정, 재산, 그리고 가계 등)이 모계의 유대감이라는 더없이 명백한 사실을 통해 천부의 권리로 주어지는 사회를 성취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가족의 연속성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이런 방식에서 충만함을 느낀다는 것인데, 자손의 보존이라는 부담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누이가 있는 모쒀 집안은 다음 세대가 거의 보장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 한 시대와 사회, 자신이 접했던 모든 삶의 틀을 넘어서는 상상력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다. 더욱이 이 책은 정말 재미있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