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아닌 동물이 획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 색깔이 검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멋대로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를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방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설령 다리의 숫자, 피부에 융모가 있는지의 여부, 또는 천골의 끝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차이가 감각을 느낄 있는 존재의 고통을 방관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겠는가? 이성 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담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인가? 하지만 완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난아기 또는 태어난 지 일 주일이나 한 달이 지난 아이보다도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 비해 그들과 훨씬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제는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또는 대화를 나눌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