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휴가 - 천천히 머물며 그려낸 여행의 순간들
배현선 지음 / 앨리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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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지나온 사람은 어딘가 변하기 마련이다, 공간이 변하면 사람도 삶도 변한다.


여행다녀온 후 어딘지 허탈한 사람에게,

뭔가 '얻어야'한다는 생각으로 떠나 소득없이 돌아올 것 같은 두려움에 짓눌린 사람에게

여행이 거창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런 사람에게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온다는 말을 덧붙여,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2001년 부산여행이다. 여행이라는 게 명소나 맛집을 들러 사진찍고 또 곧바로 다음 장소로 떠나는 거라고들 할 때, 그래서 우리는 이 여행에 여행이라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부산을 향해 떠났다. 심야버스를 타고 밤 열두시에 출발해서 자다 깨다 반복하다 눈을 뜨니 해운대 근처였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고 해뜨는 곳이 물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어느 때보다 성실하게 일상을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하고, 대충 반찬을 만들어 가져온 김치와 먹고, 한약 달이듯 커피를 내려먹고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을 주었다. 해변에 줄지어 있는 다른 호텔과 리조트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달맞이곶까지 걷기도 했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왔다. 돌아와서 다시 새 밥을 지어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저녁에는 패밀리레스토랑에 가거나, 시장에 가서 성의껏 음식을 골라 사먹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하던 서버의 부산억양이, 되돌아오는 우리 말을 들은 후에는 반드시 표준어 억양으로 변하는 것이 신기했다.

돌아간 후 친구는 어딘가 변했다. 나는 여전히 그랬다. 여행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지만, 나는 얼마나 더 깨뜨려야 변하는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얼마나 떠났다 돌아와야 정신차리고 열심히, 시간과 돈 낭비를 하지 않고 살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아니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그 해 부산을 떠올렸다. 겨울. 냄새. 갈매기. 커피. 콘도. 밥솥. 온통 냄새와 바람과 모래알과 갈매기 소리로 덮인 날들.

이 책은 파리, 도쿄, 치앙마이, 교토를 여행한,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의 여행기이다. 장소와 음식, 대기와 분위기-음악과 냄새를 포함-에 대한 짧은 소회와, 같이 한 사람에 대한 애정, 에 관한 일기. 각 도시 일기가 끝나면 그곳에서 들었던 음악, 음식, 거리 풍경, 득템한 물건 사진 등이 실려있다. 중간중간 부드러운 터치의 그림은, 글 못지 않게 작가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도록 한다. 부드럽고, 몰캉한 푸딩같은 책.

책을 읽고서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학교 담장 아래 가득한 낙엽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밟아보았다. 일부러 은행나무길 쪽으로 돌아서 운전하다 아이와 함께 내려 낙엽과 아이가 재잘대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은 많았고 나는 느려졌다. 왜 일부러 걷냐는 물음에 우린 지금 여행 중이야! 하고 대답했다.

오늘부터 휴가, 라는 말에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휴식이 있다. 여행은 고난이 아니라 쉼이라는 작가의 주장이 보인다. 명소마다 들러 눈도장찍고 정보를 얻는 여행도 나름 즐겁겠으나, 아마 그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이런 제목의 책을 들지 않겠지. 다른 방식의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교화(?)하는 글은 아닌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읽고 또 공감하며 다시 작가와 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돌아온다. 조금 변한다. 나만이 아는 방식으로.

공간은 삶을 변하게 하고, 습관과 취향을 새로이 발견하는 것은 작은 변화의 시작이다. 나도 아주 조금은 변하고 싶어진다. 살아가고 싶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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