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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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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대히트중의 대히트를 쳤을 때
그 6권이라는 장대함 때문인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베스트셀러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둘 다 였는지 모르겠으나 어찌된 연유인지 쉽게 '개미'라는 책에 손이 가지 않았드랬다. 지금도 가끔가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곤 한다. "아니 개미를 안 읽었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개미에 대해 너무 많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냥 그런 우리나라에서 기이하게 인기 많은 작가(수려한 외모가 한몫 했으리라!)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정도로 여기었었다. 그러나 주위에 광적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팬인 사람 덕택에 '타나토노트' 라는 이름도 알쏭달쏭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순전히 강제적인 측면이었다!).

1. 죽음에 대한 동경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고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본다. 나는 7살 때 '나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명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못 푸는 문제를 7살짜리가 뭘 알겠다고...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인 채 머릿속에서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얼마 후 석가모니의 위인전을 읽었는데, 석가모니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 심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면서 나는 내가 고민해오던 해답을 찾을 것만 같은 충만한 기대로 한 장 한 장을 넘겨나갔다. 그러나, 거기에 나와있는 답은 "석가는 결국 깨달았다! 이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해탈하였다!" 하니 뭘 깨달았나?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민의 답은 무엇이던가! 결국, 그냥 석가는 뭔지 모르겠지만 깨달았고, 나는 깨닫지도 못한 채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지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냥 누군가의 유전자를 간직한 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해 탄생되고 진화된 '인간' 일 뿐이라는 결론을 이르렀다. 그렇다면 죽으면? 물리적으로 죽으면 끝이다. 윤회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해왔다. 왜냐,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고민은 7살 때 심각하게 해본 걸로 충분하니까.

2. 죽음에 대한 상기
묻어두었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낸 이 책은 죽음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주인공들이 죽음을 위해 탐사하는 내용이다. 죽음을 탐사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시작된 이 영계 탐사는 그야말로 상상력의 풍부함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집착과 탐구는 어렸을 적 호기심을 다시금 상기시켰고, 그에 대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식 결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결말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간에 천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을 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에 동화되게 된다. 이건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 기반한 과학적 분석을 갖추면서 특징 없는 주인공의 관찰태도 중심의 기술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혹은 동, 서양의 철학들을 아우르는 베르베르의 인생관이 매력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매트릭스 혹은 유체이탈
이상하게 그들의 영계탐사 과정이 매트릭스를 보는 듯했다. 신체는 누워있고, 정신(영혼이라 불리는) 은 다른 곳을 탐사하고 있다. 마치, 신체는 갇혀있고 이미지를 머릿속에 입력하여 다른 차원에서 행동하는 매트리스 주인공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달마 대사의 유체이탈 만큼 엄청난 것이 또 있으랴! 솔직히 나는 눈에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주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하나의 전설이나 설화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진지하게 소설의 주된 장치로 이용하는 베르베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몸은 그대로요, 마음은 블랙홀까지 갔다온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체이탈 자체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4. 신비주의?
베르나르 베르베르같은 서양인이 보기에 동양사상은 정말 환상의 영역인가보다. 우리야 워낙에 서양사상에 익숙해지고 동양사상은 생활 속에서 많이 접하든 터라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새롭다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쪽 고대사상들이 새롭다고 해야하나. 베르베르는 전 세계의 죽음에 관한 설화들을 집대성 한 듯 보인다. 그러한 방대한 설화들과 전설들은 이 '죽음' 탐사를 받쳐주는 하나의 가설이며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라마교의 교리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원래 라마교 신자인지 아닌지 모르나 주 핵심이 되는 원동력은 라마교의 정신세계이다. 물론, 유대교 랍비 역시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랍비 프레디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기 보다는 스스로 가르침을 터득한 이처럼 보이고, 라마교 신자 스테파니아는 라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표현한다. 아마, 라마교의 유체이탈 가설이 없이 이 소설의 전개는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5. 전체와 부분간의 상호 연관관계
네 명의 탐사 대원 중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인간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는 하나, 모두들 그러한 불안정성을 '죽음' 탐사로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나서 우리 세계는 변한다. 죽음이 알려지고 나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종교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등 모든 폐해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들어 난다. 그런 전체적인 구조의 모순과 문제점들과 동시에 탐사 대원들에게도
불 완전성이 심하게 드러난다. 객체와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그들은 전체의 변화에 따라 하나씩 변해간다. 그것은 스테파니아의 입을 빌러 표현된다. "이렇게 무미하고 따분한 세상 속에서는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너무나 역동적인 이 세계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특히나, 하루가 다르게 쇼킹한 뉴스로 신문을 가득 채우는 우리나라에 와서 산다면 오히려 무미건조한 평화로운 상태를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역동적인 변화로 인해 그래 세상은 이런 맛이야! 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럭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미세한 인간일 따름이다(도교주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변화되기보다는 여타 주변의 것들,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던 싫던 간에 우리 주변의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 브레송 처럼 모든 문을 쳐 닫고 살수는 없는 것이다.

6. 선과 악은 공존한다.
선과 악은 양면성이다. 이만큼 멋있는 명제가 또 있을까! 언제나 늘 주장하지만, 가장 악한 사람이 가장 선할 수 있고,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악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에는 절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이 천사가 될 수 있고, 천사가 사탄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선과 악의 공존은 스테파니아의 공격적인 테러로 이어진다. 선이 있기에 악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기에 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7. 기억에 대한 강박관념
인간은 누구나 안 좋은 기억을 은밀하게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누구에 의해서도 공개되길 원하지 않은 기억. 그런 기억은 자기만 꼭꼭 숨겨서 간직되길 원하고, 가능한 지워지길 원한다. 그런 기억은 그러나 때때로 예고 없이 훌쩍 나타나서는 공연히 우울함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사라진다. 그런 안 좋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돌진한다면? 아마 엄청난 혼란과 괴로움을 안겨다 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보이지 않게 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런 기억에 대한 공포를 우리는 언젠가는 맞딱드리게 되는가보다. 베르베르도 이런 인간의 보이지 않은 불안심리를 영계의 세계를 통해 표현해 주고 있다. 공포는 내 안에 있도다 라는 스쳐 지나가는 문구를 되새기게 해준다. 어쩌면 자아의 번뇌 역시 내 속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이거 역시 불교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 같다.

8. 씁쓸한 자본주의
천국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천사들은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인간을 고용하지만 인간들은 돈을 받고 그들의 장부를 마음대로 조작한다. 결국, 돈 많은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면죄부가 생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 현실이 사실상 그러하다.
루턴의 종교개혁이 나오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돈을 많이 기부하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종교인사들이 퍼뜨린 말이겠지만..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현실 속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며칠 전 절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돈을 50만원 이상 기부하면 이름을 돌계단에 새겨드립니다. 라고 써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50만원 기부한 사람은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다. 나는 부처님께 이만큼 돈을 기부했으니까 극락을 보장해주시겠지! 라고 마음을 먹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돈을 일정이상 기부하면 이름이라도 새겨주니 대대로 남기라도 하겠지. 이 어찌 루턴의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의 종교양상과 달라진 것이 뭐가 있으랴. 무슨 종교를 해도 기부금은 필수이고, 돈을 많이 기부할수록 대접받는 세상이거늘.

9. 나무가 되리라
인간은 자연과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이를 가장 강하게 믿고 있는 베르베르는 죽으면 나무아래에 묻어달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가장 속물적이었던 뤼생데르 대통령도 나무아래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계 탐사대장격이었던 라울은 환생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 책을 다 덮고 나니, 동물 하나하나 식물 하나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게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힘인 가보다. 지극히 단순한 명제인 자연과 인간은 공존한다를 이렇게 환상적이고 방대하게 집대성할 수 있다는 능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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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스 가드너, 그곳에 가다
저지 코진스키 / 민예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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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 코진스키라는 사람은 이 책을 읽기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름의 신선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웬지 모르게 읽기 편하지 않을까 싶은가벼운 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지하철 틈틈히 20분씩 삼일만에 해치워버렸다. 그러나!! 책의 길이 만큼 이 책이 가벼운 책인가? 라는 질문에는 부정을 하고 싶다. 또한, 저지 코진스키와의 대화가 뒷편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그 인터뷰들을 보면 저지 코진스키가 얼마나 멋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평생 인생을 tv 만 바라보면서 지내온 인간이 진짜 세상을 만나면서 모든 지식을 tv 에서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1990년도에 나오지 않았나 싶다.(아마존에서 나온 책은 1999년 판이었다. 위에 있는 사진-_-) 지난번에 소개했던 "서바이버" 가 교육체제 속에 갇힌 한 인간이 사회에 어떻게 사회화 되어 가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정 반대로 교육이 전혀 되지 않은 인간. 오로지 tv 속의 이미지로만 주입된 인간이 '진짜' 사회속에서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여준다. 공통점이라면, 두 인물 모두 자신이 주입된 이미지와 교육의 형태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아무것도 교육받지 않은 한 인간이 사회의 최고층에 노출되었을 때, 그것도 최고급 양복과 최고급 가방을 짊어진 채 등장했다면 어떤 식으로 그들과 융합될 수 있을까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가 아는건 오로지 정원뿐이다. 정원에서만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세상은 정원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양 극단은 서로 같은 잣대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여 서로 만난다. 주인공인 초온시 가드너는 tv속 이미지를 대입시켜 실제의 그들을 이미지화시킨다. 반대로 사회 최고층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초온시 가드너의 이미지(부유계층에 엄청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상당한 인텔리 일것이라는) 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대로 해석하려 한다. 이렇게 서로의 서로의 이미지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마디 한마디 하면 척척 착착이다. 초온시가 경제에 대해 묻는 질문에 어눌한 말투로 "정원에서는...봄과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죠..." 라는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 없는 말을 내뱉지만,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경제의 논리를 자연속에 대입시킬 줄 아는 지성인이라고 떠들어댄다. 이 얼마나 웃지못할 상황인가. 이럴때를 일컬어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하지..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씁쓸했던 것은,아무것도 아닌 것을 겉치레로 무장한 이미지로 곱게 포장하려고 하는 상층계층의 우스꽝스러운 행위들보다 내 자신이 tv 키드라는 사실이다. 실로, 나는 가드너마냥 모든 것을 tv 를 통해 얻고 있지는 않지만서도 상당수가 내가 바깥세상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tv 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내가 진정 세상을 나오기 전인 청소년기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대부분은 tv 속 이미지에서 소생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가드너처럼 처음 접하는 세계에서는 내가 tv 속에서 봐왔던 이미지를 총 동원시켜서 이해하려 했던 적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결국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허구들로 가득차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건 그저 내가 만들어낸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주입받는것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든다. 또한,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내가 그렇게 보길 원하는 이미지대로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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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버 메피스토(Mephisto) 9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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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팔라닉 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Fight Club 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이다. 그때도 Fight Club 하면 척 팔라닉 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때의 Fight Club 은 그저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이었을 뿐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이다 라는 점때문에 영화를 보게 된 것이지만, 나중에 그게 소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까무러쳤다. 그만큼, 데이비드 핀쳐 색깔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는 스토리 라인이었던 게다. 그건 폴 오스터처럼 휴머니티적이지 않고, 필립케이딕 처럼 음울한 변형도 아니며, 레이몬드 카버처럼 재기 넘치지도 않는 그 무언가였다.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척 팔라닉의 성난 분출 혹은 몽유병 적인 기질의 발산이었던 게다. 그 이후에 척 팔라닉이라는 이름의 기묘함을 앞으로 한 채, 척 팔라닉의 세계에 흠뻑 빠지려 하였으나, 뭔가 다른 이질적인 감수성으로 그 의도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그리고 이상하게 왠지 척 팔라닉은 Fight Club 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역시도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는 Fight Club을 집어 들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척 팔라닉에 열광할까 하는 해답은 Fight Club 에 다 담겨 있는 듯하였다. 적어도 내가 왜 척 팔라닉을 열광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 읽은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인간은 시계추와 같다. 극과 극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극도의 폭력적인 사람이 그와 반대되는 극도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닐 수 있으며, 천진난만한 사람 역시 극도의 폭력성이 깃들여 있다" 라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인간성 탐구는 시작되었다. 내가 본 저 사람도 시계추처럼 극도로 다른 모습을 지고 있을 지도 모르지..하는 심리감은 그 이후 줄곧 나를 지배해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주아주 악마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지하철을 타건, 버스를 타건, 사람이 꽉꽉 많은 곳에서 나는 이 사람들에게 Fuck you 의 시선을 날려버릴 만한 일을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해본다.(사실 자주 한다-_-) 그 Fuck You 의 시선이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지만.. 왠지 심의에 걸릴 것만 같아서 생략한다 -_-!
아무튼 평상시에 그런 상상을 늘 해왔던 터라(그런 상상이란 타일러가 하는 짓거리들과 비슷한 걸 말한다 -_-) 그런 것을 다중인격이라는 걸개를 가지고 끌어내는 척 팔라닉의 말발에 속된말로 뻑 가고야 말았던 게다. 평상시에 내가 꿈꾸고 고민해 왔던 두 가지를 다중인격이라는 장치를 발판으로 거침없는 문장으로 숨막히게 하는 글 스타일에 그야말로 '유레카' 를 외쳤던 게다. 아마 다음에 Fight Club 만을 위한 시간이 있을 터이니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인다..정작 오늘의 테마는 Survivor 였지..
그렇게 Fight Club 의 풍만한 가슴 벅참을 경험하고 두 번째로 Survivor 로 집어든다.
책을 읽을 때 원래 chapter 에 신경 쓰지 않고 보는 편이라, 그 책의 구성이 chapter 번호가 거꾸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거의 다 읽을 때 즈음 7이 나올 때 알았다.-_-;;
이 책의 구성은 시간을 처음에서 차곡차곡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가 어디어디에 있지..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하면서 시작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의 화두
" 종교와 인간본성과 사회와의 관계? "

주인공은 크리디시 종교라는 흔히 일컬어지는 사이비종교의 집단 생활을 겪은 인물이다. 그가 받은 교육을 무장하고 이 사회에 내동댕이쳐진다.
수음과 섹스는 부도덕한 일이며, 알코올과 니코틴과 사탕 역시도 부도덕한 것이며, 매체 역시도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밖에 해면 안 되는 것들로 온 세상은 널려있다. 종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제한을 가해준다. 그러한 것이 인간본성의 발로와 어떤 상충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라는 규율 속에서 하나의 인간본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사회화라는 것이 텐더 브랜슨 처럼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우리는 굳이 '종교' 가 아니더라도 학교나 제도적 환경에 의해 또 다른 '규율'과 '법칙'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브르디외의 교육의 이데올로기나, 문화의 재생산 내지는 문화실조를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규정 지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무엇은 알아야 하며, 무엇무엇은 하면 안되며 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그 사회가 지배계급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명령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다.
텐더 브랜슨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으면 견뎌내지 못한다. 학교다닐때는 선생의 지시에 따라고 직장에서는 상사의 지시에 따른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지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크리디시의 세상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더욱더 무서운 세상이다. 장로들의 그릇된 잣대 속에서, 우리는 우리사회의 형성된 규율의 잣대 속에서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혹은 텐더 브랜슨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흘러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소름이 쫘악 끼칠 정도로 끔찍하다.
메트릭스속에서 기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가정 자체가 끔찍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채로, 이 사회의 틀 속에서 맞추어 살아야만 한다는 '현재' 의 모습 역시도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인 게다. 문제는 이러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각을 하지 못한다는 게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척 팔라닉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인 게다. 그리고 그의 강렬한 문체는 언제나 나의 지적 음핵을 자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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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블랙홀
로버트A.하인라인 지음 / 한뜻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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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허겁지겁 나가는 통에 아무 책이나 골라서 들고 지하철을 탔다. 그냥 평범한 SF 소설일줄 알고 아무런 기대감 없이 첫 장을 펼쳤다. 그동안 SF 소설의 지존은 필립 케이 딕이라고 굳건히 생각해 오던 터라 다른 SF 소설가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릴 적에 학생과학만화 라는 시리즈의 책을 보면서 가장 궁금하고 가장 환상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시간'의 개념이었다. 지금 보는 저 별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있던 별의 모습이라니... 정말 신기함의 그 자체이며 풀 수 없는 물리학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풀 수 없는 난해한 물리학적 개념은 아무리 물리를 배워도 풀 수 없는 난제가 되었고, 내가 우주 여행을 할 것도 아닌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냥 어릴 적 추억의 저편으로 멀리 내동댕이 쳐버렸다.

아무생각 없이 집어든 이 책에서 그렇게 멀리 내동 댕이 쳐져있던 추억 속의 '시간' 들을 다시금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두 쌍둥이가 한 명은 지구에 남고 한 명은 우주탐사단과 함께 우주를 항해한다. 왜? 둘은 텔레파시가 가능하다. 물론 둘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들은 어떤 전파의 방해를 받지도 않으며, 전파가 통용되지 않은 물리적 공간에서 조차도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광 년 떨어진 우주 한 가운데서도 텔레파시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매력적인 설정은, 주인공이 우주를 항해하면 항해할수록 더욱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지구의 시간은 그대로 흘러가지만 우주에서의 시간은 다르다. 특히 태양 주변에 있을수록 시간은 지구보다 빠르게 흐른다. 그래서 지구에서 70년이 흐르지만, 우주탐사단에 합류한 쪽은 고작 그들의 생물학적 시간으로 4년만 흐른 것이다.
기행문 형태(일기를 쓰기 위해 썼다고 화자는 밝히지만 기행문에 더 가깝다.)의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매우 자세히 관찰하고 상당히 절제된 문체를 사용한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의 이입보다도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가지게 한다. 극적인 사건이 좀처럼 없지만 흥미를 지속시키게 만드는 요인은 뭐니뭐니해도 '텔레파시'와 '시간' 일 것이다. 하루 밤 자고 일어나서 지구와 텔레파시로 통신하지만, 지구에서는 이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런 식으로 지구와의 통신의 이야기 흐름과 우주선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병행하면서 전체 스토리가 이어진다. 특별하게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사건이라면 마지막 행성에서 해저괴물들과 맞서 싸우다 대다수의 탑승원들이 전사하는 장면일 것이다.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주인공과 쉽게 감정이 동화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감정이 동화될 만큼의 군더더기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문체를 구사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의 표현까지도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려서 표현할 정도이다. .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주된 변화는 주인공이 자신의 쌍둥이 형한테 매일같이 알게 모르게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왔지만, 지구시간으로 70년의 항해를 거친 뒤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제일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성장소설의 매력은 다름 아닌 주인공이 한 모험에 대한 동경심이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도 '우주' 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만들어 주었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곳에서도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시간들을 보낸다는 설정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결론은 상당히 황당하다. 처음으로 접하는 하인라인 소설이지만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필립 케이 딕에 이어 무궁한 모험을 가져다준 작가이다. 처음 읽어보는 하인라인 소설이라 전체적으로 하인라인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정독해야할 만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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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은 동생이 무심결에 권해줘서 읽기 시작하였다.
(이 책에는 두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제목과 동일한 "워터") 그러나, 읽는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이 나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감성코드라는 것쯤은 단박에 간파하였다. 갓 세상을 접하기 직전의 세대,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지만, 그래도 희망어린 시선을 놓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지닌 시절.
이런 감성코드들과 조우하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린다.
주인공 로유운은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지만, 그런 상처를 가슴에 품고 싶지도 않고 툴툴 털어내고 싶지도 않은 채 그저 다른 형태로 살아가길 바란다. 남들처럼 대학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족의 아픔을 아픔으로만 치부하면서 아킬레스 건으로 살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길 바란다. 그렇다고 그가 방종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똑같이 복제되는 기계처럼 일률 화된 삶이 아닌 다른 삶속에서 뭔가 행복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저, 라이벌 학교와의 수영대결에서 이길 것을 생각하면서 가슴벅차하고, 따뜻한 햇살과 오랜 수영후의 짜릿한 쾌감을 위해 수영장을 찾는다. 그가 말하길, 똑같은 출발지점으로 가려고 기를 쓰기 보다는 다른 지점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특별한 사건이 있다해도, 그는 어찌할 수 없다. 그래봐야 그냥 고 3 학생일 뿐이다. 무엇을 해결할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나이이다. 상큼 하리리만큼 단순명쾌한 필체는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일어나는 사건들도 충분히 예상가는 한 것들이다. 형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어머니를 힘없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답답한 시선, 여고생과의 첫사랑, 친구들을 둘러싼 아픔 등 너무나 평범하게 누구나 있었을법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특별하지 않은 사건들 턱에 주인공이 특별한 인물이 아닌 그저 평범한 고3 학생으로 여겨지면서 감정이입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요시다 슈이치의 책은 결말이 짜릿하다. 그 어떤 확정적인 이야기의 완결을 짓지 않은 채 정점의 순간에서 끝을 낸다. 이 작품 역시 제목인 ‘워터’ 답게 그 물의 싱그러움을 가득 안은 채 마지막 전광판을 보면서 끝을 낸다. 그 이후 료우운이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지켜낼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구조, 깔끔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체, 신선한 결말 등은 요시다 슈이치를 작가 반열에 올라놓아도 손색이 없으리 만큼 훌륭한 점들이다. 또한 끊임없는 수영장과 수영에 대한 10대 아이의 예찬은 그 젊음, 패기, 희망의 시선 속에서 “물”의 충만함을 충분히 불러일으킨다. 나도 모르게 수영장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리턴”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우린 아직 시작도 안했자나!” 를 외칠 수 있는 희망의 시선을 던져준다. 나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료우운이 달려가고 싶다던 그곳..그리고 달려 나갈 것이다.

(요시다 슈이치)










비굴해지지 말라고 남들은 말한다. 노력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갖은 노력을 다해서 남들과 엇비슷한 자리에 서게 돼봤자..
예를 들어, 출발지점까지 죽기 살기로 달려가야만 하는 사람과
자동차에 편히 앉아 도착하는 사람이 있다. 달려온 사람은
헉헉 거리면서 또다시 출발점부터 달려 나가야만 한다.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나라면 출발지점과는 다른 장소로 달려간다. 거기에 아무도
모여있지 않다고 해도 그곳으로 달려간다.
                            
- 요시다 슈이치의 "워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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