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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1. 들어가기 전에 -요시다 슈이치의 건조한 시선 -

요시다 슈이치의 많은 소설에서도 그렇듯 이 작품도 정처할 수 없는 어떤 인간의 괴리를 보여준다. 주인공 슌은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고, 무언가 하고 싶은지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나가사키라는 공간속에서 한 집안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 혹은 변해가지 않은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공감가는 점은 주인공의 객관적인 시선이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시선이 존재하는데, 하루키의 무관심하고 건조한 시선이 결국에는 ‘자아’로의 발현으로 이어진다면 요시다 슈이치의 시선은 ‘자아’의 발현보다는 주변 환경 또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림으로써 어떤 상실감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감은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도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작용한다.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것이야!” 때문에, 비슷한 무감각하고 건조한 시선이라 할지라도 요시다 슈이치의 시선은 좀 더 날카롭고 과감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항상 슬프게 만든다. 그것이 슬픈 이유는 과장된 몸짓이 없고, 군더더기 없는 삶의 리얼함을 그대로 체현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곳으로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리게 만들고, 결국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참담한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수많은 주인공들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특별한 열정과 열망이 결여되어 있는 채로 하루하루를 묵묵하게만 살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꿈이 무엇인가 명백하게 직시하고 그 꿈을 위해 달려 나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문스럽다. 인생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꿈을 어느 순간 찾기라도 하면 다행이 아닐까? 혹은 그 찾은 꿈이 주변 환경과 사회제반시설에 어울려져서 급가속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 역시 천만분의 일로 다가오는 행운아 정도가 아닐까 싶다.


2. 나가사키 그 지역의 거리감?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는 나가사키는 일본인이 아닌 타국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그런 외딴 변방쯤의 이미지가 개입된다. “도쿄는 어떤 곳일까?” 라는 막연한 상상 속에서 자신의 지역을 떠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청년기의 마음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뒤섞이면서 이루어지는 막연한 희망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에는 이 모든 환경만 바뀐다면 얼마든지 좋을 것 같고, 희망찬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떠남”에 대한 강한 집착 속에서 살아가곤 한다. 그러나 슌은 이러한 인지가 가능해지기 전인 초등학생 시절에 이미 막연히 떠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관념이 깊게 드리우져 있었다. 그렇지만, 소설의 뒷부분에서 나오듯이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란 말이지’ 라는 외침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지. 아무것도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주변의 끊임없는 관계들(인간관계이든, 사회와의 상호작용이라든지) 속에서 나 혼자 ‘결정’ 할 수 있는 완벽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긴 힘든 것이다. 그럼으로 고독은 더욱 깊어지고,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숨어들어가면서 자신을 점점 고립화시키고 만다. 그래서 슌은 결국 별채생활을 이어가는 남자가 되는 것이다.


3. 별채의 독립성 혹은 고립화

별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의미상 별채는 안채와 분리된 공간, 즉 독자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별채에 거주했던 남자들은 안채에 드나들던 남자들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먼저, 자살한 데쓰야 삼촌,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야쿠자의 세계에 뛰어들지도 않고, 그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머물다가 떠난 이구치, 그는 나가사키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간 사랑방 손님이나 다름없는데, 데쓰야의 작품인 고야의 ‘거인’을 모사한 작품을 알아본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다. 이 자체로도 안채에 드나들던 남자들과의 개별성을 띄게 된다. 또한, 별채의 세계는 외부인과의 관계가 빈약한 상태로 내면으로만 침전된 채 고립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슌은 이쿠치를 따라 나가사키를 떠나려 하였지만, 그의 호탕한 웃음과는 달리 그는 그를 버려둔 채 떠나고 슌은  여전히 나가사키에 남겨지게 되는데, 이 후 성장한 후에도 떠나려 하지만 떠나지 못한 채로 있다가 대신 데쓰야 처럼 별채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리면서 고립화된 채로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스스로의 ‘결정’ 에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빚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에 의해 ‘좌절’ 된 내면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으며,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해 ‘판타지(아무것도 하지 않고 독립된 공간으로의 고립된 생활)’의 형태로 투사된 듯하다.


4. 소실과 순환?

역자는 “‘별채’가 불타오르는 장면을 통해 순환하되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나선형 운동, 즉 한 단계 올라선 맞물림의 결과를 암시한다.” 고 해설하고 있지만, 소실로 인해 은밀한 자아의 공간(별채)이 사라진 것 같아서 씁쓸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불탔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해야 하지만, 그 새로운 시작이 과연 희망적인 미래를 펼쳐나갈 수 있게 할지는 여전히 의문인 채로 말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찌되었든 지간에 과거로의 단절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목을 꽉 잡고 있던 관계들이 그나마 조금은 정리되었기에 앞으로의 전진을 기대하는 바이다.



5. 고야의 ‘거인’

고야의 ‘거인’은 인간 내면에 담겨져 있는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인데, 이를 그렸던 데쓰야 역시도  짓눌리는 삶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목숨을 끊은 듯하다. 미무라 가의 남자들은 데쓰야의 그림을 버렸고, 삶의 공포를 직시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혹은 공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인 듯 등장한다. 미무라 가의 남자들은 자신도 모른 채 다가오는 여러 공포들 속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쿠치 만이 고야의 ‘거인’을 당당하게 걸어두는 배포를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삶에 당당한 채로 소설에 등장하는가를 간접적으로 표현해준다. 슌은 기억도 나지 않은 데쓰야의 모습을 그리는데, 마치 자신의 자화상인 듯이 그림으로 해서 데쓰야와 동일시되는 순환의 고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슌은 삶에 대한 공포를 ‘고립화’ 시킴으로 해서 내면을 가두는 법으로 대처하고 있다.


6. 나오면서  -

짓눌린 삶의 공포, 사회적 관계 작용으로 인한 얽힘, 결정의 부재, 방향상실, 회피와 고립화의 판타지, 이러한 것들이 소설<나가사키>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다만 동질의 문제점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가가 관건이다. <나가사키>에서는 소실로 인한 회피와 고립의 판타지라는 점을 잘라내고, 모든 과거로의 관계를 청산 한 채로 마감하였다. 과연 나는 삶의 공포를, 사회적 관계  작용에 대한 얽힘을, 결정의 부재를, 방향상실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 지 또 한 번 고민하게끔 하는 작품이며, 하나의 대안 점을 모색하게끔 하고, 또 다른 동질감을 느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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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선풍적인 베스트셀러의 인기에 힘입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일 테고
제목의 간결함이 나의 마음을 동화시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빈치'와 기호학의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늠하게 해주는 '코드' 라는 두 단어의 생소한 결합은 더욱 큰 의미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충분하였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미스테리처럼 보이는 이 소설책 두권을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려를 단 영점 일초도 하지 않은 채 덥썩 사버렸다. 그러나, 내용이 던져주는 충격과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구성의 단조로움은 나를 지루한 터널로 이끌었다.

1. 너무 눈에 뻔히 보인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구성의 미약함은 너무나 많이 헐리웃 영화를 의식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작가 댄 브라운은 애당초 이 이야기를 헐리웃 영화로 만들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헐리웃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구성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야기의 구성이 뻔하디 뻔한 헐리웃 영화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1) 로버트 랭던과 소피 소늬에르가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등장부터 예견된다..
-> 너무나 단조롭다. 모험을 헤쳐나가는 두 남녀가 결국 동지애에서 사랑으로 승화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젠 그런 사랑타령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2) 소피의 진실
이야기의 극적 전개가 소피와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족, 진실, 비밀, 성배 등이 한데로 맞물러져 있음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그녀의 진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관찰자였던 그녀를 어느 일순간 중심 축으로 바뀌어 놓으면서 이야기의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고, 스토리가 개인사로 집중되는 듯 보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마지막에 그녀가 잊고지내던 가족을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은 우연 치고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인다. 마치 세 살짜리 아이가 내뱉듯이 "저도 그런걸 본적이 있어요" 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잊혀진 가족상봉이 시급하다 할지언정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3) 비밀은 가까운 곳에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그것은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행복을 찾아다니시나요?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라는 평범하지만 만고의 진리인 명제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야기 전개상 그렇게 밖에 진행될 수 없음은 이해하지만 로버트 랭던처럼 소뇌에르의 탁월한 두뇌에 감탄되기보다는 먼가 맥빠지는 기운이 더 강하게 감돈다.

2. 일이 너무 잘 풀리다가 안 풀리다가
모든 게 다 우연하게 일이 짝짝 풀려나가다가 어느 일순간 막혀버리면 대책도 안 서게 꼬이다가 또 어떻게 되든 해결이 되는 둥 극적 긴장감이 넘쳐흐르기보다는 너무나 극적으로 일이 해결되기 때문에 거대한 우연들의 조각이 일말의 비현실성을 불러일으킨다. 어차피 헐리웃 소설이기에 일상성의 공감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전혀 신나고 흥분되는 모험도 아니다.

3. 전형적인 인물 구조
소뇌에르는 매우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견실한 사람이다. 그에게서는 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착하기 그지없다(물론, 한사람만이 제대로 된 심리상태를 가졌다). 복잡한 심리상태도 없으며 마음속에 어떠한 악도 없으며 사명감과 의무감으로만 똘똘 뭉쳐있다. 반면 대립구도로 등장한 '스승' 이라는 인물은 비밀에 쌓여있으면서도 나중에 누구인가가 밝혀지는 순간 허망해지면서(상반된 캐릭터의 오버랩은 영 매치가 되지 않으면서도 단순히 지적열망에 사로잡혀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졌다는 두 인물간의 연결 고리는 너무 단순화시켜버린다.) 너무나 철두철미한 그의 계획은 실소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악은 없지만 절대적인 선은 존재하며, 그 대립구조가 마치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호기심 강한 인간 vs 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키고자 하는 성스러운 신" 으로 비쳐진다. 물론, 시온 수도회의 고유한 임무는 왜곡된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되찾고 원래의 정신을 지켜나가자 하는 것이지만, 소피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임이 밝혀지면서 '신성' 한 몸이 되고 지켜나가야만 하는 성스러운 비밀을 가지게 되며, 단순히 이에 대한 증거들을 찾으려는 레이 터빙의 광기는 그런 성스러움을 침범하는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4. 진실은 어디에
우리 주변에 이러한 진실들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코드들이 있어요. 텔레비전 광고, 책, 영화, 그림 등등 엄청나게 많지요. 그렇단다. 이 책을 다 덮고 나니 진실여부가 사뭇 궁금하다. 그래서 다빈치 그림 등을 살펴보면 정말 그러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진실의 코드는 우리 주변을 쫘악 둘러싸고 있고, 공식적이지는 않지만(공식적으로 되는 순간, 지구상 가장 큰 카오스가 등장하려나? ) 비공식적으로 진실은 가까이에 있다. 그렇다면 이 책 역시도 랭던이 말했던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고 진실을 말했던 책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아무래도 그런 역사의 진실들을 파헤치는 책을 쓰면 몇 사람이나 '성배' 에 대해 관심을 가지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댄 브라운 씨는 자신의 소명을 다 했고, 그 소명이 보다보다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 블록벅스터 형식의 책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고 추론하다 보니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그러한 구성방식들도 이해가 가긴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목적은 '성배' 에 관한 진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었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히트 치고 영화화까지 계획중인만큼 그 목적은 기대이상으로 달성한 듯 보인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에 불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무래도 빈약한 구성과 어설픈 스토리전개 때문인 듯 싶다. 자못 소설이란, 소재나 내용의 신선함도 중요하지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따른 얼개이다. 이 얼개에 따라서 내용의 빈약함도 충분히(여기서 말하는 얼개란, 문장이나 구성 등을 아우름) 극복하여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고 삶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선한 진실을 전달해 주었다는 점과 초반부에 등장한 흥미로운 다빈치 그림들의 코드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유쾌하고 색다른 책읽기의 순간이긴 하였다.

*P. S : 번역의 악평과 누락으로 인해 어쩌면 원작의 맛을 제대로 못살려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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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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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세폴베다의 최신작이 아니라 가장 근래에 출판된 책이다. 이렇게 신작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옛날 작품들이 출판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세폴베다의 인기가 그만큼 높아졌나보다. 남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찌는 듯한 무더위, 광적인 축구 열기, 부패한 정치, 회복할 수 없는 경제, 다혈질적인 민족성, 고대 마야 문명의 근원지(그러나 너무나 슬프게 끝나버린 문명의 역사) 등이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점은 그들은 북반구와 반대편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에 근거하여 궤짝을 맞추어서는 안됨을 뜻할 것이다. 이 작품은 세폴베다의 대표작인 '동행' 과 '악어' 의 근간을 이루는 그의 행적을 경쾌하게 기술해낸 일종의 모노드라마인 셈이다. 혹은 더 넓게 세폴베다 자신의 인생 궤적과 자아의식 및 정신의 원류를 찾아가는 성찰인 셈이다.
제 1부는 정치적 역정의 시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고,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던 할아버지 덕분에 일찌감치 사회주의자가 되어서 정치 탄압을 받았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감옥 시절은 암울과 음울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인텔리 동지들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불행을 보다 더 발전적인 형태로 전환시킨다. 또한, 문체나 내용 자체도 무지막지한 수용소 생활을 비추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단 한 줄로 응집된다.
"나에게 어떤 긍지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곳의 인간 백정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잊지 않고 산다는 사실이다 "
2, 3부는 남미에서 생활과 남미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일상을 그려냈다.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은 손이 닳도록 열심히 일하는 묵묵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야 한다 하는 강한 자의식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 한탕 거하게 놀면서 대자연에 동화되는 모습들이다. 가슴 들끓는 열정을 삭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지겹게 군부정권, 부패정권에 맞서서 싸우다 얻게된 부산물일 수도 있고, 타고난 체질일 수도 있다. 한 훌륭한 좌파작가의 탄생배경에는 하층계급의 수많은 평민들의 이런 묵묵하지만 강렬한 삶의 태도와의 만남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4부는 주인공이 드디어 스페인에 살고계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스페인에서 좌파운동을 하다가 남미로 망명온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미에서 좌파운동을 하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가는 순환을 그린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운동은 회귀되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 근원이었던 중심점에서 유일한 혈육과 상봉하는 과정은 그다지 감동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너무나도 생생하고 구구절절 하면서도 절제되게 묘사한 세폴베다의 문장력으로 인해 감동을 느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세폴베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삶의 의욕이 넘치게 된다. 언제나 방향감각을 상실해가고 있다 싶으면 세폴베다의 책을 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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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44호 - 2005.가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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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 산 문학동네 여름호에서
보게 되었다. 그 때 그 계간지에 너무나도 유명한 '호출' 이 실려있었다. 그러나,
'호출' 이 신선하긴 하였지만, 그닥 마음에 써억 와닿지는 않았다. 뭐랄까 구성의 신선함보다는 문체의 매혹이 더 끌렸던 나이어서 그랬을까. 하긴 그시절의 나는 '윤대녕' 에게 푸욱 빠져있던 시기였으므로, 그런 미혹적이고 아스라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채, 일상적이고 지지부진한 사건들 속에서 내 마음의 공감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그 여자가 영화에서 배드씬 찍을때 등장하는 대역 배우라는 사실, 그 상대 남자배우는 싸가지 없었다는 사실, 뭐 그정도이다. -_-;;
그렇게 김영하는 잊혀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 98년이 아닐까 싶은데,
종로서적에서 책을 집어들었다. 98년 현대문학상 수상작품 모음 책이었을 것이다.
그시절에는 한국현대작가들에 심취하던 터라, 그런 책들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 책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제목은 '흡혈귀' 였다. '호출' 에 대한 평범한 기억이
있는 작가였기에 그다지 기대를 걸고 읽지는 않았다. 그러나! 속도감이 한층 더
늘어나 있었다.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은 '흡혈귀' 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문화적 믹스에 의한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냉철한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가 신선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욱 매력적인 것은 그의 문체였다.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고, 냉정한 듯하면서도 감정적인, 은근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말놀림 역시 놓칠 수 없는 매력이었던 것이다.
500년동안 조선시대때부터 흡혈귀로 지낸 남자의 이야기는 시간적인 간극의 효과를
속도감있게 표현하였고, 그의 기이한 이야기는 '이야기' 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 매력적인 남자의 원천적인 근원의 매력은 바로 '죽지않는' 다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결국, 김영하는 나의 가장 favorite 한국 현대작가로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흡혈귀' 라는 단어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내가 '흡혈귀' 의 남자주인공을 사랑했었는지, '흡혈귀' 작품 전체에 매혹되었는지, 김영하의 문체에 푹 빠졌었는지, 김영하 자체에 설레임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저것들이 다 맞물려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갑자기 김영하의 이 작품이 어느 소설집에 실려있는지 기억이 안나서 문학동네로 이미지 선택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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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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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대히트중의 대히트를 쳤을 때
그 6권이라는 장대함 때문인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베스트셀러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둘 다 였는지 모르겠으나 어찌된 연유인지 쉽게 '개미'라는 책에 손이 가지 않았드랬다. 지금도 가끔가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곤 한다. "아니 개미를 안 읽었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개미에 대해 너무 많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냥 그런 우리나라에서 기이하게 인기 많은 작가(수려한 외모가 한몫 했으리라!)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정도로 여기었었다. 그러나 주위에 광적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팬인 사람 덕택에 '타나토노트' 라는 이름도 알쏭달쏭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순전히 강제적인 측면이었다!).

1. 죽음에 대한 동경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고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본다. 나는 7살 때 '나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명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못 푸는 문제를 7살짜리가 뭘 알겠다고...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인 채 머릿속에서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얼마 후 석가모니의 위인전을 읽었는데, 석가모니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 심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면서 나는 내가 고민해오던 해답을 찾을 것만 같은 충만한 기대로 한 장 한 장을 넘겨나갔다. 그러나, 거기에 나와있는 답은 "석가는 결국 깨달았다! 이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해탈하였다!" 하니 뭘 깨달았나?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민의 답은 무엇이던가! 결국, 그냥 석가는 뭔지 모르겠지만 깨달았고, 나는 깨닫지도 못한 채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지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냥 누군가의 유전자를 간직한 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해 탄생되고 진화된 '인간' 일 뿐이라는 결론을 이르렀다. 그렇다면 죽으면? 물리적으로 죽으면 끝이다. 윤회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해왔다. 왜냐,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고민은 7살 때 심각하게 해본 걸로 충분하니까.

2. 죽음에 대한 상기
묻어두었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낸 이 책은 죽음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주인공들이 죽음을 위해 탐사하는 내용이다. 죽음을 탐사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시작된 이 영계 탐사는 그야말로 상상력의 풍부함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집착과 탐구는 어렸을 적 호기심을 다시금 상기시켰고, 그에 대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식 결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결말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간에 천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을 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에 동화되게 된다. 이건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 기반한 과학적 분석을 갖추면서 특징 없는 주인공의 관찰태도 중심의 기술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혹은 동, 서양의 철학들을 아우르는 베르베르의 인생관이 매력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매트릭스 혹은 유체이탈
이상하게 그들의 영계탐사 과정이 매트릭스를 보는 듯했다. 신체는 누워있고, 정신(영혼이라 불리는) 은 다른 곳을 탐사하고 있다. 마치, 신체는 갇혀있고 이미지를 머릿속에 입력하여 다른 차원에서 행동하는 매트리스 주인공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달마 대사의 유체이탈 만큼 엄청난 것이 또 있으랴! 솔직히 나는 눈에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주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하나의 전설이나 설화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진지하게 소설의 주된 장치로 이용하는 베르베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몸은 그대로요, 마음은 블랙홀까지 갔다온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체이탈 자체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4. 신비주의?
베르나르 베르베르같은 서양인이 보기에 동양사상은 정말 환상의 영역인가보다. 우리야 워낙에 서양사상에 익숙해지고 동양사상은 생활 속에서 많이 접하든 터라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새롭다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쪽 고대사상들이 새롭다고 해야하나. 베르베르는 전 세계의 죽음에 관한 설화들을 집대성 한 듯 보인다. 그러한 방대한 설화들과 전설들은 이 '죽음' 탐사를 받쳐주는 하나의 가설이며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라마교의 교리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원래 라마교 신자인지 아닌지 모르나 주 핵심이 되는 원동력은 라마교의 정신세계이다. 물론, 유대교 랍비 역시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랍비 프레디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기 보다는 스스로 가르침을 터득한 이처럼 보이고, 라마교 신자 스테파니아는 라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표현한다. 아마, 라마교의 유체이탈 가설이 없이 이 소설의 전개는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5. 전체와 부분간의 상호 연관관계
네 명의 탐사 대원 중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인간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는 하나, 모두들 그러한 불안정성을 '죽음' 탐사로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나서 우리 세계는 변한다. 죽음이 알려지고 나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종교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등 모든 폐해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들어 난다. 그런 전체적인 구조의 모순과 문제점들과 동시에 탐사 대원들에게도
불 완전성이 심하게 드러난다. 객체와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그들은 전체의 변화에 따라 하나씩 변해간다. 그것은 스테파니아의 입을 빌러 표현된다. "이렇게 무미하고 따분한 세상 속에서는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너무나 역동적인 이 세계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특히나, 하루가 다르게 쇼킹한 뉴스로 신문을 가득 채우는 우리나라에 와서 산다면 오히려 무미건조한 평화로운 상태를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역동적인 변화로 인해 그래 세상은 이런 맛이야! 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럭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미세한 인간일 따름이다(도교주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변화되기보다는 여타 주변의 것들,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던 싫던 간에 우리 주변의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 브레송 처럼 모든 문을 쳐 닫고 살수는 없는 것이다.

6. 선과 악은 공존한다.
선과 악은 양면성이다. 이만큼 멋있는 명제가 또 있을까! 언제나 늘 주장하지만, 가장 악한 사람이 가장 선할 수 있고,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악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에는 절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이 천사가 될 수 있고, 천사가 사탄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선과 악의 공존은 스테파니아의 공격적인 테러로 이어진다. 선이 있기에 악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기에 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7. 기억에 대한 강박관념
인간은 누구나 안 좋은 기억을 은밀하게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누구에 의해서도 공개되길 원하지 않은 기억. 그런 기억은 자기만 꼭꼭 숨겨서 간직되길 원하고, 가능한 지워지길 원한다. 그런 기억은 그러나 때때로 예고 없이 훌쩍 나타나서는 공연히 우울함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사라진다. 그런 안 좋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돌진한다면? 아마 엄청난 혼란과 괴로움을 안겨다 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보이지 않게 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런 기억에 대한 공포를 우리는 언젠가는 맞딱드리게 되는가보다. 베르베르도 이런 인간의 보이지 않은 불안심리를 영계의 세계를 통해 표현해 주고 있다. 공포는 내 안에 있도다 라는 스쳐 지나가는 문구를 되새기게 해준다. 어쩌면 자아의 번뇌 역시 내 속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이거 역시 불교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 같다.

8. 씁쓸한 자본주의
천국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천사들은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인간을 고용하지만 인간들은 돈을 받고 그들의 장부를 마음대로 조작한다. 결국, 돈 많은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면죄부가 생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 현실이 사실상 그러하다.
루턴의 종교개혁이 나오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돈을 많이 기부하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종교인사들이 퍼뜨린 말이겠지만..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현실 속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며칠 전 절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돈을 50만원 이상 기부하면 이름을 돌계단에 새겨드립니다. 라고 써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50만원 기부한 사람은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다. 나는 부처님께 이만큼 돈을 기부했으니까 극락을 보장해주시겠지! 라고 마음을 먹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돈을 일정이상 기부하면 이름이라도 새겨주니 대대로 남기라도 하겠지. 이 어찌 루턴의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의 종교양상과 달라진 것이 뭐가 있으랴. 무슨 종교를 해도 기부금은 필수이고, 돈을 많이 기부할수록 대접받는 세상이거늘.

9. 나무가 되리라
인간은 자연과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이를 가장 강하게 믿고 있는 베르베르는 죽으면 나무아래에 묻어달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가장 속물적이었던 뤼생데르 대통령도 나무아래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계 탐사대장격이었던 라울은 환생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 책을 다 덮고 나니, 동물 하나하나 식물 하나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게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힘인 가보다. 지극히 단순한 명제인 자연과 인간은 공존한다를 이렇게 환상적이고 방대하게 집대성할 수 있다는 능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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