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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학교-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닉 데이비스 지음, 이병곤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9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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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 국가 그리고 시장
조프 위티 외 지음, 이병곤 외 옮김 / 내일을여는책 / 2000년 12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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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교육정책 형성과정에서의 국가주도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한국교육학총서 01
박준형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8년 2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5월 1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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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신선한 픽션이다. 스페인사람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쉽다. 스페인내전과 같은 역사적 맥락을 알 고 있다면 스페인은 다른 여느 나라보다 아나키즘이 번성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몬드라곤 공동체(현재 스페인내 유통업계 2위, 총자산규모 30조원의 협동조합)와 같은 대규모 협동조합에 대한 담론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90년대 초반, 소비에트사회주의 몰락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담론, 꽤나 의미 있는 대안적 담론으로 IMF이전까지 주목을 받기도 한다. 당시 이러한 담론의 대표적인 저서가 화이트의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이다. 아마 그 책 표지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델을 넘어서’라는 꽤나 도발적인 소제목이 붙어 있었다. 시간을 파는 남자(이하, 시파남)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시파남’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제목부터 신선한 ‘시파남’은 경제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고, 그의 사고를 따라 진행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평생 갚아야 할 주택담보융자금을 가지고 살아가는 보통남자(TC)는 붉은머리개미의 생식체계를 연구하고자하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회계 관련 서류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집이 작아서 TC-3(세 번째 아이)을 생산하지 못한다. 어느 날 문득 그의 인생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는데.. 그의 인생이 35년이라는 세월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이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어떠한가? 이 현실적인 설정, 난 이 소설을 읽고 바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았다. 먼저 굉장히 많은 비용을 생략하고 집도 전세만 산다는 가정 하에 내 인생에서 필요한 돈은 약 2억 원 정도라고 책정해보았다. 그리고 매월 50만원씩 저금한다고 보았을 때,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약 35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돈이다. 돈은 곧 ‘시간’이다. 이 책의 논리적 전개가 이어진다.

그는 직장을 관두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아이템은 ‘시간’을 팔자는 것.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시스템에 대한 풍자가 시작된다.

“지금 당신들은 자유소비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누군가 자유 의지로 T를 사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요! T를 시판할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체제에 반하고 우리가 창조한 상품교역에 토대를 둔 자유사회를 거스르는 혐의로 상공회의소를 고소하겠소! 지금 시장 경제를 거스르는 테러행위를 하고 계신 줄이나 아시오!”

그렇다 자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는 시간을 팔기 시작한다. 시간을 팔겠다는 특허와 시장화를 위한 상공회의소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그가 파는 시간이 담긴 플라스크(실제로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를 무관심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여기서의 무관심은 사뭇 진지하다. 카페, 요식업계, 대형마트, 도시공사 모두 그의 제품을 진열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에게 시간은 곧 마이너스 기회비용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플라스크는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어야 했다. 친구 DVD의 도움으로 방송을 타게 된 플라스크... 이내 이슈가 된다. 5분의 시간을 담은 플라스크. 이 플라스크를 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나의 시간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나라가, 제도가, 시스템이 인정한 제품이기에) 일을 하다가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플라스크를 열고 밖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를 피고 오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시간을 파는 플라스크는 체제에서 순기능을 하게 된다. 노동능률을 높이고 완전고용을 이룩하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소설을 좀 더 다이나믹하게 전개하게 된다. 5분은 두 시간, 일주일로 35년으로 확장된다. 체제를 위협하는 상품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그분’들의 위협에 대한 TC의 현실적인 판단으로 인해 파생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택을 담보로 35년의 시간을 사게 된다. 즉 모든 사람들은 노동을 거부한다. TC가 사는 나라는 망하기 직전에 가게 되고, TC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극전인 전개 끝에 TC는 체제의 역설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개인의 시간을 소유하고 있던 체제를 다시 개인에게 시간을 돌려주었을 때, 개인이 35년을 버텨가고 있는 그것을 체제는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전략으로 잘 나타난다. ‘총파업’의 논리와 소박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근본생태주의자의 논리, 지역화폐의 논리 등과 맥이 닿아있다.


결국 TC는 분 단위 화폐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국민이 소유한 T를 다시 체제가 구매하는 것이다. 35년에 해당하는 화폐=시간을 말이다. 그리하여 다시 TC가 사는 나라는 경제적 유동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결말은 두 가지이다. 그 중 두 번째 결말을 소개해 보겠다. TC가 사는 ‘어떤 나라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잠식했다. 아름 아닌 “혹시 국민들이 사회에 필요한 일을 안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이었다. 정부 정책자 중 누군가 물처럼 모든 사람이 꼭 사용해야 하는 자원에 세금을 물리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물의 가격이 엄청나게 뛰었다. 집에서 상수도를 사용하려면 ’수자원은행‘이라는 기관을 거쳐야만 했다. 물 값이 너무나 비싸서 가정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사용하려면 35년 만기로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는 ’시파남‘의 처음 상황과 흡사하게 돌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무언가를 발명한다. 예컨대 위의 두 번째 결말처럼 비싼 물 값을 치르기 위해 평생 동안 갚아나가야 할 대출제도가 생길지도 모른다.’


어떠한가? 유동성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자신의 집을 살 수 있는 인간성을 회복한 사회가 도래했다는 첫 번째 결말과 달리 두 번째 결말이 우리사회와 더욱 닮아 가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밝히듯 그의 사상적 바탕이 인간성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에리히 프롬)와 연관이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결국 체제(시간)가 인간의 주인이 된 후 공리와 자유는 어디로가 버린 걸까? 저자는 눈에 보이는 개인의 생활로부터 시작하는 암울함과 체제로부터 희생되어가는 사각지대를 가리킨다. (예컨대 저 많은 병원과 부동산들을 볼 때 느끼는 두려움 외로움과 같은 것일 테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아파서 저 병원을 채워야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빨리 팔고 새로운 집을 사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유에 의미(개인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인간성회복과 새로운 형태의 복지국가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성(장점으로서의)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진 않는다.


부동산의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며 임노동으로 체제 순응적 인간을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주거의 개념은 처절하게 파괴되고 있다. 제3금융권은 개인의 경제를 파탄내고 있고 생존과 생활을 위협할 정도로 체제는 개인을 착취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우리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의 자유는 누가 빼앗아간걸까? 나의 욕망은 과연 온전한 나의 욕망이었을까? 타인의 욕망, 자본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물음의 방법론에 깊게 동의하며, 동시에 모두가 ‘자신의 시간’의 주인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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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이야기 - 자유.자치.자연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박홍규, ‘자유, 자치, 자연’ 아나키즘 이야기 서평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는 아나키즘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솔직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인데 아나키즘에 대해서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것과 그 견해를 밝히는 방법론이 솔직하다는 의미이다. 즉 박홍규는 아나키즘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이 한권의 책에 모두 담았다는 느낌이다. 중간 중간 번역상의 오류나, 논의의 밀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나키스트(본인은 아나키스트라는 자각이 없다고 한다.)의 고뇌가 충분히 느껴지는 책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이 갖는 아나키즘의 정치적, 학문적 한계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는 생태주의자로서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명백히 주장하는 북친이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책을 옮긴 이에 의해 아나키스트가 아닌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왜곡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북친의 책을 처음으로 소개한 문순홍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북친.1997)’(57)

 


아나키즘은 사상이다. 인간의 생각이고, 생각의 경향성이다. 아나키즘은 그 근본적인 생각을 포기하지도 않고, 가장 완벽한 포괄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과학화 하지 못한 학문성 성취는 현대에 까지 이르러 엘리트주의, 비학문적,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아나키즘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무관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회이론의 과학화로 인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에코 아나키즘 비판

 


‘이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론화되어야 한다.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친하고 해서 우리가 별안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이 국가는 악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졸지에 국가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69)

‘특히 나는 아나키즘의 과도한 낭만주의적 치장을 없애고자 한다. 예컨대 일부 아나키즘의 농촌지향성, 자연에 대한 과도한 신비화, 성선설적 인간성론, 상호부조론, 국가의 저면적 부정 따위를 비판한다.(70)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에코 아나키즘을 비판한다면 이러한 논의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논의가 옮겨간 것은 농촌의 많은 비판점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코 아나키즘은 이점을 묵과한다. 이러한 논의는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녹색평론’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녹색평론이 90년대 이룬 업적은 90년대 문학보다 클지 모르지만, 2000년대 이후 녹색평론은 얼마나 발전하였는지 의문이다. 녹색평론은 존재자체로 의미 있지만, 이제 또 다른 매체를 필요로 한다.

 


사회주의는 아나키즘의 전략적 선택?

 


‘아나키즘이 사회주의를 국가주의로 비판한 것은 정당했다. 그러나 아무런 전략이 없는 아나키즘을 사회주의가 공상이라고 매도한 것도 정당했다. 이제는 전략을 짜야 한다.(70)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특히 미국 아나키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북친이 생활태도Lifestyle 아나키즘이라고 비판하는 비사회적, 비정치적 아나키즘을 말한다.(116)


아나키스트의 본질은 자유이고 그 출발은 개인이다. 반면 맑스주의는 본질이 평등이고 그 출발은 사회이다. 아나키즘은 자유로운 인간이야말로 평등한 사회를 형성하는 조건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올바른 사회를 형성한다고 본다. 반면 맑스주의는 평등한 사회조건이 자유로운 인간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올바른 사회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을 낳는다고 본다.(221)

 


박홍규는 맺음말에서 ‘아나키즘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회주의를 수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96)’ 라고 한다. 스스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에 대한 자각이 없다고 밝혔듯 박홍규는 회색인을 자처하고 있다. 결론은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 솔직함에 딴죽을 걸고 싶다. 아나키즘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회주의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튀세, 발리바르 얼마 전 방한한 랑시에르까지 프랑스의 맑스주의자로부터 국가주의에 대한 낯설게 보는 접근이 바로 그러한 흐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문하고 싶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를 얼마나 검토하고 있는가? 아나키즘은 근본적인 하나의 흐름이지 사회주의에 대해서 메타적 개념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어떠한 현실적 대안이나, 과학적방법론을 거부한다면 사회주의와 똑같은 선상에서 비교되고 서로에게 영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박홍규의 아나키즘은 존레논으로 시작해서 사회주의로 끝난다. 아나키적 영향력이 큰 교육과 예술에 대한 부분을 각각 하나씩 챕터로 띄어내어 보다 체계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하였다. 사상적 측면에서도 에콜로지와 아나키즘,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에 대한 연관을 하승우의 책보다 방대하게 설명(개념사 시리즈의 기획 상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겠지만)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쿠제와 프롬)와의 연관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연관에 대한 논의는 제외되어 있다. 두 사상의 연관이 긴밀하다는 문장과 푸코의 논의정도를 제외하면 두 사상의 직접적인 연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박홍규의 아나키즘이 솔직하다고 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나는 아나키즘의 비과학적, 비학문적, 비정치적, 비사회적 경향성을 개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맑시즘이 행위를 통해 사고를 이끌어낸것은 온당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사고에 앞서 행위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시즘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프롤렐타리아 혁명이후, 프롤렐타리아 독재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나키즘과 맑시즘은 동등한 선상에서 서로 사상적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인 실천에서부터 고민하고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 첫 번째 물음으로 나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한살림'을 잡았고. 사상적 측면에서 촘스키와 푸코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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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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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같은 기획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데 ‘책세상’에서 나온 개념사 시리즈도 비슷한 의도에서 기획된 출판물로 보인다. 분량도 150~200여 페이지로, 다큐에서 지식채널e로 진화하듯 지식인들의 출판에 대한 새로운 프레임으로 적합한 기획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길지 않다. 머레이 북친과 촘스키, 이반 일리히, 프레이리 등등 사회생태주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급진저항이론의 이론가들과 더불어 최근 생협에 대한 관심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체계적 학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던 즈음이었다. 때마침 주변에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선배에게 선물 받은 이 책은 아나키즘에 대한 좋은 가이드가 되었다.

아나키즘 그 오래된 '누명'

하승우의 아나키즘을 읽으며 2008년 명반으로 꼽힌 버벌진트의 '누명'을 떠올렸다. (그동안 한국의 힙합에 덧씌워진 누명에 대해 노래했다는 이 음반은 리스너와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최고의 음반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첫 번째 장 '왜 다시 아나키즘 인가'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오래된 누명을 이야기 한다. 하승우의 아나키즘뿐만 아니라 이반일리히를 한국에 소개한 박홍규 역시 아나키즘의 오해를 본인의 저작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다. 왜 아나키즘은 오해와 누명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잠시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무정부주의, 테러리즘, 극단적인, 민주적이지 않음. 등등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이미지들은 이러한다. 이에 대해 하승우가 말하는 진실은 이러하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때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로 번역했을 뿐이고,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과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 등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모든 권력을 거부하기 때문(12)'에 반강권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또한 '하지만 아나키즘은 무차별적인 테러를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정의와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으라고 권한다. 아나키즘은 어느 한 가지 길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다.(19)' 라고 하며 아나키즘이 가진 극단적이고 민주적이지 않고 테러리즘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은 어쩌면 조작된 측면이 더욱 많다는 것이다.
 

동양사상과 아나키즘
 

얇지만 아나키즘이 던지는 물음, 역사, 논쟁, 아나키스트의 저작, 현재적 의미까지 아우르고 있는 이 책은 몇 가지 지점에서 내게 흥미로운 물음을 주었다. 특히 동양사상과 아나키즘의 연관을 설명한 부분은 매우 흥미로웠는데, 반전과 관련하여 묵가의 사상이 흥미로웠고, 대동사상과 관련하여 예기에 나오는 구절, '자기 부모만을 사랑하거나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그럼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부양받게 되었다.... 도둑질과 약탈이 없으니 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 말한다.(33)’에서 대동사상과 68혁명의 개인의 출현, 동시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연관을 발견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동양사회는 농민중심의 공동체전통, 맹자와 노자, 묵자처럼 아나키즘과 연결되는 사상적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에 빠르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58)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한국역시 계와 향약, 두레, 품앗이와 같은 전통. ‘홍익인간’의 이념 역시 아나키즘과 닿아 있다.(62)고 밝히고 있다.

스페인과 아나키즘

‘러시아와 함께 아나키즘이 가장 번창했던 곳은 유렵의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은 유렵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농업 사회의 성격이 강했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루동과 바쿠닌 같은 사상가들이 스페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군주는 자신을 위협하는 아나키스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49)’ 사회주의자들은 아나키즘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인정하지 않지만 스페인에 한해서 그 영향력을 인정하는데 이에는 역사적 맥락이 숨어있다. 1931년 스페인 왕정이 붕괴되면서 아나키적 실험이 다양하게 진행된다. 이는 아나코-조합주의적 실험들이었다. 영화 ‘판의미로’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스페인 시민전쟁(스페인내전)으로 인해 아나키즘은 심각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판의미로’에 등장하는 파시스트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농민의 가방에서는 ‘신도, 국가도, 주인도 없다’는 글귀가 적인 종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스페인 시민전쟁은...스페인을 무대로 벌어진 유럽 제국주의, 권위주의세력 대 사회주의, 아나키즘세력의 대결이었다...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었다....(50)’ 당시 언론에서는 스페인내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대결로 혁명적 측면은 최대한 은폐시켜 모호하게 접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아가 스페인은 현재에도 몬드라곤 공동체로 대표되는 최대의 아나키즘의 정치적 역량을 자랑한다. 이러한 역량은 유럽으로 일본, 미국, 호주로 90년대 초 IMF이전 한국에게도 논의의 지형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일순, 김지하의 한국적 뿌리를 두고 있는 생명사상과 몬드라곤의 실험은 한살림운동이라는 구체적 운동으로 현재까지 귀결되기도 한다.

아나키즘을 뛰어넘는 정치적 역량과 상상력.

나는 아나키스트라는 자각도 사회주의자라는 자각도 별로 없다.(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이라는 권위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난 에코맑시스트와 사회생태주의자에 가까운 회색인이다. 개별의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은 지향이 다르다 할지라도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금 나의 안타까움이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 친구이자 서로를 등지기도 한 배반자였다. 아나-볼 논쟁과 같이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했던 두 이념은 다시 현대에 와서 서로 다른 지향을 가진 무엇으로 여겨진다. 아나키즘의 정치적 역량은 과연 무시할만한 수준인가? 아나키즘은 이미 삶속으로 많이 침투해있다. 촛불시위때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던 ‘비폭력’, 공동육아와 대안학교, 생협, 풀뿌리공동체, 23년째에 접어든 조합원규모 16만에 육박하는 한살림운동... 사회에 ‘상수원’역할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기에 한국의 아나키의 정치적 역량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재, 정세를 볼 때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화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해묵은 아나-볼 논쟁의 구도에서 벗어나 노동자, 농민의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적극적 연대로 아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 일리히와 마르크스, 사르트르의 사상적 뿌리를 두고 68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앙드레고르의 저작이 한국에 소개되고 있다. 고르의 사상적 융합은 새로운 상상력을 끌어내는데 굉장히 유용한 ‘무엇’이다. 하승우의 ‘아나키즘’은 내 머릿속의 아나키즘에 대한 누명을 벗어냄과 동시에 크로포트킨의 지식의 공동소유와 같은 개념을 새롭게 익히고 영감을 얻는데 유용한 책이었다. 암울한 시대, 시민사회와 좌파세력 그리고 아나키세력 모두.. 아나키적 상상력을 발휘해야할 때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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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 2009-02-0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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