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신선한 픽션이다. 스페인사람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쉽다. 스페인내전과 같은 역사적 맥락을 알 고 있다면 스페인은 다른 여느 나라보다 아나키즘이 번성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몬드라곤 공동체(현재 스페인내 유통업계 2위, 총자산규모 30조원의 협동조합)와 같은 대규모 협동조합에 대한 담론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90년대 초반, 소비에트사회주의 몰락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담론, 꽤나 의미 있는 대안적 담론으로 IMF이전까지 주목을 받기도 한다. 당시 이러한 담론의 대표적인 저서가 화이트의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이다. 아마 그 책 표지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델을 넘어서’라는 꽤나 도발적인 소제목이 붙어 있었다. 시간을 파는 남자(이하, 시파남)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시파남’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제목부터 신선한 ‘시파남’은 경제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고, 그의 사고를 따라 진행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평생 갚아야 할 주택담보융자금을 가지고 살아가는 보통남자(TC)는 붉은머리개미의 생식체계를 연구하고자하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회계 관련 서류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집이 작아서 TC-3(세 번째 아이)을 생산하지 못한다. 어느 날 문득 그의 인생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는데.. 그의 인생이 35년이라는 세월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이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어떠한가? 이 현실적인 설정, 난 이 소설을 읽고 바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았다. 먼저 굉장히 많은 비용을 생략하고 집도 전세만 산다는 가정 하에 내 인생에서 필요한 돈은 약 2억 원 정도라고 책정해보았다. 그리고 매월 50만원씩 저금한다고 보았을 때,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약 35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돈이다. 돈은 곧 ‘시간’이다. 이 책의 논리적 전개가 이어진다.
그는 직장을 관두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아이템은 ‘시간’을 팔자는 것.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시스템에 대한 풍자가 시작된다.
“지금 당신들은 자유소비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누군가 자유 의지로 T를 사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요! T를 시판할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체제에 반하고 우리가 창조한 상품교역에 토대를 둔 자유사회를 거스르는 혐의로 상공회의소를 고소하겠소! 지금 시장 경제를 거스르는 테러행위를 하고 계신 줄이나 아시오!”
그렇다 자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는 시간을 팔기 시작한다. 시간을 팔겠다는 특허와 시장화를 위한 상공회의소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그가 파는 시간이 담긴 플라스크(실제로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를 무관심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여기서의 무관심은 사뭇 진지하다. 카페, 요식업계, 대형마트, 도시공사 모두 그의 제품을 진열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에게 시간은 곧 마이너스 기회비용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플라스크는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어야 했다. 친구 DVD의 도움으로 방송을 타게 된 플라스크... 이내 이슈가 된다. 5분의 시간을 담은 플라스크. 이 플라스크를 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나의 시간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나라가, 제도가, 시스템이 인정한 제품이기에) 일을 하다가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플라스크를 열고 밖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를 피고 오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시간을 파는 플라스크는 체제에서 순기능을 하게 된다. 노동능률을 높이고 완전고용을 이룩하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소설을 좀 더 다이나믹하게 전개하게 된다. 5분은 두 시간, 일주일로 35년으로 확장된다. 체제를 위협하는 상품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그분’들의 위협에 대한 TC의 현실적인 판단으로 인해 파생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택을 담보로 35년의 시간을 사게 된다. 즉 모든 사람들은 노동을 거부한다. TC가 사는 나라는 망하기 직전에 가게 되고, TC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극전인 전개 끝에 TC는 체제의 역설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개인의 시간을 소유하고 있던 체제를 다시 개인에게 시간을 돌려주었을 때, 개인이 35년을 버텨가고 있는 그것을 체제는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전략으로 잘 나타난다. ‘총파업’의 논리와 소박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근본생태주의자의 논리, 지역화폐의 논리 등과 맥이 닿아있다.
결국 TC는 분 단위 화폐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국민이 소유한 T를 다시 체제가 구매하는 것이다. 35년에 해당하는 화폐=시간을 말이다. 그리하여 다시 TC가 사는 나라는 경제적 유동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결말은 두 가지이다. 그 중 두 번째 결말을 소개해 보겠다. TC가 사는 ‘어떤 나라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잠식했다. 아름 아닌 “혹시 국민들이 사회에 필요한 일을 안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이었다. 정부 정책자 중 누군가 물처럼 모든 사람이 꼭 사용해야 하는 자원에 세금을 물리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물의 가격이 엄청나게 뛰었다. 집에서 상수도를 사용하려면 ’수자원은행‘이라는 기관을 거쳐야만 했다. 물 값이 너무나 비싸서 가정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사용하려면 35년 만기로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는 ’시파남‘의 처음 상황과 흡사하게 돌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무언가를 발명한다. 예컨대 위의 두 번째 결말처럼 비싼 물 값을 치르기 위해 평생 동안 갚아나가야 할 대출제도가 생길지도 모른다.’
어떠한가? 유동성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자신의 집을 살 수 있는 인간성을 회복한 사회가 도래했다는 첫 번째 결말과 달리 두 번째 결말이 우리사회와 더욱 닮아 가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밝히듯 그의 사상적 바탕이 인간성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에리히 프롬)와 연관이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결국 체제(시간)가 인간의 주인이 된 후 공리와 자유는 어디로가 버린 걸까? 저자는 눈에 보이는 개인의 생활로부터 시작하는 암울함과 체제로부터 희생되어가는 사각지대를 가리킨다. (예컨대 저 많은 병원과 부동산들을 볼 때 느끼는 두려움 외로움과 같은 것일 테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아파서 저 병원을 채워야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빨리 팔고 새로운 집을 사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유에 의미(개인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인간성회복과 새로운 형태의 복지국가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성(장점으로서의)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진 않는다.
부동산의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며 임노동으로 체제 순응적 인간을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주거의 개념은 처절하게 파괴되고 있다. 제3금융권은 개인의 경제를 파탄내고 있고 생존과 생활을 위협할 정도로 체제는 개인을 착취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우리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의 자유는 누가 빼앗아간걸까? 나의 욕망은 과연 온전한 나의 욕망이었을까? 타인의 욕망, 자본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물음의 방법론에 깊게 동의하며, 동시에 모두가 ‘자신의 시간’의 주인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