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간을 믿어요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평점 :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외계인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외계인은 나에게 백 일 동안 하루 한 편씩 맘에 들만큼 아주 재밌는 영화를 권해달라고 이야기했고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내가 사는 도봉구와 전 지구를 멸망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나의 생사여탈권, 아니 전 지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외계인의 '맞춤형 출발 비디오여행'스러운 발단이다.
외계인이 수많은 집에서 왜 나를 찾아왔는가. 가장 꼭대기 집이라서 우리 집을 골랐다는 외계인의 말에는 오류가 있다. 우리 집은 꼭대기층의 바로 아래 층이기 때문. 외계인은 왜 탑층인 15층을 택하지 않고 14층에 사는 나를 찾아온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5층 1호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층간소음에 예민한 내가 고르고 고른 탑층의 바로 아래층에서 나는 상당기간 조용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재작년 어느 날 위층에 누군가 이사를 온 이후로 그 평화에 문제가 생겼다. 언젠가부터 잠이 들만한 자정 무렵부터 새벽의 가운데까지 시작된 콩콩콩콩 하는 소리는 한번 열린 나의 귀를 점점 더 크게 열었다. 위층을 찾아가보니 절대 초인종을 누르거나 찾아오지 말라는 무서운 메모와 경고가 붙어 있고, 관리실에서도 1501호에서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연락을 못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경찰도 나를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도 소음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상당한 불운이 아닌가.
나는 1501호에 사는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밤마다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렸으며, 아파트 주민과 관리실에서 얻어걸린 정보로 1501호 거주자가 식당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느 식당인지 알아내서 상대방을 만나서 이야기 할 것이다. 내가 층간소음으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식당을 찾아간 순간 나는 이 싸움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곳에서 만났던 어떤 사람에 대해서. 내가 찾는 사람인지 누구인지 이 사람인지 아닌지가 결국은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발 비디오여행을 제작하는 외계인으로 시작된 이 책은 갑자기 냉면을 먹고 싶게 하기도 하고, 한때 기아타이거즈를 응원하던 나를 생각나게 하고, 누군가와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손을 잡던 순간들을 생각나게 하고, 그래서 결말까지 나에게는 너무나 완벽한 책이었다. 참 마음에 들기 때문에 오히려 리뷰를 쓰는데는 주저했고,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책 속에 군데군데 묻어있는 지난 책들의, 음악들의 흔적들이 반갑고 기뻤다. 제목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동명의 노래. 이 책을 잡아들면서부터 하루에 몇십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그냥 그 노래가... 듣고 싶었다. 지난 <2인조>에서 처음 발견했던 '생사여탈권' 이라는 단어를 다시 발견했고, 이런 이런 한 사람을 마음에 둔 게 큰일이라는 문장은 노래 '가장 보통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노래와 책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지금도 어디에서든 '보통'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게 되버린 나에게 이 책은 너무 좋음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아 그냥 별이 다섯개... ★★★★★
언제나 이석원 작가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마치 마음에서 손으로 왕창 끄집어 낸 것처럼 표현하는 문장을 보고 있으면 즈므집 냉면이라도 열 그릇 사주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인덱스를 덕지덕지 붙여도 모자라고 또 모자라서, 그냥 손에 잡힐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서, 그냥 또 책을 내 주셔서 고맙다는 말 밖에는 더 할 말도 없다. 이 책에 작가님의 생사여탈권이 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또 당분간 나는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자. 여기 이석원 작가님의 생사여탈권2야. 한번 읽어 볼래?"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펴면 줄줄줄 잘 읽히는 이 책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르겠다. 진짜 작가님이 겪었든 겪지 않았든 혹은 일부만 겪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끝을 생각하며 망설이거나 걱정하거나 두려웠던 마음들은 버리고 순간을 믿는 마음으로 살자. 결국 내가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내 옆에 있었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금은 '지금'이라는 철 지난 명언들을 다시 생각해 볼 것. 지나온 시간도 다가올 시간들도 결국은 다 순간을 위해서 존재했고 존재할 것. 네, 알겠어요. 저도 순간을 믿어요.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