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백수 케포이 6번째 강좌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는 달인 시리즈 중 가장 매력적인 주제가 아닌가 싶다. 평소 주요 관심사였고, 이 책을 고를 당시 마침 연애의 늪에서 한창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연애하기 이렇게 힘들까? 라는 의구심에 빠져있던 즈음, 호모 에로스가 눈에 띈 것은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적이었다. 모르긴 해도 짝사랑과 집착의 구렁텅이에서 아우성치던 내 신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다짐하고 짝사랑한 여자와 연락을 끊은 후, 무작정 서점에 갔다. 과감히 연락을 두절했으나 이때만 해도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백수 신세에다가 짝사랑의 피로감으로 넋이 나간 반(半) 좀비 비슷한 존재라 할까. 그저 책을 읽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 막연한 바람으로 서가를 배회하던 중, 1시간의 서성임 끝에 호모 에로스를 발견했다. 생각해보면 우연이기엔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이 꽤 극적이다. 호모 에로스를 읽고 호모 시리즈, 고미숙 샘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며 마침내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된다. 물론 수유+너머는 예전에 활동한 적도 있고 잘 알고 있었으나, 거의 잊고 지내다 거의 2년 만에 클릭한 것이다. 거기서 만난 백수 케포이 모집 공고는 내 삶의 궤적을 바꾸게 되고, 그 얘기는 지금까지 써 온 글에 잘 나와있다. 짝사랑의 실패를 예감했을 때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고 외로움에 치를 떨었으나, 그로 인해 더 열린 시공간과 풍성한 관계망으로 이동했으니 이 또한 작은 인생 역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를 쌀쌀맞게 거부했던 그 친구에게 이제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이런 여러 이유로 호모 에로스 강좌에 각별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모든 일은 바로 에로스에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백수 케포이에 합류한 게 ‘외로워서’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괜찮은 사람 만나 연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같은 백수라 꿀릴(?) 것도 없고 공부하러 온 백수라면 성향도 비슷할 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 8주간의 여정을 함께하며 이런 유쾌한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내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당사자가 나 자신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다른 이의 경우라도 반가운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 성사 여부는 천천히 밝혀보기로 하자.

  보통 연애라 하면 청춘 남녀의 사랑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다른 주체들의 소외현상이 발생한다. 신체적으로 청춘이 아닌 세대의 사랑은 다른 언어로 희화화되곤 한다. 이를테면 중년의 로망, 노년의 주책처럼 말이다. 그래서 싱싱한 육체를 가진 남녀가 벌이는 사랑이 우리 시대 사랑담론의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디 사랑이 남녀의 이성애뿐인가? 우정도 사랑이고, 사제간의 정도 사랑이며, 부모 자식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고미숙 샘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사랑을 흡수한다고 말한다. 이런 구조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힘을 원천 봉쇄해버린다. 연인에게는 하루에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수없이 하지만, 부모님에게 그 한마디가 무척이나 어색한 것은 다름아닌 이런 담론구조하에 있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정해진 틈으로만 흐르는 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하게 퍼질 수 있고, 그래야 빛을 발한다. 이성애만 사랑으로 여기는 것은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가? 사랑은 최고조로 촉발된 신체상태이다. 그 무엇과도 접속할 수 있고, 자신을 낯선 곳으로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보통 사랑하면 만사에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관대해진다. 사랑에 빠졌는데 인상 쓰고 있는 이는 드물다. 짝사랑이든 뭐든 간에 사랑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착하게(?) 쓰려고 한다. 이런 열린 마음가짐은 무한한 소통과 접속을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랑하면 대담해진다. 평소 소심한 이도 사랑을 위해서면 과감해지니 이야말로 백척간두 진일보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 무엇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아량에 절벽에서 떨어질 수 있는 용기까지 있으니 가히 군자(君子), 요즘 말로 대인배라 할 수 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이는 적이 없다고 했듯이 무적이다, 무적! 사랑의 파동으로 둘러친 신체는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사랑의 달인이 된다는 것은 이 파동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수준에 도달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사랑의 달인이기는커녕 흉내도 못 내고 있는지라 이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현재로선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 대해 더 이상 쓸 수 없다. 아는 만큼만 말할 수 있나니! 여기서는 그저 간만 조금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군자, 무적의 대인배가 될 수 있는 찬스가 사랑의 달인 쿵푸 수업에 담겨있다면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사실 별거 없다. 사랑은 외부에 거(居)하고 있지 않고, 내부에 있음을 깨달으면 절반은 끝이다. 보통 나랑 어울리는 사람을 못 만났다고 생각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냉정히 말하면 내 수준이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수준이라 함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평소 일상의 배치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외부문제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갖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일례로 내가 연애를 잘(?) 했을 때는, 내 목표와 가치관에 믿음이 있을 때였다. 점점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세상의 기준, 취업이나 연봉 같은 것에 신경을 쓰면서부터였다.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고 남의 것을 갖다 쓰니 오래 갈 턱이 없다.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애인에게 짜증을 내던 찌질한 모습을 떠올리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의 잣대에 자신을 맞춰 헤매는 꼴이라니 블랙 코미디도 이런 게 있을 수 없다. 사랑하면 군자가 된다고 했는데, 대인배가 일순간에 소인배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상대가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한다. 딱 내 존재의 크기만큼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쿵푸인 것은 알아야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귀고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마다 일정한 패턴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다르나, 파고들어가면 비슷한 요인으로 끌리고 또 미워한다. 그것이 계속 돌고 돈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삶의 동선을 바꾸는 일이다. 매번 같은 길로 가면 똑같은 풍경만 접할 뿐이다. 봤던 영화 돌려보는 것처럼 레퍼토리가 뻔하다. 그래 놓고 재미없다고 하면 난감하다. 다른 그림을 보고 싶으면 다른 영화를 틀어라. 자신의 삶에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낯선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대라. 사람의 세포는 한 달 정도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로 생성된다고 한다. 즉 한달 전의 나는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무의미한 것이다. 새로 셋팅한 세포로 조성된 내 신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데서 개운(開運)은 출발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어디인지 직시해야 한다. 길가다 넘어지면 창피하다. 무릎에 피가 철철 흘러도 주변 눈치 보느라 모른척하고 걷거나, 아파 죽겠는데 아무도 없는 곳으로 전력 질주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정말 자의식은 신체의 고통마저 뛰어넘는가 보다. 이러면 어느 곳에서 넘어졌는지 알 수 없다. 창피하고 고통스러워도 나중에 또 그런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사랑은 나로부터 비롯함을 깨닫고, 걸려 넘어진 지점을 눈 부릅뜨고 볼 수 있는 각오가 섰다면 달인이 되는 기본 초식은 마친 셈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신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언제 어디서나 무엇과도 사랑할 수 있는 호모 에로스의 세계로 말이다. 이 글을 구상하고 있던 즈음, 결혼한 ‘첫사랑’이 아주 오랜만에 안부연락을 해왔다. 첫사랑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내가 이 사람을 ‘첫사랑’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다름아닌 전화통화를 밤새도록 할 수 있던 첫 이성친구였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리라. 지금도 여전히 연애에 미숙하지만, 예전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 못 붙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희로애락이 표정에 바로 드러나는 신체특성 때문에 대화할 때 그 어색함이란!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이 정도니, 전화통화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면전에서 얘기할 때는 상대의 반응을 어느 정도 봐가며 대처할 수 있으나, 전화는 오직 목소리로만 대화하는 것 아닌가. 할 말이 딱딱 끊기고 이어지는 침묵에 황급히 작별인사 후 수화기를 내려놓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며 놀랐던 것은 몇 십분 통화로 느꼈는데, 실제로는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이성과 3분 이내 통화를 꾸준히 실천해오던 내가,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친구와 대화 중 내가 감탄하며 던진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내가 너와 별 얘기를 다해도, 삼국지의 제갈공명 출사표 얘기까지 나눌 줄은 몰랐다.’ 신변잡기부터 철학적인 얘기, 삼국지 출사표까지. 한마디로 대화의 스펙트럼이 차고도 넘쳤기에 쉬지 않고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미숙 샘의 말처럼 ‘서사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사귀지도 않고 기간이 길었던 것이 아님에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이리라. 재미있는 것은 그 친구가 연락한 배경이다. 친구 말로는 고미숙 샘의 특강을 듣고, 오랜만에 수유+너머에 접속했는데 거기서 활동 중인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백수 케포이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자극 받았다고 하니, 쿵푸는 이렇게 오래된 첫사랑도 촉발하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사랑은 이성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한때 서사를 즐겁게 나누던 벗과의 조우가 쿵푸 덕분이라면 오버일까? ^^

  첫사랑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서사를 주고받았는데 왜 헤어졌냐 하면 헤어질 때가 되었기에 그랬다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다. 고미숙 샘은 이를 ‘시절인연’이 다했다고 일컫는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데 파도가 안치길 바랄 수 없다. 파도는 흐름이고 그것이 부재하면 헤엄 자체를 할 수 없다. 인생의 파도가 있기에 희로애락이라는 물놀이도 즐길 수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때를 안다는 것은 파도를 타고 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몰아치는 파도를 인정하고 그것과 어울림을 뜻한다. 파도타기의 명수들은 파도와 싸우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유히 나아간다. 그런데 대개는 시절인연이 언제 발생하고 소멸하는지 알기 어렵다. 아니 지금 누군가와의 만남이 진짜 사랑인가 구별하기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시절인연이라는 파도가 오고 가는 흐름을 안다면 파도타기가 한층 수월할 것이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은 내 일상의 동선을 상대와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 따져보면 된다. 이를테면 나는 여자친구와 책을 함께 읽고 공부하고 싶은데, 그녀는 공부가 딱 질색이라면? 백수 동학인 장영진이 고미숙 샘에게 호기롭게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선생님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담한 질문에 모두 웃었으나 샘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수유+너머에 나오세요. 매일 같이 밥 먹고 공부하면 친해질 수 밖에 없어요.” 요컨대 삶을 나눌 수 있는 장(場)에 함께 설 수 있는지 여부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처럼 쿵푸의 욕구가 있는 백수들은, 함께 공부하는 백수 동무들과 연애하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이 공부하고 연애도 하고 일석이조! 반대로 나는 싫은데 상대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면 같은 전략을 구사해보자. 쿵푸 수련 중인 백수라면 책 함께 읽으며 토론하자고 제안하라. 용하게도 꾸준히 대화가 이어진다면 싫다가도 좋아져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귀찮은 짐을 떼어내는 것이니 이 또한 일석이조! 그만큼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기본 바탕이다. 사회생활하며 숱한 만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결국 일상의 한 시절만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가서 만난 인연들, 계속 만날 것 같이 해도 한 달을 넘기기 어렵다. 만남과 헤어짐은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 파도를 타고 가다 보면 드넓은 대양(大洋)에서 어떤 모습으로 또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일. 그때 만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줘라. 당신이 바다를 항해하며 만난 다양한 삶의 서사를.

  백수 케포이 시즌 1, 8주간의 여정은 이미 끝났다. 이 글은 졸업 후 쓰고 있다. 기록을 남기는 일은 스스로 삶의 서사를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서사라 함은 얘깃거리를 뜻한다. 남의 것, 즉 연예인, TV 드라마 주인공 얘기 말고 자신의 이야기 말이다. 백수 동학 차성덕은 서사의 달인이며 스트립쇼(?)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발리는데 아무나 그렇게 못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까발릴수록 나눌 이야기가 퐁퐁 샘솟는다는 점이다. 속마음, 비밀을 다 드러내면 내가 텅 빌 것 같은데 그 반대라니 희한한 일이다. 내가 먼저 속내를 털어놓으면 상대방도 자연스레 이에 호응한다. 이렇게 서사는 또 다른 서사를 낳는다. 이야기는 입과 입을 통해 널리 전해지고 그 수만큼 풍성해진다. 그리고 서사는 당신과 나 사이를 이어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가? 당신 삶을 이야기로 가득 채우라.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천일 동안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공이라면, 이미 당신은 쿵푸의 고수일 것이다. 임꺽정과 그의 형제들도, 연암(燕巖) 박지원과 그의 친구들도 모두 수다의 달인이라고 하니 이는 믿어도 좋다. 앞서 백수 케포이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스캔들(?) 여부를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사실 그런 것이야말로 물밑 속에 잠복하고 있기에 파악하기 어렵다. 고미숙 샘은 우리들더러 ‘모범생 백수’라고 타박하고, 백수 상호간 스캔들도 없음을 개탄하셨지만 그야 모를 일 아닌가. 졸업 후 각자의 자리에서 뭉치고 흩어지며 꿈틀대고 있는 그들이 또 어떤 모색 중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양생(養生)의 지혜는 멀리 있지 않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천하를 헤맸으나, 우리는 쿵푸하는 지금 여기서, 동학들과 함께하며 생명 연장의 꿈을 실천하고 있다. 그것도 재미있는 삶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말이다. 이제 연암 그룹, 임꺽정과 함께하는 백수들의 향연을 즐기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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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48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4
채운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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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강좌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삶의 기술로써의 예술 후기를 쓰기 위해 며칠을 끙끙 앓았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에 여전히 짓눌려 있는 건가? 예술하는 백수 혹은 백수=예술가라는 낯선 배치 덕분인지 이 글은 초장부터 헤매고 있다. 백수가 예술한다는 말은 어딘가 밑도 끝도 없어 보이고, 더구나 백수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니!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가 익히 들어온 예술인들도 이른바 뜨기 전에는 한량인 경우가 많다.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을 집필하기 전, 시사저널 편집장을 그만둔 야인 신세였다. 하루는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새 자전거를 사오자 부인이 타박한다. 이 양반이 돈은 안 벌고, 다 늙어 무슨 자전거냐? 김훈이 응수한다. 모르는 소리 마라, 이 자전거가 우릴 먹여살릴거다. 뜬다는 것은 속세의 시선으로 본 것이지, 예술가들은 그냥 계속 자기식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뜬 것이지, 뜨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 김훈은 소싯적부터 문재(文才)를 날린 기자로 유명했다. 내공이 있는 자는 세상이 언젠가는 그를 찾는다. 안 찾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왜? 매일 예술하니까! 김훈은 소문난 자전거 광으로 알려져 있다. 자전거에 수백만 원 투자하는 것은 기본이란다. 자전거를 좋아해 몰두했고, 몰두는 새로운 장(場)을 조성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죽이는 경험에 도달한다. 우리는 뭐 좋은 일 있으면 죽여준다고 말하곤 한다. 쾌락의 절정은 죽음 근저까지 가는 거라고 하는데, 이 말이 제대로 짚고 있다. 역시 언어의 의미를 파고들어가면 재미난 구석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 예술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써 기능한다. 예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일상에서 춤춘다. 김훈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죽이는 경험을 더구나 굉장히 몰입해서 하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결과적으로 자전거 여행은 대박을 쳤고, 김훈 개인에게는 소설가라는 새로운 영역과 접속한 사건이 되었다. 이 또한 그가 백수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언론사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것대로 명성을 날렸겠으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주옥 같은 작품 또한 없었으리라. 백수가 아니면 어찌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으랴? 고로 예술은 백수의 지위를 획득(?)해야 비로소 꽃피운다. 그러니 백수들이여, 기죽을 것 하나 없다. 백수가 된 것은 예술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찬스이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예술해서 죽이는 경험도 할 수 있을 뿐더러, 시절을 잘 타면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 단, 돈을 바라고 하는 예술은 그 자체로 몰락할 테니 명심해야 할 것! 돈을 번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과 진배없다. 타인의 시선에 묶여서는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재미도 없고 흥이 나지 않는다. 당연히 몰입할 수 없고 죽이는 경험 또한 할 수 없다. 그래 갖고 예술할 수 있을까? No! 자, 이제 앉을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예술을 현실로 불러내보자. 그 동안 예술가는 위대함, 신비주의, 광기, 괴팍함 등과 같은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이런 근거 없는 짝짓기는 예술을 우리의 일상과 분절했다. 예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걸로 여겨지고, 스스로를 극장 혹은 미술관에서 소비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묶어놓기에 이른다. 족쇄 찬 예술적 능력!



예술가는 명작이 아닌 문제작을 내놓는 사람이다. 익숙한 풍경에 낯선 것을 들이댄다. 낯섦은 불편함을 낳고 불편함은 의구심과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낯섦의 정체가 도대체 뭐야? 질문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되고 새로운 이치를 탐색할 수도 없다. 백수가 일상에서 예술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초식이 질문하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매주 수요일 오전 강좌 시작 전, 백수 동무들이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했다. 동무들은 아침 9시 20분 즈음까지 수유+너머에 도착해 동아리끼리 그날 벌어질 강좌 주제와 관련한 토론을 벌인다. 토론하며 여전히 궁금하고 풀리지 않는 것을 추려 질문을 만든다. 즉 그날 강좌가 알차기 위해선 순전히 질문의 수준에 달린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강좌는 이내 지리멸렬해진다. 실제로 어떤 때는 강의는 일찍 끝났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이 나오지 않아 서로 멀뚱히 바라만 보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그때는 정말 사람들 속에 묻혀있어도 진땀이 난다. 강의하는 선생님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서애 류성룡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문은 정밀히 사색하고 자세히 질문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너희들은 언제나 사색을 깊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지 않으며, 궁금한 점이 없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책을 많이 읽는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른바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질문의 달인이라 할만하다. 아니, 질문의 달인이기에 예술을 하는 게 맞겠다. 권력자들에게 이들은 골칫덩이와 같은 존재다. 자꾸 딴지를 걸고 기성 질서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니 성가실 만도 하다. 예술과 불화한 권력은 예술을 제도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예술가란 표상에 특유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이 얘기는 앞서 극장과 미술관에서 소비되는 예술과, 광기와 질병으로 상징되는 예술가에서 말한바 있다. 한마디로 대중은 예술과는 담을 쌓은 존재로 만들어진다. 그와 함께 질문하는 능력 또한 상실한다. 예술은 아무나 하나? 그렇다, 아무나 한다! 단, 질문할 수 있는 감각만 되살린다면.



무작정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쪽으로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파괴적인 형태로 드러날 지도 모른다. 폭력과 마약 등은 반사회적인 모색임에 틀림없으나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억압하기에 기본적으로 닫힌 질문에 불과하다. 채운 샘은 진정한 예술하기란 새로운 삶의 출구를 여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져보면 우리들이 백수 케포이에 합류한 것도 무엇인가 삶의 출구를 여는 행위이다. 나는 회사생활을 하며 무언가 빠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막연한 상태에서 덜컥 취업을 했고, 당연히 끊임없는 결핍에 시달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기 전에 할 일은 나를 잘 아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취업, 퇴사, 취업의 무한 반복에 빠져 하릴없이 늙을 뿐이다. 떨어져서 바라보면 다시 보인다고, 새로운 삶의 출구는 내가 처한 시공간을 근본적으로 재조직해야 뚫을 수 있다. 찾는 자에게 길은 열리니, 마침 나타난 백수들의 정원은 운명과도 같은 것일까. 그 운명 덕분에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 세상만사 참 모를 일이다. 물론 눈앞에 운명이 나타나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음은 물론이다. 사주명리학 상으로 봤을 때 자신을 생(生)해주는 것은 방법으로는 공부요, 육친(肉親)으로는 어머니이다. 공부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또한 어머니의 모성은 부성과는 또 다른 본능적인 것이다. 이런 점을 옛 선인들은 진작부터 깨닫고 계셨던 것 같다. 새로운 출구를 여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것, 즉 공부로써 이뤄진다. 공부는 모르는 것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한다. 익숙지 않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 끊임없이 낯선 영역으로 접속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발전할 수 없다. 두려움은 낯설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회피한다.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했는가, 천길 낭떠러지에서 두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법. 매번 강좌 때마다 질문 만드느라 혹독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 수준이 떨어진다고 타박 받는 형편이니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낯선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선 역으로 익숙한 곳이 어디인지 살펴보면 된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장 익숙한 존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고 잘 모르는 건 어리석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만큼 막연한 것도 없다. 답이 나올 수 없다. 왜? 질문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채운 샘은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뭘 욕망하는지 질문하고, 더 구체적으로 지금 뭘 할 수 있는지 따져보라고 한다. 말하자면 질문을 좁혀 들어가는 게다. 예술과 사주명리학(이하 예명) 동아리 첫 시간이 문득 떠오른다.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기로 했다. 약 15명 남짓의 인원이었기에, 짧은 인사말과 함께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천만에. 사주명리학 동아리를 선택한 것부터 시작해 구구절절 사연이 이어져 자기소개만 2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사람들이 그 동안 고립된 백수 생활에 찌들어 할 말이 참 많았나 할 정도였다. 자기소개라기 보다 거의 인생역정 발표였으니 짐작이 가는가. 이들이 예명을 선택한 것은 거의 한 가지 이유로 모아진다. 나를 알고 싶다는 것.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욕망의 뿌리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욕망은 명예욕, 식욕, 음욕, 재욕 등 원초적인 사항이다. 평소에는 점잔 빼고 있어 가려져 있지만 인간의 행동은 대개 이 욕망에 의해 결정된다. 참고로 나는 무지하게 명예욕이 강한 인간이라고 사주에 나와있다. 명예욕 때문에 남들 앞에 잘 보이려고 하고, 자의식도 세다. 과다한 명예욕을 내려놓는 방법은 공부다. 배움 없는 명예욕은 속 빈 강정과 같다. 한마디로 아는 것도 없는 자가 아는 척, 있는 척 하는 게다. 명예를 향한 욕망이 공부로 흐르면, 자연스레 명예욕은 가라앉고 내실은 충만해진다. 내실이 충만해지면 차츰 주위의 인정도 받으니 저절로 명예욕은 채워진다. 즉 비우는 것이 곧 채우는 것이다. 꽉 막혀있던 수도관 밸브를 열어야 물이 통하듯이, 욕망의 흐름 또한 원활히 소통할 수 있게 터놓아야 오행이 순환하고 우주가 생동할 수 있는 이치인 게다. 이런 것은 글을 쓰면서도 매번 느끼는데, 자꾸 독자를 의식하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 타인의 칭찬을 받고 싶은 인정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상황은 명료해진다. 사실 할 수도 없는 걸 욕망하면 뭐할까? 짝사랑의 비탄에 빠지는 일이 대개 이런 식이다. 상대의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 마음까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 답답하고 가슴이 턱 막힌다. 번뇌와 망상은 이처럼 자신의 신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자라난다. 초보자와 탁구를 칠 때 상대 대신 쳐줄 수는 없다. 그저 잘 받을 수 있게 넘겨주는 것까지 딱 내 몫이다. 몫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의 현 위치가 드러난다.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는 순간, 어디로 갈지도 정할 수 있다. 방향성 상실에 기여하는 것이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불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시간여행의 달인이기도 하다. 오늘 살아가며 옛날의 상처와 몇 십 년 후 일까지 펼쳐놓고 고뇌한다. 이쯤 되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초월적 존재라 할만하다. 베르그송은 과거와 미래가 펼쳐지는 것은 언제나 현재라고 말한다. 과거에 얽매인다는 것은 지금 과거대로 산다는 뜻이다. 나이는 먹었으나 여전히 옛날 습관대로 산다면, 그는 여전히 과거의 존재인 것이다. 시간여행은 이처럼 별게 아니다. 채운 샘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불러들여 그것을 떨쳐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기억과 불안을 눈앞에 끄집어내야 철저히 깨부술 수 있는 것이다. 2시간에 걸친 자기소개는 과거와 미래에 들어앉은 망상이라는 귀신을, 현재로 소환해 벌이는 한바탕 질펀한 굿판이었다. 망상아 물러가라! 호통을 칠 수도 있고, 이제 편히 쉬시오 토닥거릴 수도 있으니, 그것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하면 될 일. 이렇게 울고불고 난장을 치르고 나면 새로운 현실이 펼쳐진다. 그 토대에서 삶의 기술로써의 예술을 비로소 써먹을 수 있다. Here & Now! 과거와 미래의 귀신은 승천했고, 내 몸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기에 낯선 것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초식도 깨쳤다. 또한 백수라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회환경도 마련되었으니 이제 죽이는 경험을 신나게 즐기면 된다. 백수가 예술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운동 끝.



힐러리 스웽크가 주연한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 LA 최악의 우범지대 중 하나인 롱비치 윌슨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실화이다. 거리에는 갱들의 총격전이 난무하고, 인종갈등과 마약 등 이곳에 사는 아이들의 하루하루는 전쟁과도 같다.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그들에게 학교 수업 따위는 의미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임한 에린 그루웰(힐러리 스웽크) 교사는 문학과 글쓰기로 소통을 시도한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으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인간의 모습을 배우고, 글쓰기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마주하며 그들은 점차 성장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한 반에도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 인종갈등이 첨예하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그들에게 에린은 라인 게임을 제안한다. 라인 한 줄을 그어놓고 질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라인 앞에 서는 게임이다. 폭력으로 친구를 잃어본 사람 선 가까이 와봐 두 명, 세 명 이상. 게임을 진행하며 원수 같던 그들 사이에선 묘한 공감대가 흐른다. 내가 경멸하는 저 녀석도 나와 비슷한 사연이 있구나 하는.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굿판을 골방에서 혼자 하지 않고 동네 사람 다 불러놓고 하듯이, 상처의 치유와 극복은 사람들과 함께일 때 이뤄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적은 종종 일어난다. 기적이라고 했지만 여기선 예술이라고 해도 상관없겠다. 프리덤 라이터스의 학생들은 150명 전원이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백수 케포이필리아 졸업(?)을 앞두고 각 동아리끼리 발표준비에 분주하다. 영화 동아리는 촬영 막바지에 도달한 것 같고, 베이커리 동아리는 어떤 따끈한 빵을 내놓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지 기대된다. 예명은? 글쎄, 신문을 만든다고도 하고, 만화를 그린다고도 하고 지금으로썬 베일에 가려 있다. 어떻든 간에 프리덤 라이터스의 학생, 양산박 호걸, 청석골 두령들이 그랬듯이 유쾌하고 죽이는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장황한 글을 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수다쟁이로 만드는 그들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예술은 음악회, 미술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지지고 볶는 공동체 안에 이미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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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백수들이 모여 영화를 찍고, 빵을 구워 나눠먹고, 게다가 사주 팔자를 본다고? 허허, 이런 기이한 모임이 무엇이란 말인가. 각자의 사랑방 아지트에 은거하던 강호 백수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에서 기이한 인연은 시작된다네. 그렇다네, 우리가 만났지. 그래서 모든 일은 비로소 시작한 걸세. 영화를 찍음은 곧 스스로 미디어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빵을 굽는다는 것은 자급자족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며, 사주명리학을 배움은 스스로 운명을 통제하겠다는 뜻 아닌가? 천시와 지리와 인사를 아우르려는 이들의 시도, 참으로 발칙하도다. 북송(北宋) 말기 양산박에 모여든 108명의 인간 군상을 살펴보자. 파직당한 관료, 누명을 쓰고 쫓기는 죄인, 도사, 가짜 승려 등 그 면면도 다양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기존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탈주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1인 1개인기를 보유한 그들은 양산박이라는 공동체에서 능력을 꽃피운다. 눈이 밝은 놈은 망을 보고, 셈이 빠른 자는 회계를 맡고, 술고래는 술을 빚고, 목소리 좋은 놈은 연설문을 낭독하고, 금군(禁軍) 교위 출신인 자는 무술사범이 되는 식이다. 사회에서 쫓겨난 밑바닥 인생들이 우울해하기는커녕, 희희낙락하며 하늘을 대신해 도를 실천한다고 (替天行道) 왁자지껄하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아마 유머의 중요성을 진작부터 알고 실천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처음부터 이렇게 유쾌했던 것은 아니다. 양산박은 조정으로부터 찍힌 도적떼의 소굴이었고, 이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주민등록증 말소를 의미했다. 우울함을 극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친구, 수다 떨 수 있는 친구이다. 희한한 개인기를 지닌 이들 108명이 한 자리에 모이면 ‘개그 콘서트’가 시도 때도 없이 열렸을 테니 우울할 틈이 없었으리라. 백수들의 화려한 개인기의 향연. 그 백수본색이 우정의 정원에서 막 드러나려는 참이다.

  우정의 정원의 핵심은 동아리 활동이다. 백수 케포이필리아 공고에 끌린 것은 백수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음도 신기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따끈따끈한 동아리의 존재 덕이 컸다. 문화센터니 뭐니 요즘 지식을 쇼핑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들과 백수 케포이의 가장 큰 다른 점이 바로 동아리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네트워크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는 아이러니에 빠져있다. 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빠르고 원하는 때에 타인과 연결될 수 있게 되었으나, 정작 연결도구만 있고 연결대상이 쑥 빠져있는 모양새이다. 휴대폰 전화번호부, 네이트온 친구목록은 넘쳐나나 연락할 친구는 마땅치 않은 현실. 그것은 아마 이해관계에 얽매여 관계의 빈곤을 호소하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백수 케포이필리아 공고가 수유+너머 게시판에 처음 올라왔을 때가 기억난다. 며칠 만에 조회 수는 급격히 올라갔으나, 정작 신청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먼저 신청하는 데 부담을 느낀 이들이 눈치를 본 것이리라.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백수들의 모임이라는 기막힌 발상에 흥미를 느꼈지만 누가 먼저 첫 테이프를 끊느냐가 문제였다. 영화를 만드는 한지현은 백수 케포이의 최연소자이며 첫 번째 신청자였다. 그는 목요등산반 멤버이기도 한데, 이미 히말라야 로체샤르 등반을 경험한 베테랑(!) 산악인이다. 산에서 신출귀몰 가벼운 몸놀림을 자랑해 날다람쥐라는 별호를 갖고 있기도 한 유쾌한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도 누군가 먼저 신청할 줄 알고 한 동안 기다렸는데 어떤 움직임도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등록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봇물 터진 듯 신청자가 폭주해 애초 20명 정원이 40명 정도로 대폭 늘어나기에 이른다.

  핀란드 태생의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기발한 자살여행’을 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가여운 이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이 덧없고 살기가 왜 이렇게 힘들고 팍팍한지 콱 죽어버리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희한한 광고문구를 접하게 된다. '당신만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과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편지를 써라. 우리가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암호는 공동의 시도.' 무슨 광고가 이렇담? 혹시 이상한 종교단체에서 선동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신이 지쳐있는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침내 답신을 써내려 간다. 그렇게 그들, 즉 핀란드 전역의 자살자들은 구름처럼 모여든다. 이제 그들의 죽음을 향한 여행은 시작된다. 유럽 전역을 호화 전세버스를 타고 (전세버스 주인 또한 자살희망자이다) 좌충우돌을 벌이는 그들 구성원은 참으로 다양하여, 연령을 가리지 않고 성별, 직업, 빈부 격차를 따지지 않는다. 마치 중국 춘추전국시대, 4대 공자(公子) 중 한 사람인 제나라의 맹상군 휘하의 식객들 마냥 다양한 재주와 능력을 지녔다. 앞서 언급한 수호지의 양산박 호걸들, 공동의 시도를 모색하는 자살단, 백수 케포이의 동무들 모두 홀로 있지 않고 모였기에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다. 시련이 만남을 이끌고, 만남이 사연을 낳으며, 사연은 서로의 성장을 촉발한다. 채운 샘은 ‘낯선 사람, 사건이 자신을 새로운 경지로 이끈다’고 했다. 백수 케포이 4주차, 딱 절반이 지났다. 생판 얼굴도 모르던 사람들이 백수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코뮌에서 마주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이 간다. 낯설지만 정겨운 그들과 함께 하는 이 순간, 다양한 접속과 촉발은 이뤄지고 있다.

  4주차의 주제는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돈 없이 살아가는 법’이다. 프로그램이 절반 정도 지났으면 이제 어느 정도 사람들과 익숙하고 분위기도 무르익을 때다. 반면 그만큼 마음이 풀어지기도 한다. 고미숙 샘은 ‘첫 만남은 긴장이 되기에 밀도가 높으나,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아니나다를까 절반을 넘긴 시점에 듬성듬성 빈자리가 눈에 띄고 중간 이탈자도 발생한다. 나 역시 처음 O.T때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을 떠올리면 지금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백수 케포이 참여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그, 지금 어디에 있는가? 중간 시점에 이르러 신체를 바꾸는 일에 충실했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이런 면에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이하 ‘아기자’)는 단순히 수유+너머의 과거를 돌아보자는 의미이기보다, 초발심을 떠올리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 읽는다고 할 수 있다. 프로그램 초반에는 지각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면,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은 얼마나 많은 이들과 같은 밥상머리에서 밥을 나눠 먹었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한솥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면 감춰진 자신의 모습을 여러 사람들 앞에 점차 드러내게 된다. 밥을 백 번 정도 같이 먹다 보면 그 사람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같이 공부를 하고 토론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공동체 생활은 멀리서 관찰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직접 뛰어들어 몸으로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수단인 것이다. 강좌만 달랑 듣고 돌아간다면 밥을 같이 나눠먹으며 얻을 수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수 케포이 동무 배진영은 밥 먹을 때 마다 일부러 다른 사람과 어울려 먹는다고 한다. 잘 모르는 사람 옆에 앉아 밥 먹는 일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낯선 공간에 배치하는 그가 어떻게 신체를 변환할지 궁금하다.

  수유+너머라는 학문공동체가 어떻게 발생하고 진화했는지도 궁금하지만, 진정한 나의 관심사는 백수 케포이라는 소집단이 과연 명맥을 유지할 만큼 존재의의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서로를 촉발하고 접속하는데 실패한다면 자연스럽게 백수 케포이는 사라질 것이다. 이미 2기 백수 케포이를 모집하는 공고가 올라왔다. 1기 보다 강좌도 늘어나고, 동아리는 다양해졌으며 그에 따라 가격도 올랐다. 고미숙 샘은 ‘코뮨적 주체라 하면, 스스로 그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의 문제’라고 말한다. 아무리 공동체 생활을 낭만적으로 보고 동경한다 하더라도, 눈 앞의 사람과 관계를 잘 풀어나가지 못하면 유토피아(아무 곳에도 없는 나라)를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런 역량을 처음부터 지닌 사람은 매우 드물다. 백수 케포이 활동을 하며 느낀 것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도, 선뜻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관계에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나 같은 경우는 글이라는 매개로 사람들과 접속한 사례이다. O.T 후기를 게시판에 올린 이후, 사람들은 나를 ‘글 쓴 아무개’로 기억했다. 그래서일까, 먼저 알아봐주는 몇몇 동무들 덕분에 비교적 마음 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 같다. 초반에 안타까웠던 것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픈 마음이 있음에도, ‘같이 모여 공부하자’라는 말 한마디 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어색하고 쑥스럽고 귀찮고 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모처럼 연구실에 나와도, 강좌나 프로그램이 끝나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있다가 귀가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다못해 차비가 아까울 지경이다. 강좌에서 곰 선생이 출석체크를 엄격히 하는 것을 보고 내심 반가웠다. 백수들은 신체가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한 존재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신체가 튼튼해질 때까지는 돌봄이 필요하다. 20명에서 40명으로 인원이 늘어날 때 우려했던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하다못해 50명으로 늘어나는 다음 기수는 어떨까. 인원을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들이 신체를 변혁하고, 동무들과 서로 접속할 수 있도록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자신의 일상은 스스로 알아서 조직해야 한다. 누가 하란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스승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고미숙 샘은 우스개 소리로 줄을 잘 서라고 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동아리에 줄을 잘 선 것 같다. 내가 활동하는 예술과 사주명리학 (이하 예명)은 최다 회원을 자랑하는 인기(?) 동아리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주팔자로 내 운명을 알아보고픈 통속적인 마음으로 신청했는데 갈수록 이 매력에 흠뻑 빠지고 있다. 사주팔자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지나온 행적과 앞으로 걸어갈 미래, 성격 등을 압축해놓은 ID 카드와 같다.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없는 이에게는 무의미한 한자(漢字) 여덟 글자에 불과하지만, 이보다 더 간결하게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우리의 미션은 자신의 사주를 스스로 풀이할 수 있고, 여기에 담긴 욕망이 무엇인지 통찰하는 것이다. 어떤 욕망이 나를 그 동안 지배했는지 깨닫게 되면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길 또한 찾을 수 있다. 운명이라는 말에 대해 숱한 오해가 있어왔다.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라는 말처럼 잘못 인식된 용어도 없다. 운명은 움직일 운(運), 목숨 명(命)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삶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흔히 운동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말 그대로 몸을 움직이고 주변의 배치를 바꾸니 기분이 ‘전환’되는 것이다. 기분이 전환되면 하루가 바뀌고, 나아가 일상이 변한다. 고미숙 샘이 누차 말하는 신체를 바꾼다는 것이 이런 개념이 아닐까 싶다. 고로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신체를 바꾸는 일과 상통한다. 사주명리학 공부는 운명을 바꾸는 여행에 훌륭한 지도를 선사한다. 길을 떠남에 있어 지도가 있고 없음은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온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괜한 삽질(?)할 필요가 없다. 나아가 우주의 원리와 동양사상의 정수까지 한 큐에 얻을 수 있으니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친구들과 서로 자신의 사주를 까고(?) 분석에 매진하다 보면 친해질 수 밖에 없다. 사주 얘기를 하다 보면 별의별 얘기가 줄줄이 나온다. 숨기고 싶은 가정사, 성격 등이 고해성사 마냥 나오는 통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주공부도 하고 내밀한 인생상담까지 함께 하는 예명은 참 괜찮은 동아리가 아닐 수 없다. ^^

  여기에는 예명의 매니저 장금이 샘의 몫이 크다. 장금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를 흠모해 지은 별호라 추측한다. 사주에 화(火) 기운이 많은 그는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세미나 시간마다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이는 불 같은 인물이다. 덕분에 우리 동무들은 그를 통해 화 기운의 사주를 가진 이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복이다. 도담 샘도 빼놓을 수 없다. 예명을 뒷바라지 하는 든든한 존재인 그는 우리들의 사주공부 스승과도 같다. 이런 스승들과 동무들이 버티고 있는 동아리에 들어왔으니 줄을 잘 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주공부가 흥미로운 점은 실제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이뤄진다는 것이다. 성격, 가족문제, 직업 등 거론할 수 있는 주제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다양하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백수 동무들이 서로 접속하고 촉발하는데 좋은 공부이다. 생각하건대 사주명리학은 백수 모두가 공통 과목으로 공부하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든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사주명리학 이외의 동아리 분들은 음양이 어떻고 오행이 어떻고, 혹은 수(水)기운이 어쩌고, 목(木)기운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궁금하다가도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사뭇 소외감을 느낀다고 한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동아리에서 뒤늦게 예명의 매력을 느끼고 합류한 이들도 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닌 듯 하다. 예전 글에서 백수 케포이 강좌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런 동아리 활동이나 밥상머리 같은 지점에서 사람들과 직접 어울려 부대끼며 벌어지는 상호 작용에 있었고, 그 판단은 지금까지 보아 크게 틀리지 않았다. 계속 반복하지만 공동체 생활의 핵심은 지금 내가 몸과 몸이 만나는 부대낌의 현장에 자리하고 있는가 이다. 그곳에서 멀찌감치 비켜서 있다면 공동체를 통해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만사에는 반대급부라는 것이 있다. 잃는 만큼 얻으리라. 그 반대도 마찬가지!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지 말고, 파라다이스를 함께 일구자.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그렇게 부대끼며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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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3번째 강좌가 끝나고 백수 케포이 또한 어느덧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 이르렀다. 채운 샘은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했다. 내가 마음 먹은 그 한걸음은 다름아닌 후기를 꼬박꼬박 쓰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새삼 그 한걸음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후기를 알차게 적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강좌를 열심히 듣는 것은 물론, 백수 동무들과 밀착되어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백수 상호간 벌어지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백수 케포이의 주인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씨가 언급해 화제가 되었던 말이 떠오른다.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나는 이 말을 나 스스로, 그리고 백수 동무들에게 던진다. ‘백수 동무 여러분, 백수 케포이하며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나는 분명 살림살이가 나아진 면이 있다. 외로움이 덜어졌다. 글을 올릴 수 있는 힘은 관계에서 비롯한다. 그 관계가 풍성하고 흥미로울수록 글의 길이는 점점 더 늘어난다. 후기라는 명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릴 수 있던 것은 아마 백수 동무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이 그만큼 많았던 게 아닌가 싶다. 빈곤한 일상은 풍요로움으로 채워졌다. 늘어난 수다와 글의 분량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 식으로 말해본다면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보다 많은 이들과 부딪히며 그들의 이야기와 모습을 글 혹은 사진으로 전하리라. 백만 백수 중 한 줌밖에 안 되는 40인 백수들의 사사로운 이야기일지 모르나, 이 글이 백수들의 우정의 정원에 합류할 2기, 3기 등 미래에 만날 동무들의 망설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3번째 강좌 ‘모더니티와 일상의 재배치’ 후기는 이런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다. 실은 후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게 올려 찔리는 마음이 크다. 그래도 백척간두 진일보! 백수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여러 가지 있겠으나, 무엇보다 ‘비교’당하는 것이 가장 불쾌하리라. ‘엄친아’는 연봉이 얼마네, 학교동창은 벌써 승진을 했다네 하는 소리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는 현상을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100m 경주에서 꼴찌를 달리는 듯한 기분이다. 관중들은 혀를 차며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앞서 달리는 녀석의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나 자신이 초라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이 경주를 시작했는가. ‘산이 거기 있어 산에 오른다’고 말한 위대한 산악인처럼, 그저 내 앞에 트랙이 있기에 달렸는가? 이쯤 되면 왜 ‘열나게’ 뜀박질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스타디움은 경주의 열기로 이미 달아올라있고, 세상에 달리기하다 ‘내가 왜 뛰고 있지?’ 묻는 배짱을 가진 자는 별로 없다. 일단 시작된 이상, 무조건 열나게 달려서 이겨야 한다. 아무 이유 없다. 스타디움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함성,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환호의 달콤함, 정교하게 짜인 경주의 스펙터클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어 보인다. 애니 매트릭스 에피소드 #6 ‘World record’을 보면,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육상 선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우연히 달리다가 매트릭스의 허상을 깨닫는다. 무릎의 치명적인 부상을 안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매트릭스에 불과했던 것. 그는 경기 중 무릎이 다시 파열되나 그것이 가짜임을 ‘알아차리고’ 세계신기록을 달성해버린다. 영화의 초반 내레이션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특별한 사람만이 매트릭스를 알아차린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비범한 직관과 감성, 호기심의 소유자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장 자유로운 사람만이 매트릭스를 알아차린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신체를 바꾸고, 일상을 재배치하는 자이다.’

  육상 선수는 무릎 근육파열의 허상을 인식한 후 비로소 그것을 뛰어넘었고, 우리는 그 동안 익숙하게 여겼던 가치(모더니티-근대성)를 되짚어봄으로써 자유로움을 탐색할 수 있다. 맹목적인 달리기를 멈추고 트랙 경계로 나아가 외부에 접속하는 것이다. 고미숙 샘의 ‘이 영화를 보라’에서는 모더니티에 희생당하거나 그것을 전복하는 인간 군상이 펼쳐진다. 밀양의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이사를 온다. 다소 허영기가 있는 그녀는 있는 척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한다고 과시해 결국 그로 인해 아들을 유괴당한다. 허영은 ‘있어 보이기 위한’ 욕망이며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신애가 종교에 귀의하고 유괴범을 용서하는 장면에서 또 다시 무너질 때, 그녀가 집착한 욕망이 실제 삶과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아저씨, 밀양이 영어로 뭔지 알아요? Secret Sunshine이에요. 비밀의 빛, 멋지죠?’ 밀양은 비밀의 빛도 뭐도 아니고,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새벽 시장 복판에서 삶의 이론을 펼치는 자는 한가해 보인다. 말만 화려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다. 신애는 남편의 사별, 밀양으로의 이주, 아들의 유괴, 종교 귀의 등, 인생의 변곡점마다 자의식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밀양으로의 이주는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초라한 피난이었고, 종교 귀의는 거룩한 신앙의 체험이 아닌 유치한 허세에 불과했다. 마지막 시퀀스인 종교 부흥회에서 울려 퍼지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신애의 망상이 철저하게 박살 나는 장면이다. 만일 신애가 현실을 직시해 치열하게 삶을 감내해내는 쪽으로 일상을 재배치했다면 허세 같은 망상은 들어올 틈이 없었으리라. 더불어 파괴적인 행동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라디오 스타에 등장하는 최곤(박중훈)과 그 주변인물들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모더니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물간 스타 최곤은 스타지만 반(半) 양아치에 가까운 인물이다. 스스로는 이런 모습을 락커의 자존심이라고 우기지만 되도 않는 허세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신애의 허영심과 비슷하다. 그러나 신애와 결정적인 차이라면, 신애는 언제나 홀로였고 최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최곤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신애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인 종찬(송강호)은 철저히 소외 당했지만, 최곤의 메신저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최곤과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나 그 자체로 소통한다. 다시 말하면 종찬은 그림자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림자는 티격태격하기는커녕, 말할 수 조차 없는 존재이다. 사주명리학으로 얘기하면 종찬은 신애를 생(生)해주지도, 극(剋)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볼 뿐. 그러나 최곤과 박민수는 서로 상생, 상극한다. 반 양아치였던 최곤은 이스트리버, 즉 동강(東江)이 흐르는 영월이라는 열린 코뮌에서 성장하나 신애는 밀양(密陽)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죽어간다. 신애와 최곤이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도 주목할만하다. 신애는 바람난 남편과 아들의 유괴로 말 그대로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다. 남편이 죽은 후, 신애가 선택한 곳은 다름아닌 남편의 고향인 밀양이다. 바람난 남편과 어떻게든 연결해보려는 신애의 마음을 순정으로 이해해야 할까? 신애에게 가족이 집착의 대상이라면, 최곤은 아예 가족 자체가 없다. 이는 라디오 스타 등장인물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박민수는 집에서 내놓은 가장이고, 밴드 이스트리버(노브레인)는 척 보아도 집에서 뛰쳐나온 악동 이미지이며, 라디오 방송국 본부장, PD도 좌천당해 떠도는 부평초 같은 신세, 영월 다방 김양도 절절한 방송 사연 고백으로 가출소녀임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간들인 것이다. 기존 개념으로 읽으면 참 딱하다고 혀를 찰 만도 하나, 이들은 오히려 한데 모여 유쾌한 난장을 벌인다. 가족을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들의 만남으로 빚어진 기이한 코뮌의 탄생!

  ‘별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최곤에게는 민수가 있었고, 민수에게는 최곤이 있었다. 서로를 비춰주며 그들은 열린 관계를 형성한다. 신애와 종찬? 신애는 ‘속물 같은’ 아저씨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진짜 속물은 신애였다. 현란한 망상에 빠져있는 신애보다,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종찬이 더욱 생명력이 강하다. 열린 관계는 스스로 증식한다. 최곤과 민수의 관계망은 영월에서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것은 기존의 가족과 조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변이다. 신애의 공고한 가족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면, 최곤과 민수의 얼기설기한 가족은 새로운 구성원을 끌어들여 보다 강력해진다. 그 강력함은 라디오 스타 마지막 시퀀스인 대형 연예기획사의 거액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만큼, 자본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수준에 이른다. 가족을 바라보는 두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백수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신애처럼 부여잡고 지켜내야 하는 존재인가, 라디오 스타의 인물들처럼 열린 관계로 전환할 주체인가. 백수 생활을 하며 부모 봉양에 대한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누구나 이 문제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미숙 샘은 ‘자식에게 부모는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포섭되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했어 라고 말하는 것은 정녕 비극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말이다. 이럴 때 자식의 삶은 왜곡되고, 그것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최악이다. 흔히 부모 봉양이라 하면 생활비를 일정하게 지급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사고의 수준이 돈, 경제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경제만 살리면 만사 O.K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에게 재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공동체, 코뮌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외로움과 적막감을 해소할 수 있는 친구 혹은 이웃의 존재 여부이며 노인 세대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이것은 결코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생활비 몇 푼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고 있다고 자랑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별은 홀로 빛날 수 없다고 앞서 말한 것을 기억하리라.

  오히려 백수들이 부모 봉양을 고민할거라면, 그들이 다양한 코뮌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봉양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취업을 하고, 인생을 후회 속에 살며 ‘나는 부모님 봉양하느라..’라는 핑계로 자신을 숭고한 희생양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얼른 찾아 매진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다.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고, 월급(?)도 별로지만 사실 그게 지름길이다. 백수가 된 경로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쿵푸를 하러 온 이들은 뭔가 남다른 방법을 찾으러 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배운 바를 동무들과 함께 꾸준히 실천하는 일 뿐이다. 공부, 그것도 코뮌 속에서 공부! 이렇게 말하지만 나도 부모님 봉양 문제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 쿵푸가 부족할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내 몸 하나 건사 못하면, 부모든 애인이든 그 누군들 감당할 수 있으랴. 사소한 일상의 재배치 조차 스스로 일궈낼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늙은 부모를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이라 오해할 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지 않다. ‘효도는 기본적인 생존은 책임지는 것’이라고 고미숙 샘은 말한다. 중대사가 발생했을 때는 가족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영화 괴물의 강두(송강호)네 가족처럼 말이다. 강두네 가족은 특이하다. 어머니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부재하고, 강두의 동생은 형을 덜 떨어진 존재로 보는 등 대체로 ‘Sweet home’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괴물의 습격으로 현서(고아성)가 납치된 시점에서 가족은 하나로 뭉친다. 고미숙 샘은 ‘가족은 평소 무덤덤하게 지내되, 긴급할 경우 서로 걱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화목한 가족’이라는 신화 속에 가려진 감정의 질곡이 얼마나 많은가?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치사한 감정싸움과 대립, 집착은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미화된다. ‘다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가족주의의 허구이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면 열린 광장이 기다리고 있다. 라디오 스타의 인물들은 가족이 없거나, 가족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굳센 생명력으로 유쾌하게 일상을 버틴다. 닫힌 가족의 울타리에만 머물 경우, 그것이 파괴될 경우 신애처럼 갈 곳이 없어진다. 그러나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시도를 끊임없이 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증식할 것이다. 어디로든 접속할 수 있는 유목의 삶! 앞서 부모 봉양을 고민할거라면 그들을 다양한 코뮌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은 인터넷의 영향으로 커뮤니티 참여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대개는 교회, 절 같은 신앙공동체로 쉽게 편입된다. 어르신들이 연세가 드시면, 친구분들과의 모임도 잦아들고 주변에 같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급격히 줄어든다. 말 그대로 인간관계의 사각지대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야 이렇게 백수 케포이 같은 모임도 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 그것은 익숙지도 않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동네에 있는 신앙공동체로 발걸음이 자연스레 향한다. 이 또한 부적절한 현상은 아니나, 그만큼 어르신들이 참여할만한 커뮤니티가 부족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커뮤니티를 그분들께 접속해드릴 수 있을까? 고미숙 샘의 어머니 또한 교회 공동체에 나가신다고 한다. 이에 질문을 던졌다. 호모 쿵푸스의 창시자라 할만한 선생은 쿵푸(공부)는 늙어서도, 아니 늙을수록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럼 자신의 부모가 쿵푸를 할 수 있도록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라고. 답은 썰렁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무슨 책을 쓴지도 모를 거라고’. 이어진 답변에 비로소 수긍했다.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영향을 못 미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그 역량을 쏟으면 그만’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다 보면, 길은 열리고 욕망의 물줄기는 터지는 거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을 어떤 커뮤니티로 모시고 싶으면, 나부터 그 커뮤니티에 풍덩 빠지는 것이 순서이다.

  커뮤니티, 즉 코뮌에 대한 이야기는 할 게 많다. 마침 다음 강좌의 주제가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이다. 백수 케포이필리아의 ‘오래된 미래’를 여기서 통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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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탈주 트랜스 소시올로지 2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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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방과 탈주.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게다가 부제는 Be minority!란다. 처음 몇 장을 읽어보니 새만금, FTA, 대추리 주민 등 굵직한 이슈가 등장한다.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취업용 시사문제로만 뒤적이던 내용이 다시 눈 앞에 던져졌다. 그 동안 이들은 답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문제용으로만 인식되었다. 사지선다 문제로 박제된 그들은 내 주변의 이웃이 아니었고, 책이나 신문 속에만 등장한 가상의 존재였다. 고병권 샘이 쓴 추방과 탈주는 다름아닌 그런 사람들과 만남을 기록한 책이었다. 열흘 남짓한 행진 속에서 만난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내쳐지는 비(非)국민들의 이야기. 그런데 이들의 사연이 나와 무슨 상관? 세상만사 그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 수 없다고 하듯이, 나는 백수지만 여전히 백수로써의 자각이 덜 된 것이다. 첫 번째 강좌 호모 쿵푸스에 참여하며 그래 공부 한번 해볼까 라는 마음이 병아리 눈물만큼 들었다면, 두 번째 책 추방과 탈주는 공부 이후에는 그럼 뭐? 라는 질문을 직격탄으로 날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8주간의 백수 케포이가 끝나고 나면 뭐? 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주 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민망하나, 벌써부터 Post 백수 케포이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결국 8주 동안 지적인 활동으로 몸과 마음을 추슬러 원기를 회복한 후, 다시 취업의 문턱에 서겠다는 것? 문제는 취업을 하든 안 하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오늘날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고병권 샘은 이것을 예외의 일상화라고 말한다. 예외라는 것은 비상시에 일시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뜻한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폭격기가 런던 공습을 하면 처음 당하는 런던시민에게 비상이지만, 일주일 혹은 한달 내내 하면 공습 같은 위급상황도 어느덧 일상이 된다. 그러나 일상이 되어도 폭탄에 맞아 죽는 것은 큰 고통이다. 고통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취업이 기업이나 국가에 의탁하는 수준이 아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더욱 국가, 기업이 개인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 전조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곧 정규직, 중산층이 될 수 있어 라는 의식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일시적임을 무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 폭탄이 덮칠 지 모르는 비상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추방과 탈주는 새롭게 다가온다. 말하자면 맥없이 추방 당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탈주 것인가의 문제이다. 대추리 주민을 낯설게 느낀 것은 여전히 백수라는 자의식 속에 Be majority!를 염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추방당한 마이너 인생과 나는 다르다 라는 오만 혹은 설마 내가..라는 착각 속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너도 이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 Be minority!는 국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그래서 추방당할 걱정도 할 필요 없는) 스스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하는 선언이다. 자, 앞서 던진 물음에 답을 하며 정리해보자. 백수 케포이 이후 취업을 할 것인가? 취업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일상화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 기업은 개인을 점점 더 주변으로 내몰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선수를 치는 것이다. 바로 추방당하기 전에 탈주하는 것! 함께 탈주한 이질적 집단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모색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기에 아직 우리의 쿵푸 실력은 너무나도 미천하다. 분명한 것은 8주 이후를 미리 걱정하기 보다, 그 시간 동안 쿵푸에 푹 빠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깨질 것을 예상하고 사귀지 않고, 영화는 결말부터 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2주 강좌 만에 백수의 의식이 Be majority!에서 Be minority!로 전환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면 그것만으로도 현실감각을 크게 끌어올린 거라 할 수 있다


추방과 탈주는 열흘의 행진 이후, 3년 동안 집필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에 의한 추방과 국민 탈주의 흔적이 담겨있다. 고향 땅에서 쫓겨난 농민, 바다의 터전을 잃은 어부, 농성 중인 비정규직 등, 공통점은 집이 아닌 길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문득 이 백수 케포이 또한 추방과 탈주의 연장선상에 놓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이라면 고병권 샘이 길에서 만난 이들보다 약간은 여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추방과 탈주의 중간에 서성이는 경계인 이라고 할까. 조선시대에 추방은 귀양, 유배를 의미한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반면 탈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탈주자의 행방이 묘연하다. 추방이나 탈주 모두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탈하는 것이지만 그 행동주체와 진행과정은 무척 다르다. 추방은 드러나 있고 탈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없다. 국가에 의한 추방이 되레 탈주하는 국민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백수 케포이에 한때 쏠린 언론의 관심은 호기심 반(半) 두려움 반(半)을 내포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릇 백수면 조용히 토익이다 뭐다 학업에 정진해 괜찮은 취업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정석인데, 이렇게 고전을 배우고 우주만물을 성찰한다고 하니 당최 얘들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나 궁금한 게다. 여기까지 호기심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마이너들이 점점 많아지면 그것은 두려운 일로 변한다. 왜냐하면 자본으로 수렴되는 권력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공포를 자아내는 이유는, 그것이 돈이라는 생계수단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럼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권력자들이 두려워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유+너머가 지향하는 공동체가 바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수 케포이는 그 실험 중 하나이다.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쾌한 실험! 그 첫 번째 임상실험 주체가 된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바이다. 


백수 생활을 하다 보면 친구들이 위로 겸 질책으로 한마디씩 한다. 너도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사회생활 해야지. 고병권 샘도 우리와 같은 경험을 했단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무척 다르다. 친구들이 말한 사회생활은 돈 버는 여러 활동의 총합을 뜻한다. 그들이 그런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고병권 샘은 길 위에서 행진하며 다양한 우리네 이웃의 현실과 대면했다. 자, 묻는다. 이것은 사회생활인가 아닌가. 당신이 회사에서 억울하게 잘려 부당 해고투쟁을 한다고 하자. 이것은 사회생활인가 아닌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돈 버는 여러 활동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외에 다른 사회활동이 있는지 조차 망각하고 있다. 그것이 경제만 살리면 장땡이라는 의식을 낳았고, 나부터 살고 보자 라는 분열을 초래했다. 강 건너 불이 조금만 있으면 자기에게로 옮겨 붙을 것도 모르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꼴이다. 결국 자본이라는 척도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약화하는데 기여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놀아난다. 이것이 자본권력의 기본적인 통제방식이라 할 수 있다. 고병권 샘은 낯선 사건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나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주변의 잊혀진 사회현상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추리, 새만금, 비정규직 등의 사례는 우리에게 닥칠 거대한 추방의 전조에 불과하다. 이것을 재빨리 읽고 어떻게 대비할 것이냐에 따라 비참하게 추방당할지, 사뿐히 탈주할 것인지 판가름나리라. 돈만 좇는 삶은 마치 좌우 눈을 가린 경주마와 같다. 그저 마부가 채찍질하는 대로 달릴 줄만 알지, 어디로 가는지는 상관없다. 우리는 사육된 경주마가 아닌, 초원에서 마음껏 뛰노는 야생마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구간을 박차고 뛰어나와야 한다. 정해진 트랙이 아닌, 낯선 자연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나 요즘 사회생활 좀 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사회생활이 뭐 거창한 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에 빠지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조금 세상이 안 바뀔 것 같으면 금방 실망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걸음씩 내딛는다면 그것이 크나큰 진보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사람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추방과 탈주 책을 읽어오기로 했으면 제대로 읽는 것. 거기서 하나라도 더 의문을 끄집어내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열심히 읽어 깨달은 통찰을 동무들과 즐겁게 주고 받는 일. 그것 참 괜찮은 사회생활이다. 공부해서 좋고 친구들과 수다 떨 수 있어 기쁘고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고병권 샘은 니체의 말을 빌려 용기와 유머는 함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거대담론을 힘있게 이끌어 나가는 용기 못지않게,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서 유머가 될만한 구석을 찾아내는 능력이야말로 요즘 같은 비상한 시대를 살아남는 양생술이 아닐까? 비상시의 탈주자들의 양생술! 유머! 


어릴 적에 프랑스 혁명을 배우며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철없는 아내의 프랑스 버전으로 느껴지는 이 말은 사실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왕정 세력의 한심함을 부각하기 위해 퍼뜨렸다는 얘기도 있다. 이 얘기를 하는 까닭은 중앙에 거(居)하고 있는 이들은 주변부에 정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현대 버전으로 하면, 타워팰리스에 사는 부잣집 아들내미가 밥 못 먹어 굶어 죽는 이들에게 밥 없으면 피자 먹으면 되지?하는 것과 똑같다. 그래도 설마 그럴까 싶지만 점점 의심이 든다. 고병권 샘은 중앙에 있으면 전체 형태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주변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둔감할 수 있다. 좀비 영화의 거장 조지 로메오의 랜드 오브 더 데드를 보면 좀비의 습격을 처음 받는 이들은 거대한 타워팰리스 주변에 살고 있는 빈민들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하급병사부터 죽어나간다. 쉽게 말해 총알받이 역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장 약하고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계층이며 혹독한 변화를 정면으로 겪는다. 반면 좀비가 쳐들어오건 적군이 공격을 하건, 중앙에 있는 이들은 타워팰리스 혹은 작전사령부에서 편안히 존재한다. 아비규환의 전방 상황은 안중에도 없고, 상상조차 할 필요가 없다. FTA, 새만금, 대추리 등의 사례는 주변부에서 직접 그 일을 겪는 이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병권 샘은 이해심이 부족한 선생은, 이해할 수 없는 학생만 만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소통능력이 달리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학생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학생을 문제아로 낙인 찍는다. 국가는 이해할 수 없는 국민의 행동을 난동,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괴담이라 부르고, 자발적인 국민의 행동 뒤에 배후가 있음을 의심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황당한 말처럼 국민은 졸지에 괴담을 유포하고 배후에 조종당하며 난동을 부리는 세력이 된다. 촛불시위, 그리고 당장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현장을 습격해 진압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어느 나라 공권력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국민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문제아 집단으로 만들어 관리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병권 샘은 상황을 보다 가속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상황이 악화되고 일정 임계 치에 도달하면 경제 살리면 장땡이라는 구호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부정되는 지경에 이르면 국민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민주주의는 투명성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다라고 고병권 샘은 말한다.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난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에 근접해 있다. 떳떳하면 마스크 벗고 시위하라고 관련 법을 개정한다는데, 얼굴을 드러낼, 드러내지 않을 권리가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인 게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만천하가 투명한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관리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언론, 방송을 통제하고 인터넷 여론을 조작해도 진실을 추구하는 행동은 피어나기 마련이다. 80년대에는 언더써클을 통한 출판 저널리즘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른바 사상서 등을 돌려 읽으며 운동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백수 케포이 집단이 이런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개인 혹은 공동의 저작물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지적 생산물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업으로 일정 부분 자본으로의 독립을 꾀하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병권 샘은 그 자신이 어디서 월급을 받지도 않는 백수 (좋은 말로 프리랜서)지만 불안하지 않다고 한다. 강의도 나가고 책 인세로 어느 정도 수입이 돼서? 그 또한 세상 기준에서 보면 대단치 않은 액수이다. 왜 불안하지 않는가 하면 자신에게는 장악되지 않은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네트워크는 인맥이라기 보다, 사회 안전망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적은 비용으로 먹을 수 있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공부하며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네트워크. 한마디로 식욕, 외로움, 공부, 건강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네트워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수유+너머가 커다란 네트워크라면, 백수 케포이는 그 네트워크에서 스스로 증식해 진화하는 새로운 생명체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그 신경망이 풍성해지느냐 단절될 것이냐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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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5:04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