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백승무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의 세계관과 신념이 집약된 한 권의 책을 남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 TV프로그램에서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이 불멸의 삶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인간의 뇌를 그대로 복제할 수 있게 된다해도(물론 지금은 불가능하다),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과 생각을 그 연속성과 관계성을 유지한 채 복제하지 못한다면 복제된 뇌는 특정 찰나의 '나'를 대변하는데 그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을 남기는 일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부활>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제대로된 통찰과 신념은 시대의 벽을 넘어 적용가능한 진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렇게 과거의 한 개인은 영영 남아, 미래의 어느 순간과도 교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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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성찰과 성장을 다루고 있는 소설 <부활>은 어쩌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쓴 톨스토이의 철학서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가라는 틀을 넘어 사회운동가이자 계몽가로서 혁신을 꾀한 톨스토이가 지적하고 싶었던 러시아 사회의 문제와 해결의 실마리가 이 소설 속에 담겨있다.

유지이자 공작인 네흘류도프는 러시아의 전형적인 상류층의 생활을 누리면서 살아왔다. 한 때 계층 내 이단아로 스펜서와 헨리 조지의 사상에 심취해 토지 사유화에 반대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보다 상류사회의 '상식'에 순응하는 편이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시절, 고모의 양녀이자 하녀였던 카츄사와 순수하고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나누었지만, 결국은 '상류계급의 누구나가 그러하듯' 순간의 욕망을 채운 뒤 돈을 던지고 그녀를 떠나버린 네흘류도프. 


이 모든 끔찍한 변화는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신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쉽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동물적 자아를 따르지 않고,
거의 모든 일을 그 반대편에 서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타인을 신뢰하며 산다는 것은 그저 남들이 정해주는 대로 산다는 것,
자신의 정신적 자아를 거스르고 동물적 자아의 편에 선다는 뜻이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네흘류도프는, '덕망있는 시민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참석한 배심원 재판에서 죄수가 된 카츄사와 재회한다. 그는 카츄사가 자신으로 인해 임신을 해서 쫓겨나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곧 죽었으며, 그녀는 결국 유곽까지 흘러들었다가 살인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배심원 재판 과정의 오류로 그녀의 징역은 확정되고, 그는 죄책감을 느껴 상고를 통해 그녀를 풀어주고자 한다.

그녀가 처한 상황에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부패한 관료사회와 종교계, 제 배불리기 바쁜 상류계층의 민낯을 보게 된 네흘류도프는 불공평한 사회의 이면을 인식하고 분노한다. 자신 또한 그 계급의 내부자라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며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부당한 사법체계 내에서 억울하게 당한 죄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다.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감옥 내의 불합리함을 줄여보려는 노력도 계속한다. 한 여인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 사랑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때문에 시작한 이 선행은, 결국 네흘류도프라는 인간 자체를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된다.

 

흔히 사람들은 도둑이나 살인자, 간첩, 매춘부 등이

자기 일을 천하게 여기고 부끄러워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운명에 의해서든 실수에 의해서든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옳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겐 바람직하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부자나 군인, 정치인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재산을 뽐내는 부자는 결국 약탈자이고,
전력을 자랑하는 사령관은 결국 살인자이며,
권력을 과시하는 정치가는 결국 압제자가 아닌가?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생관이나 선과 악의 개념을 왜곡하는 이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런 왜곡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다,

우리 역시 그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유배지까지 카츄사와 죄수들을 따라 온 네흘류도프는 영국인 선교사가 두고 간 성경을 읽다가 깨닫는다. 인간에게는 타인을 평가하여 상벌을 내리거나, 인간 위에 군림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종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용서의 의미는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임을. 과거의 일을 속죄하는 마음과 순수했던 사랑에의 미련 같은 감정으로 시작된 네흘류도프의 변화는 영적인 깨달음에 도달한다. '모든 이를 용서하라'는, 너무 단순해서 믿기 어려운 진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함으로써 네흘류도프는 진정한 부활을 이루어 내고야마는 것이다.

 

악한 자들이 악을 교정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락한 자들이 타락한 자들을 교정하려 들고 이를 기계적 방식으로 달성하려 했다.
이런 시도가 낳은 결과는 딱 한 가지
가난하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처벌과 교화라는 말도 안되는 망상을 직업으로 삼아
스스로도 밑바닥까지 타락할 뿐 아니라
자기가 괴롭히는 수감자들까지도 계속해서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목격한 그 모든 참상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그것을 척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항상 모든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타인을 벌하고 교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죄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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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지 종교서인지 철학서인지 헷갈릴만큼 <부활>은 장르를 넘나든다. 이런 점이 비평가들의 공격 대상이기도 했다지만 이 책은 톨스토이의 인생 전반이 담긴 역작이다. 사회 전반의 끔찍한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담아내면서 대안이 될 수 있는 신념까지 제시한만큼 어떤 언론보다 강력한 목소리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톨스토이 자신은 사회 개혁 활동과 가장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굶고 있는 자식은 외면하면서 세상의 가난한 이들만 동정할 줄 안다는 아내의 비판에 그는 집을 떠나 먼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럼에도 그는 반박 불가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혁명가로 지금까지도 존경받는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톨스토이를 그저 유명한 소설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부활>을 통해 1800년대의 톨스토이가 던지는 화두가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록 이 소설을 완성하고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11년 뒤에 생을 마감했지만,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으며 미래에도 언제건 부활할 것임을 이제는 확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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