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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환경주의자
이상돈 지음 / 브레인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0.
정말 나쁜 책이다. 굳이 이 책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더러운 책이다. 하지만 환경주의, 생태주의, 환경운동에 대한 역공이 환영받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이 책은 제목과 구호만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기에, 그에 대한 방어가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해보자. 그냥 환경주의와 생태주의, 환경운동이 역겹고 짜증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권장할만하다. 환경주의자에 대한 분노를 (논리적인 척) 대신해서 잘 표출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말것. 딱 조선일보 사설 수준이니) 환경주의자들, 절대 보지마라. 이 책 읽고 나면 기분이 더러워진다. 환경운동, 환경정책의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차라리 비슷한 시기에 홍욱희의 <위기의 환경주의, 오류의 환경정책>이나 <회의적 환경주의자>를 추천한다. 이 두권의 책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생산적인 논쟁을 불러올 여지가 있다. 하지만 <비판적 환경주의자> 만큼은 아니다. 이 책은 비판의 탈을 쓴 비난과 증오만 있을 뿐, 비판의 근거나 합리성이 결여되어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진보세력에 대한 증오와 독설 그리고 냉소 뿐이다. 박명수식 호통개그만 난립하고 있다.
1.
일단 이 사람들 ㅆㅏ가지 없는 발언이나 몇개 들어보자.
58쪽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해서 흑인들이 못 산다고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문제는 흑인들 자체에 있다. 오늘날 태어나는 흑인 아이들의 70% 이상이 사생아일 정도로 흑인들은 윤리의식이 없다. 게토에서 자란 흑인 중 의무교육인 12년을 마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게토의 흑인 남성들은 마약, 강도, 섹스로 세월을 보낸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 이 사람은 인종주의자다. 이런 발언을 미국에서 했다면 저자는 은퇴를 고려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대입 논술시험 치는 고등학생들도 이 따위 대답을 하지 않는다. 흑인의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제도와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좀 더 공부한 학생들은 뒤르켐의 자살론이니 뭐니 하는 어디서 주서들은 사회학적 지식을 끌여들일 것이다. 적어도 본인이 미국사회나 인종문제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는 조용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전문가가 설쳐서는 안된다는 말, 당신이 먼저 그렇게 이야기 했자나.
55쪽 리프킨은 변변한 대학교육도 못 받은 운동권 출신인데, 그런 '지적 사기꾼'이 석학 대접을 받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지만......
102쪽 마이클 무어는 그렇고 그런 대학을 중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그런 무어가 예일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나온 부시 대통령이 머리가 나쁘다고 떠든 것 자체가 코미디인데......
-> 당신의 말대로라면 고작해봤자 학문적 변방인 대한민국의 2류대학(세계 1000대 대학에 들어갈라나?)에서 교수생활하고 있는 저자가 이들을 씹는 것 자체가 코미디인듯 하다. 리프킨이 어느정도 과대평가를 받는 면은 있지만, 지적 사기꾼이란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니다. 변변한 대학교육도 못 받았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나온 말인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엔트로피>는 충분히 대접을 받을만한 저서다.
2.
이렇듯 저자는 소수자와 진보적 지식인을 열라 무시 때린다. 뭐, 이렇게 ㅆㅏ가지만 없으면 다행이련만, 글의 수준도 저질이다. 이 책은 환경문제에 대한 비전문가의 근거 없는 이야기만 난무할 뿐이다. 비전문가가 난립하고 있는 환경주의에 대해 비판하였지만, 본인 부터가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저자는 환경법의 전문가일 뿐 자연과학적인 측면에 대한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학습을 하지 않은 교양수준의 비전문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저자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는 잘못된 지식이다. 그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충분한 논거만 갖춘다면.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BBC 방송에서 소개된 어디어디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해수면 상승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정도의 연구결과 소개 한 두페이지를 가지고 온난화에 따른 환경문제는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온난화 위협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한 쪽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에 따른 치밀한 과학적 근거와 논의가 제시되어야 한다. 적어도 한 두페이지 가지고 지구온난화가 가타불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자는 매사에 이런 식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이래이랬다. 등의 2,3차 자료 몇개를 토대로 환경위협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2006년 홍수 위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중동 기사 몇개 읽어본 것을 근거로 '댐건설을 반대한 환경운동가들 때문에 홍수피해가 컸다'는 식의 단무지식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과연 댐이 부족해서 홍수피해가 적었는지, 댐을 건설했더라면 홍수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수리전문가, 수변생태학 전문가가 아니라면 좀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적어도 환경위협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회의적 환경주의자> 정도의 정성과 성의는 기울여야지. 환경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면서, 정작 저자는 비전문가적인 태도로 과장된 환경문제에 대한 비판을 어설프게 하고 있다. 간단명료해서 좋기는 하다만. 뭐, 제대로 된 논거가 있어야 반론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제발 환경문제가 과장되었다고 나를 설!득!해달라. 저자의 '공허한 주장'은 듣고 싶지 않다.
뭐, 그래봤자 학부 4학년인 나도 환경위협이 과장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선 그리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는 되지 못하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 두자. (저자보다는 환경생태학, 환경사회학을 더 전문적으로 공부했겠지만)
3.
책의 내용 전개도 산만하다. 뭐 저자가 몇 년동안 기고한 글을 모은 '컴플리케이션 책'이라 어느정도 이해는 해야겠지만, 기본적인 정리라도 했는지 의문이 든다. 특히 물챕터 같은 경우는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논점이 안 잡힌다. 칠레의 물관리 소개는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물관리 소개는 기독교 성지를 방문한 감동에 벅찬 기행문 이상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두 사례를 읽고 난 다음에 드는 생각은 so what??
4.
분명 환경주의, 환경운동, 생태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너무 많은 환경시민단체들이 있고, 터무니 없는 사업이나 연구를 하면서 지원금을 받아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21세기는 환경의 세기라는 말이 이곳 저곳에서 남용되고 있고, 환경정책도 뭔가 체계적인 틀이 결여되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환경주의의 아웃소싱, 교통정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비판 중이 분명 의미있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선일보 사설에 어울리는 이 따위 수준 이하의 환경주의 까대기 책이 환영 받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다. 문제는 똑같은 비판을 하더라도 비판의 지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다. 좀 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환경주의와 환경운동을 성장시키기 위한 긍정적 비판인지, 진보적 환경주의와 환경운동가들을 죽이기 위한 조중동 식의 반대를 위한 비판에 있는 것인지. 불행하게도 이 가여운 책은 후자에 가깝다. 그리고 이 책은 환경주의에 대한 역공의 흐름을 타고 <회의적 환경주의자>가 성공한 시류에 영입하려는 책 밖에 안된다.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덜떨어진 아류밖에 되지 못한다.
이렇게 독설로 가득찬 <비판적 환경주의자>에 대한 독설을 함으로서 독자들에게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만 정말 이런 수준 이하의 저질 책에는 관심 조차 주면 안된다. 시간이 아깝고, 돈이 아깝다. 그 시간에 홍욱희 씨의 글을 읽어라. 비슷한 내용일지라도 비판의 품격과 수준이 있다. 정말 이 책은 즐~이다.
정말 저자는 왜 이렇게까지 운동세력, 진보주의자, 좌파, 낭만적 생태주의자를 증오하는지 모르겠다. 그의 방향 상실한 증오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5.
이 책의 주요 내용 정리.
1. 이 모든 문제는 다 김대중과 노무현 10년동안의 '좌파정권' 때문이다.
2. 비전문가가 설치고 있는 환경주의 꼬라지를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
3. 환경문제는 경제성장과 시장에 맡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