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문이란 서재에서 출발하여 장터에서 마감되어야 한다는 헤셸의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거꾸로 장터에서 출발하여 서재에서 마감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서재와 장터 사이를 잇지 않는 학문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인류에게 던져진 과제가 있다면, 기도와 생활, 명상과 사회운동의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가 그것이라고 본다. 이 과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인류는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처럼, 무너지는 물질문명과 함께 멸종되고 말 것이다.

그런 것을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들여다보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거리를 두고 관찰하기, 조사하기, 정면으로 대결하기, 자세히 살펴보기, 보이는 그대로 순수하게 들여다보기는 우리에게 현상의 있는 모습을 사실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의 독특한 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좀더 날카롭 고 적절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실로 어떤 질문을 하면 안 되는지, 어떤 주장을 받아들이면 안 되는지를 알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은 관찰 대상과 함께 관찰 습관이다. 우리의 시야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뼈아픈 자각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마음속에 늘 품고 있어야 하는 원리는 아는 것을 볼 게 아니라 보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탓할 게 아니라 스스로 끌어들인 타성의 노예가 되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탓해야 한다. 하나의 단순한 상(像)을 잡기 위해서는 많은 상투어구를 잊어버려야 한다. 꿰뚫어본다는 것은 어제 있었던 어떤 인식들을 길게 늘이는 게 아니라, 앞으로 올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물을 어떤 고정관념에 따라 습관적으로 보는 것은 현재를과거 시제로 보는 것이다. 꿰뚫어본다는 것은 현재 시제로 생각하려는 한시도다.

꿰뚫어본다는 것은 하나의 돌파 작전이다. 그것은 상당한 지적 장비와 위치 이동을 요구한다. 그것은 낯선 것, 전에 못 보던 것,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을 느끼는 감성이 성숙해야 가능하다. 그것은 현상 속에 휩쓸려들어 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현상과 직접 만나고 부딪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하여 많이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뒤에 비로소 우리는 꿰뚫어보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현상을 안에서부터 보는 것이다. 놀랄 줄 아는 눈만이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다. 그에게 지금까지 닫혀 있던 것이 갑자기 열리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순수한 지각, 곧 새롭게 보는 것이라야 한다. 똑같은 것을 두 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보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꿰뚫어보는것은 처음 보아 아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말에 매달려 있는 사람의 상황이란 끊임없이 깨어지는 무관심의 파편 조각들 속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런 가운데서 태연하게있으려면 그의 머리가 돌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도달한 하나의 결심이 나의 실존에 치명적인 것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살아남기 위하여 다음 숨을 들이마실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것이 예언자들을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한 문제 같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는 채 죽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네 능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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