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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4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정수 ㅣ 미생 4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인생에 완생이 있을까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시작하는 인생은 없다.
우리는 똑같이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미생’이라는 제목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 인생에서 완생이 있을까.
모두가 인생에 정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라는 부제처럼-
영원히 미생에서 완생으로 나아갈 뿐인 것이 우리 인생일지도 모른다.
<미생>은 완생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자
이 시대 직장인의 자화상이다.
주인공 장그래. 바둑만을 보며 살아왔지만 입단에 실패해 세상으로 나온다.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는
그의 독백엔 가슴이 아프다.
장그래가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바둑을 벗어나
종합상사의 인턴이 되는 것으로 <미생>의 진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턴 장그래의 일상은 치열하다.
그래서 지극히 평범하다.
우리 중 누군가는 겪었고, 누군가는 겪을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장그래와 주변 인물들의 인생을
바둑의 한 수 한 수에 비유한 묘사는 절묘하다.
주인공 장그래는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쓸모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바둑은 세상과 묘하게 닮아 있었고, 바둑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다시 배워갔다. 그래서 장그래가 고맙다. 쓸모없다고 생각해온 시간들이 사실은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 한 시간임을 가르쳐주었기에. 그 외에도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는, 누군가에겐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싶어 하는, 변화를 꿈 꾸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보통의 존재들.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빨간 눈의 오 과장은 이 시대 중간급 관리자를 대변한다. 눈에서 피나도록 일하지만 동기들보다 승진이 늦다. 승진이 늦음에도 불만은 없다. 올바른 신념으로 그저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멘토 김 대리, 장그래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든든한 힘이 되어준다. 그의 촌철살인 조언에는 가슴이 뜨끔할 때도 있었다. 비록 만화 속의 인물인 만큼 매우 이상적인 인물이라 실제로 만나긴 힘들겠지만. 장그래와 동기인 인턴 한석율은 사무직을 무시하고 현장만을 중시한다. 그러나 입사 PT에서 자신의 고정관념을 벗는다. 사무실 안에서의 정신 노동이 발로 직접 뛰는 육체 노동만큼이나 소중한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회사 생활을 몇 년 이상 하다보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한석율을 보면서 늘 깨어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프로페셔널이지만 육아 문제로 늘 남편과 다투는 신 차장. 같은 여자로서 앞으로의 직장생활을 그려보게 만든다. 행복하기 위해 일하는건데, 오히려 일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그녀의 독백은 씁쓸하다. 육아 부담을 떠안은 여성들에게도 세상은 공평한가.
다양한 인물들의 삶 속에 나를 투영하면서 결국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다.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김 대리와 장그래의 대화를 인용해본다.
김 대리 :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장그래 : 성공은요?
김 대리 :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문제 아닌가?
일을 하다 보면 깨진 계약인데도 성장한 것 같고 뿌듯한 케이스도 있어. 그건 실패한 걸까?
김 대리 : 졌어도 기분 좋은 바둑이 있어요. 그런 걸까요?
둘의 대화는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가'에 대한 힌트를 제시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성공과 실패보다 중요한 게 아닐까. 깨진 계약인데도 뿌듯한 케이스, 졌어도 기분 좋은 바둑. 깨지거나 졌어도 기분이 좋다는 건 최선을 다했다는 반증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찾아서 하는 일, 즐거워서 하는 일은 실패마저도 내 삶의 밑거름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 애티튜드. 회사에서 일하는 순간마저도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 내 시간의 일부를 소중하게 쓰겠다는 애티튜드.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으로 삶을 주도한다면, 실패는 있어도 인생에 괴로운 순간은 없을 수 있다.
“빤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눈에 훤히 보이는 길을, 너무 뻔해 마다해서 아쉽게 패한 많은 대국이 떠오른다. 사는 게 의외로 당연한 걸 마다해서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 같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어려워도 꼭 해야 하는 것. 쉬워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우리는 어쩌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완생으로 향하는 길을. 하지만 우리 삶이 이토록 고민스러운 것은 ‘의외로 당연한 걸 마다해서’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장그래의 말처럼, 인생이라는 바둑판에 나만의 제대로 된 한 수를 던져보는 건 어떨까. 내 삶을 의미 있게 채운다는 애티튜드로. 우리의 삶은 미생일지언정 완생을 향해가는 한 수 한 수의 성실함이 아름답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