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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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p12

 

 

 

 

'아름다운 별'이라는 건 그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별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었는지 모르지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p30

 

뒤에 은교의 안나수이 거울을 떨어뜨리고, 그까짓꺼 사준다는 말을하는,

서지우.

처음 이적요가 그를 멍청하다고 느끼게 한 그의 어떤것은

몇년이 지나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주입된 생각만을 가지고, 자기 생각인양, 그렇게 맹신한다.

엄마가 사준 선물인 거울은, 은교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서지우는 별이면 그냥 다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런 마음으로

평범한 사물이 특별해지는 순간과 기억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는 시인도, 제대로된 소설가도 될 수 없었다.

불쌍하다.

 

 

 

 

"난 장르문학이란 말 안 받아들이네.

문학 앞에 붙는 어떤 관형사도,

알고보면 층위를 나눠 세우고 패를 가르려는 수작이야.

우리 문학판 너무 협소하고 못돼먹었어.

양반 상놈을 아직도 가르려는 패거리가 많은 게 이 동네거든."

p67

 

자유로운 척, 깨어있는 척 하나,

사실 가장 꼳꼳히 버티고 서서 어느 한자리도 너그러이 내주지 않는,

우리 문학판

 

 

 

 

대부분은 아주 작은 '현상'을 단서로 '내용' 전체를 분류해버리고,

대중의 호응을 유도하여 그 분류의 정당성을 가짜로 확보, 굳히기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나면 어떤 층위에 분류되어 넣어진 자는 아무리 변화를 꿈꾼다 해도

거의 평생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쉽다.

p142

 

저것이 지식인 독자들의 일반적 습관이란다.

'기자'에게도 속하는 말이겠지.

'마녀사냥'도 떠오르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p163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책을 읽기전,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를 보곤,

'은교'로 상징되어 드러난 '젊음'에 대한

늙은 시인, 늙은 노인, 늙은 남자의

갈망에 대한 이야기일거라고.

그 생각이 책을 다 읽고나서도 그닥 바뀌진 않았다.

젊음으로 휘감겨진 은교는 늙은 시인에게 '관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아니, 한때 가졌으나, 은교와는 다른 젊음.

암울한 젊음.

그것과 다른 은교, 지금 세대의 젊음은 시인은 궁금해했고, 갈망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p250-251

 

내 노력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과오에 의해 얻을 것이 아니다.

그냥 난 태어났으니,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도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난 늙어가고,

늙어가는 것 뿐만 아니라, 젊음을 잃어간다.

그게 가장 슬프다.

수분이 빠진다. 마음한편이 빠지는 것 같다.

저기 저 노인들도 우리처럼 젊었다.

그 사실을 가끔 까먹기도하고, 가끔 두렵기도한다.

그러나, 평등하다.

누구나 젊었다 늙는다.

그러니, 두려울 필욘 없을것같다.

난 가만히 있어도 늙어가고 있는 중이니,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혈연에 따른 의무와 권리로 사람의 관계를 묶어두려는 일종의

정치적인 속임수,

라고까지, 생각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p347

 

의무와 권리는 어디서나왔을까.

누가 만들어 냈을까.

'마땅히'라는 것이 진짜 '마땅히'가 될 수 있을까.

단지 피가 조금 섞였을 뿐, 그외에는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그저 의무감에 같이 산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게 행복일까. 그게 권리일까.

 

 

 

 

화제가 될 만한 건덕지가 보이면 썩은 고기에까지 기꺼이 달려드는 우리의 언론,

비겁하게 익명 뒤에 숨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망설임 없이 칼을 꽂는 일부 사디스트적인 네티즌들을 생각하면,

이만저만 걱정되는 게 아니다.

어쩌면 어린 너까지

'광장'에 끌려나와 분별없는 '인민재판'에 회부될지도 모른다.

p395

 

이적요의 말 그대로다.

'비겁하게 익명 뒤에 숨어서'

걱정이다.

 

 

 

  은교.은교.은교.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책이다. 영화를 본 것은 아니다. 판타지를 제외하곤, 원작인 책이 있다면, 원작부터 읽고, 영화를 보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책부터 빌렸다. 영화의 영향인지 예약이 밀려있어 이제야 책을 읽었다. 두근거렸다. 영화예고편에 나오는 배경음악때문일거라 생각했다. 예고편의 배경음악은 어두운듯, 밝은듯, 급한듯, 여유로운듯, 웅장한듯, 심장소리같이 들렸다. 이적요시인의 북받치는 감정, 갈망, 결핍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더 책을 읽기에 앞서, 두근거렸나보다.

  '관능적이다' 이제막70세가 되어가는 노인이 17세의 처녀에게 느낀 점. 관능적이다. 은교에게가 아니라, 자신은 어둠 속에서 지나쳐온 젊음에게 보내는 찬사아닌 찬사. 뭔가 울컥함이 밀려왔다. 몸은 쭈글쭈글 늙었지만, 마음은 팽팽하다. 마음이란 것은 늙지 않는다. 그게 비극이란다. 누군가 말했는데, 기억이 나질않는다. 노인의 비극은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것. 늙지 않는 마음을 함께 늙어가고 있다고 착각한, 그리고 그 마음을 억누르며 살아온 시인 이적요에게, 은교라는 젊음은 더이상 이성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게 터뜨려버렸다. 그런 이야기다. 생각했던것 보다, 뻔했다. 지루하지않은 듯, 지루했다. 안타깝다. 뻔하단건 어쩌면 현실적이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딘가 허전했다.

노인을 욕하지 말라, 고 말하는 이적요보단, 서지우가 눈에 들어온건, 어쩌면 당연했다. 노인의 욕망, 사랑을 난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적요가 서지우에게 '아름다운 별'에 대해 설명하듯, 노인의 사랑을 더럽다고 여기는 건, 같은 것 아닐까. 누군가 심어놓은 편견. 내 생각이 아닌 생각. 그런것을 이해하지 못한 서지우. 난 다 안다, 라는 이적요보다, 한없이 모르는, '멍청한' 서지우. 그에게 연민같은 걸 느꼈다. 그는 당당하지 못했다. 애초에 시에도 소설에도 재능이 없었다. 성실함으로 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서지우는 항상 안고지냈다. 그래서 그 한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여긴 이적요를 한없이 동경한다. 그래. 그거였다.

  서로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을 동경했다. 그렇기에 갖고싶어했다. 그건 갈망, 욕망이었다. 서지우는 이적요의 능력(?), 품성을, 이적요는 은교의 젊음을. 아니 그 젊음은 서지우에게서 갈망할 수도 있었지만, 서지우는 그런 인물이 못되었다. 적어도 은교처럼 '시적인것', 감성의 이해가 조금이라도 가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 껍데기뿐일 젊음은 이적요에게 필요치 않았다. 은교는, 은교는 무엇을 원했나? 위로? 시적세계?. 은교는 그들에게 젊음이자, 순수였다. 그것을 시기해 서지우는 은교를 안았을지도 모르겠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눈빛, 갈망을 읽은 서지우. 질투였을 것이다. 자신에겐 내비치지 않는 어떠한 그 마음. 은교를 안으면 그것을 자신도 가질 수 있을 수도, 알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교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순수. 처녀 그 자체였다. 욕심이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이적요를, 서지우를 위로했다. 원조교제고, 섹스를 떠나, 그래, 나이를 떠나, 그녀는 이적요에게도 서지우에게도 선물이었다. 미지의 세계였고, 자신들의 과거의 어떤 한 조각이었고, 원하는 어떤것의 일부였다. 은교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그들 자신일 수도 있었다. 흘려버린 그들 자신.

그렇지만, 책이 지루한 건 사실이다. 끝까지 책을 다 읽어야한다는 사명감에 읽었다. 인물들이 뻔했다. 그래서 지루했다. 그냥 그 사람의 감정을, 우리가 가질 수도 있을 그 감정들을 조금 더 자세하고, 조금 더 극적으로 적어놨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책을 접했기에, 기대에 못미친 책이 지루하다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엔, 늙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보다. 시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라서 좋긴 했다. 고매한 성품이 파괴되는 모습도 흥미롭긴 했다. 그러나,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한번 쯤 읽어봐도 괜찮을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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