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책의 제목이나 표지의 분위기, 소개 글과는 달리 냉혹하고 이지적이며 사람 냄새는 눈곱만큼도 나지 않는 여인은 없었다.

‘베수비아 아델리아 라헬 오르테즈 아길라’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사체를 부검하고 사인(死因)을 밝혀낼 수 있는 자신의 비상한 능력을 알았고 또 적절하게 사용하였지만 따스한 인간미마저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도무지 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다.

소설의 시대는 중세, 장소는 영국 케임브리지이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헨리 2세 치하에서 다소 평화롭게 (물론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았지만) 집을 짓고, 재산을 늘리고, 가족을 꾸리며 보통 사람들처럼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유복한 유대인의 집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있었다. 어린 딸과 흡족한 사위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하객들. 모든 것이 완벽해보였다. 그러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태로운 유대인들의 평화는 네 명의 어린 아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악마(락샤사) 같은 살인자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끔찍한 살상의 시작은 (종교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작은 성인으로 추대되는) 피터였다.

가엾은 어린 아이에게 행해진 천인공노할 범죄의 내면에는 종교 문제, 십자군 전쟁, 유대인 인종차별 등 당시 중세의 문제점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어린 아이 살해 사건과 유대인에 가해진 인종차별과 폭동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사실상 헨리 2세의 더 큰 목적은, 종교계에 뿌리내린 자신의 실추된 이미지 복원과 세금 징수에 있었을 것이지만) 살레르노 대학의 여의사 아델리아, 유대인 조정자 나폴리의 시몬, 아라비아인 만수르를 케임브리지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제 바야흐로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델리아의 활약이 펼쳐질 때가 온 것이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나는 이미 중세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사건에 필요한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된다. 제프리 수도원장을 죽음의 고통에까지 몰고 가는 비뇨기계 질환은 아델리아 일행이 순조롭게 수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갈대의 줄기가 그토록 요긴하게 치료에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또 아델리아의 천부적 능력을 맛보기 식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용의자들. 로울리 경, 조슬린 경, 저베이스 경, 제프리 수도원장, 조운 수녀원장, 수녀들 그리고 액턴의 로저까지.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델리아 일행이 만난 수상한 사람들과 수상한 언덕 덕분에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독자들에게도 점점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아델리아 일행은 성에 갇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유대인들 중 한사람인 벤저민 노인의 집에 기거하며 수사에 착수한다. 그곳에서 최고의 뱀장어 요리사 질사, 질사의 손자이며 영민한 (생김새와는 달리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이 울프, 냄새가 최대의 무기인 개와 마틸다들을 만나게 된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의 최대 장점은 55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웃음을 유발한다거나 세인의 관심거리, 가십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좋은 작품을 읽었을 때 느껴진다). 역사에 천착한 저자의 학자적 기질과 사건을 구성하고 인물을 만들어내는 문학가적 기질이 만나 대단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전생을 잊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 책의 저자 아리아나 프랭클린이 바로 그 미스터리하고 신비한 혜택을 받은 사람이지 않을까? 중세 때 쓰인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밀하게 구현된 배경은 나(독자들)로 하여금 놀라고, 또 놀라게 만든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오롯이 중세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역사에 대한, 종교에 대한, 권위에 대한, 인종(또는 여성)차별에 대한 질문들(저자와 독자들이 가지게 될)은 이 책의 무게와 깊이를 더해준다.

소설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저자는 결말에 대한 실마리는 제공하지만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또 인물 하나하나가 납득할 수 있는 개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범인이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닌 (비록 비정상적 욕구와 정신적 문제를 수반하고는 있지만)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에서 - 그는 금전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살해를 위한 은밀한 장소를 물색했으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아이들을 선택했다. 또 시체를 은닉했으며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때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했고,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대중을 선동할 수 있었다 - 이 소설의 장점과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대략적 사건과 인물 소개는 끝난 것 같다. 아델리아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 범인은 누구인지, (범인을 미리 눈치 채고 있는) 독자에게 회심의 한 방을 선사할 복병은 과연 누구인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의 저자 아리아나 프랭클린이 얼마나 치밀하게 중세를 ‘완벽 재현’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서 이 책을 펼쳐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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