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무함마드는 일찌기 "너희들 가운데 가장 약한 자와 보조를 맞추어라!"라고 말했다.(한비자,권력의 기술 242P)

군주가 권력의 속도를 동기화 시킬 곳으로 가장 약한 백성의 움직임을 고려 하라는 말이다.

TOC에서 말하는 가장 약한 고리쯤 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한미FTA, 경제성장, 민주주의

한미 FTA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고위급 회담'에서의 담판만을 남겨놓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달의 '사회적 독서'에 관련서들을 올려놓긴 했는데,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사실 각종 언론의 분석/비판 기사들만으로도 여러 권의 책이 묶일 정도이다. 오늘자 프레시안에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글이 재수록되었기에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스크랩을 공개하는 건, 그래야지 내가 미루지 않고 읽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07. 03. 14)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5년, 실패의 경험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최근 발행된 이 잡지 2007년 3~4월호(제93호)에 실린 '한미 FTA, 경제성장, 민주주의'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한다. 성장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오늘날의 현실이 그 방증이라는 것이다.

김종철 발행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그것의 추진 배경에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한국 사회에 팽배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김 발행인은 또 "빈부 격차야말로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토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제 발전으로 빈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김종철 발행인은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폭군적인' 경제 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R. H. 토니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온갖 문제들이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를 부추기는 경제 성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신 "평등한 인관관계에 토대를 둔 사람들 사이의 우정(友情)과 환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프레시안>은 김종철 발행인과 녹색평론사의 양해를 얻어 이 글을 재수록한다. 그간 한미 FTA에 대해 둔감했던 이들이라면 이 글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미 FTA가 가져올 여러 가지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손님은 하늘이 보내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집에서나 늘 손님이 묵을 방과 입을 옷을 준비하라. 온 정성을 다해서 밥상을 차려라. (터키 이슬람 사회의 격언)
  
수많은 이의제기(異議提起)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하려는 정부의 의지에는 아무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이 정한 시한이 가까워옴에 따라 모든 절차를 서둘러 끝내려는 조급한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노출되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꼼꼼하게 챙기면서 협상을 하겠노라는 정부 측 홍보는 여전히 넘쳐나고 있지만, 그게 결국 헛된 약속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자세는 강경일변도이다. 최근 인터넷 뉴스매체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대통령은 한미 FTA로 인해 서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지고,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그동안 수많은 독립적인 학자, 지식인, 활동가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밝혀온 숱한 자료와 분석, 그리고 현지 취재와 탐방의 기록들이 정부에 의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아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생각이 옳다면, 그동안 국가권력에 의한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거리에서 끊임없이 싸워온 농민과 노동자, 시민들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나라를 시끄럽게 해온 어리석은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과연 민주정부인가?
생각해보면, 지금 한미 FTA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민의(民意)를 존중한다는 대원칙을 저버리고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자의 리더십의 원천은 그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넘어 기본적으로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에 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적 지도자는 구성원들에게 오직 '복종함으로써' 그들을 '이끌어갈' 수 있을 뿐이다.
  
한미 FTA는 만약 타결이 되고 국회에서 비준된다면 거의 헌법에 준하는 구속력을 가지고 국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위력적인 통상조약이다. 더욱이,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 농민과 노동자, 영세상인을 포함한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거의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러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무엇보다도, 소위 '참여정부'가 왜 이 시기에 꼭 이 협정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부 측의 설명은 처음부터 매우 설득력이 부족했고, 협상을 위한 사전준비도 어이없을 만큼 불철저했다는 것이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따라서, 협상의 내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와 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협상의 졸속성과 부실함에 대해서 항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하한 성실한 답변도, 관련 자료의 공개도 거부하고, 오로지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가능한 한 억제하거나 봉쇄하면서, 막대한 국가예산을 들여 정부 측 홍보물을 온갖 매체를 동원하여 광범위하게 유포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인 시위·집회의 자유마저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한편, 정부 측 홍보물에 맞서서 시민들이 자주적으로 제작한 대항 광고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방송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미 FTA에 관련하여 지금 정부가 민중의 목소리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완강히 되풀이하고 있는 독선적인 행태를 보면 대체 이 나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고서도 자신을 민주정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몇몇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향후 한국의 '진보진영'의 과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논쟁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화' 운동세력이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에 의해 민중의 생존조건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열악해지는 데 따른 불만과 함께 '민주세력'에 대한 다수 국민의 혐오증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상황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참여정부'와 '민심'의 괴리현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게 분명하고, 이에 동반하여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한국의 '진보적' 정치세력이 몰락하다시피 내려앉은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라도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일 것이다. 이것은 차기 정권을 누가 맡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을 떠나서 건전한 민주사회를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건으로서 정치적 이념과 가치와 세계관을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정치세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임에 틀림없다.
  
군사독재 체제로부터 벗어난 지 20년이 경과한 이 시점에서, 그것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주도해왔다는 정부 밑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장래를 심각히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장래문제가 아니라, 오늘 당장 여기서 우리의 민주주의에 가해지고 있는 위협이다. 지금 한미 FTA라는 현안(懸案)에 관련하여 정부가 보여주는 일방주의적 처리방식은, 따져보면, '참여정부'에서는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통치방식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평택 대추리 농민들이 가장 생생한 증언자가 될 수 있겠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약속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한 정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참여정부'는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국민의 의사를 묻거나, 해당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데 지극히 인색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국가권력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폭력과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풀뿌리 민중은 자신들이 주권자로서 존경은커녕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괴로운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의 소위 '진보논쟁'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두개의 상이한 이해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중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 한정된 원리일 뿐 경제는 시장과 성장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경향신문>, 2007년 2월 28일).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라는 것은 아마도 현재의 집권세력과 이 나라의 기득권층 특히 경제 엘리트들이 그러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반해 최장집 교수를 포함한 '소수파'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열악한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개선되지 않거나 더 나빠지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일반적으로 민중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이 확산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 영역에서 이룩한 몇몇 개혁적 성과나 치적이 최장집 교수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부분적인 성과나 치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이 '양극화'의 심화로 귀결되고, 그 과정에서 민중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개선이 갈수록 요원한 일이 된다면, 그러한 '정치적' 업적이 근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기본적 경제정책이라는 것은 정책 결정자들의 주관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대통령 자신의 말처럼 시장권력에 국가권력을 넘겨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것은 한미 FTA 협상의 추진에 극적으로 집약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경제의 오늘날의 현실이 현 정부의 전적인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의 누적된 모순, 뿌리 깊은 타성에 의한 정책의 실패들로 인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양극화 추세가 심화되어온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참여정부'의 출범 당시에 새로운 정부가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가 대중 속에 근거가 있든 없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것도 '참여정부'에 대한 그러한 기대가 환멸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정부 밑에서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점할 정도로 양산되고, 역대 어느 정권에 못지않게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촌공동체를 괴멸상태로 몰아넣고서도 정부가 이 사태가 갖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에서 현 정부의 '민주적 성격'이 근본적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부 밑에서도 꾸준히 수출이 증가되고, 국가 전체의 부의 총량이 증가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흔히 지적되고 있듯이 '고용 없는 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오늘날의 경제성장 방식 속에서 그러한 부의 증가는 결국 대기업을 비롯한 경제 엘리트들의 헤게모니 혹은 사회지배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할 뿐,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지지해주는 데 기여한다고는 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유례없는 수익을 올리는 대기업과 부동산 투기꾼들이 존재하고 있는 다른 한편에 평생직장이라는 전통적인 개념 자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절대 다수 민중이 존재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심각한 '격차사회'로 빠르게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과 왜곡된 고용구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항구적인 틀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 상황이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를 들먹인다는 것은 희극이 될지도 모른다.
  
성장할수록 삶을 죄어오는 '가난'의 정체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잠시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민중의 사회경제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요건이라고 할 때, 그때 해결되어야 할 민중의 사회경제적인 욕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절대적 궁핍상태의 해결을 말하는가, 아니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말하는가. 물론 이 두 가지를 엄격히 갈라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경우에 두 가지 차원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한국에서도 최소한의 생존 자체를 어렵게 하는 비참한 빈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산업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전통사회에서는 '결핍'으로 느끼는 일이 전혀 없었을 산업문명 특유의 물자와 서비스를 획득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 쉽다. 전통사회에서 사람은 대개 보행을 통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지만, 산업사회의 우리들에게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도 체험하지 않았던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지 않으면 우리는 문명적인 삶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동차나 정기검진과 같은 문명의 이기나 '혜택'에 접근하지 못할 때 느끼는 것이 오늘날의 '가난'이며, 이것을 철학자 이반 일리치(*일리히)는 '근대화된 빈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핍되어도 생존 자체에 당장의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이러한 '근대화된 빈곤'이 참을 만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물이나 식량이 없어서 당장 고통에 직면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도시 사람들은 물이나 식량을 사먹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야 하거나, 아플 때나 혹은 아프지 않을 때도 병원에 가야 한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근대화된 빈곤'을 견디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난을 견디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물자와 서비스의 혜택은 없었지만, 그 대신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풍부한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공동체의 상호부조적, 호혜적 그물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무리 궁촌(窮村)일지언정 마을 속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을사람이 홀로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마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생활에서는 돈이 없으면 속절없이 굶어죽거나 냉랭하고 기계적인 관료적 관리대상으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가족과 친지들이 위기 때의 구명정 노릇을 해주었으나, 이제 그것도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곧바로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돈을 벌기 위한 투쟁에 필사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도시에서 월수(月收) 평균 110만 원으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우선 조금이라도 소득이 향상되거나 약간이나마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먹고사는 게 더 절박한 문제라는 주장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도 이 열악한 고용구조를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사회 속에서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적 평등이 없는 상황에서 공평한 정치적 발언권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궁핍이 바로 재앙으로 이어지기 쉬운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경제적 평등화는 한갓 관념적인 이상이 아니라 다수 민중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실천적 과제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한미 FTA를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하는 시장개방 만능주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경제적 평등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 혹은 FTA로 대변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체제는 한마디로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무제한한 이윤추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려는 목적으로 여러 다양한 사회에서의 공동체 및 자연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보호조치를 남김없이 철폐할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은 어느 국민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가 없는 초국적기업이나 금융기관의 간부, 그리고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경제학자,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행하는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력 엘리트들은 세계적 기업들의 무제한한 영리활동을 통해서 '세계 전체'가 부유해질 것이며, 그럼으로써 세계의 빈곤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해왔고, 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원래 철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경제사상으로 출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나 공적 권력에 의한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오직 시장의 규칙만 따를 것을 강력히 주문해왔다. 그들에게 시장은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늘 경제는 어디까지나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경제논리란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요구에 의해서도 제어(制御)되지 않는 자율적인 시장 메커니즘을 뜻한다. 그러나 이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부추기는 시장만능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은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상황, 즉 세상의 가장 힘없는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피나는 경쟁, 투쟁 속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 결과 당연히 경쟁에서 진 패배자들이 속출하지만, 이들을 껴안는 시장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대처 수상이 매몰차게 말했듯이, 자유시장주의의 교의(敎義) 속에서는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은 없다."
  
모든 종류의 경제발전이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신자유주의 노선에 충실하면서 민중의 복지를 말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취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은 가령 '복지 프로그램'과 같은 정치적인 의제(議題)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관한 근원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에 설마 고의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고, 민중을 배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의 정책의 결과가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변함없는 신념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시장원리주의가 최우선적인 경제논리가 될 때, 거기에는 사회적 약자들과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는 공공성의 공간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충분히 증명되어온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제논리를 계속하여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국 정책 결정자들이 무슨 이유로든 사회적 약자와 환경, 그리고 민주주의를 제물로 바치더라도, 국내외의 자본과 기업 혹은 경제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굴종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동조해야 할 동기(動機)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 FTA,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 한미 FTA 협상은 무엇보다도 국민에 대한 정부의 설명책임의 방기(放棄) 등 절차상의 문제에 있어서 이미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두려운 것은 실제로 이 협정이 맺어져서 발효가 되었을 때의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에 관한 규정이다. 이 규정이 갖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소상하게 지적해왔지만, 핵심적인 것은 이 조항으로 인해 향후 한국사회에서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공공기관이 공익을 위한 정책을 펴는 일이 극히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이 조항은 투자자의 사적 이익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을 최우선적인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사실상 국가의 공공정책 능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주권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이 점 때문에 벌써 몇몇 법률전문가들에 의해서 이 조항의 위헌성(違憲性)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미 FTA는 단순히 무역에 관한 협정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타의 FTA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포괄성'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에 통합된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를 뿌리로부터 흔들어놓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변화 그 자체를 기피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한미 FTA로 인한 이러한 예상되는 변화 혹은 전면적인 '혼돈'을 생각하면, 실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간과해서 안 될 것은, 한미 FTA와 같은 통상조약이 한번 맺어지면 일방이 원한다고 해서 폐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쉽게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예컨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와 같은 규정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를 말하고, 그 실천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시장개방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다시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필리핀 대학의 사회학자이자 세계적인 '반세계화' 이론가, 활동가이기도 한 월든 벨로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미국정부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자유무역주의를 설파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이 근년에 와서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한 다자주의 무역방식 대신에 개별국가와의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따져보면, 미국이 국제사회의 게임의 규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정당한 요구에 응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 WTO 도하라운드 협상에서도, 미국은 자국의 농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철폐하라는 개발도상국들의 일치된 요구를 끝끝내 거부했고, 이것이 협상의 좌절을 자초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자주의 무역의 이상'을 스스로 훼손하면서까지 자기중심적인 입장에 철저한 미국이 FTA와 같은 양자 간 무역협상에서 그 기본적인 자세를 달리할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지난 1년간 진행되어온 한미 FTA 협상의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더라도 미국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하는 여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이 협상 종료시까지 변함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오늘날 '자유무역협정'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정작 협상과정에서 상대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거의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미국경제가 허약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현재 미국은 점점 불어나는 막대한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로 매우 위태로운 경제상황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최대의 시장을 가진 국가로서 당면한 인류사회 공통의 난제들에 대응하는 데 너그러운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세계평화를 어지럽히고, 지구온난화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까지 위협하는 장본인이 되고 있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가 그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소련의 붕괴를 정확히 예측하여 주목을 받은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엠마뉘엘 토드는 2002년에 처음 출판된 그의 저서 <제국 이후>(*<제국의 몰락>)에서, 오늘날 미국이 '연극적 소규모 군사행동주의'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은 미국 자신의 산업적 기반의 허약함을 은폐하려는 기도라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행동주의'가 반드시 '연극적'인 은폐수단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라크에 대한 침략이 석유자원 확보라는 숨겨진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군사행동은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유력한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뉴욕타임스〉의 논설필자 토머스 프리드먼이 솔직하게 말했듯이, 미국의 군대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여하튼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하여 시장개방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집요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지금 한미 FTA 협상과 병행하여 커다란 쟁점이 되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BSE) 소가 발견됨으로써 수입이 중지된 미국산 쇠고기는 그후 우여곡절 끝에 작년 하반기에 다시 수입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세관의 검역과정에서 쇠고기 속에 뼛조각들이 들어있는 게 확인됨으로써 다시 잠정적으로 수입이 중단되었고, 그 때문에 이 문제는 지금 한미 간 주요 통상현안이 되어있다. 그런데, "광우병 위험물질은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에 고농도로 축적되어 있으며, 뼛조각이 들어있다는 것은 배근신경절 등 신경조직이 살코기에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뜻한다."('미국산 쇠고기 수입 저지 국민운동본부 성명서' 2006.12.7)

따라서 뼛조각은 수입되는 쇠고기 속에는 당연히 포함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하도록 양국 사이에 이미 양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뼛조각이 포함된 쇠고기에 대한 통관금지를 결정한 한국정부의 조치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향후 미국산 수입쇠고기에 대한 위생검역 자체를 면제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자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최소한의 소임마저 포기하라는 이러한 요구는, 간단히 말하면, 국가주권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압력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가 과연 안전성이 보증될 수 있는 것일까.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기까지 미국의 전체 성우(成牛) 4200만 마리 중 검사를 받는 소는 연간 2만 마리에 불과했다. 즉, 0.05%만의 소가 검사를 받고 있었다. (검사 규모의 축소는 1주일간 100만 달러 정도 드는 검사비용과 관계있을 것이다.) 광우병 발생 후 여러 나라 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의 권고에 따라 미 농무부는 그 후 2년간 약 76만 마리를 검사하였다. 그 결과는 "광우병 발생률은 어른소 100만 마리 당 1마리 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는 건강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6년 2월의 미 농무부 감사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검사체제로는) BSE(광우병) 발생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추계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검사 표본을 채취하는 방법이 엉터리인데다가 그 수도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大野和興,〈檢證―美國産牛肉(上)〉日刊ベリタ, 2006년 7월 24일)
  
광우병 소가 발생하면 그 목장은 수많은 소를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엄청난 손해를 입기 때문에 과연 미국의 축산업자들이 그러한 원칙을 지키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모든 소에 귀걸이를 부착해놓고 일평생 소를 관리, 추적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 아마도 괴상한 동작을 나타내거나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소만 목장의 한 구석이나 사막에 묻어버리고 말 가능성이 있다고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문제를 생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육골분(肉骨粉)을 소의 사료로 쓰는 것을 아직도 전면 금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나 양 등 반추동물의 시체나 내장을 원료로 해서 만든 이 육골분 사료로 인해 초식동물인 소들이 육식을 강요당했고, 그 과정에서 광우병의 원인물질이 생성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과학자들이 경고해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반추동물의 육골분을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것만을 금지하고 있을 뿐이다. 즉, 죽은 소의 시체나 내장으로 만든 육골분을 닭이나 돼지에게 주는 것은 허용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광우병의 원인물질이 먹이사슬에 따라 계속 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도 그 사슬 가운데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영국 수의(獸醫)시험장에 의하면, "소는 광우병에 걸린 뇌조직의 불과 10밀리그램을 먹어도 감염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허다한 문제가 있지만 또하나 특기할 것은 미국의 쇠고기 처리공장에서의 작업과정이다. 2004년 여름 일본을 방문한 미국 최대 식육회사 '타이슨푸드'사의 노조위원장의 증언에 의하면 "12초에 1마리라는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의 빠른 속도로 소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노동재해가 빈발하고,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늘 인부들이 교체되고, 그래서 숙련노동자가 드물다. 게다가 위험 속에서 작업을 늘 거칠게 하는 탓에 특정위험부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섞이는 일도 드물지 않다."(大野和興,〈檢證―美國産牛肉(下)〉日刊ベリタ, 2006년 7월 27일)
  
미국산 쇠고기가 이렇다고 해서 한국정부가 언제까지 미국정부의 압력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버티는 척은 하겠지만, 결국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를 허술한 검역과정을 거쳐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미국산 쇠고기를 회피하려면 그것을 먹지 않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소비자들은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를 명확히 해줄 것을 상인들이나 정부당국에 강력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미 FTA가 발효된 상황에서,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가 미국산 상품에 대한 차별조치 금지 규정에 걸리거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의 대상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꺼림칙한 고기를 먹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두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한미 FTA라는 덫에 빠진 것은, 좀더 깊이 따져볼 때, 지금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장동력'이 꺼져간다고 하면서 '이대로 가면' 선진국 진입은 고사하고,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토로하는 목소리는 이른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허다한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한평생 문학에 관한 글을 쓰고,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쳐온 어느 원로 문학평론가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난"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간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한 지식인은 최근 들어 "지금 한국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노동운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다소 뜻밖의 제안까지 내놓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반드시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조만간 어떤 정부, 어떤 정책 결정자이든, 그것이 돈이 되고,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지는 것이라면 한미 FTA건 혹은 다른 어떤 도박이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한미 FTA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하는 한국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20년 남짓 "무섭게 성장 질주를 해온" 중국이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있다"는 일본과 같은 이웃나라들을 포함해서 소위 글로벌화 시대의 세계 전체의 현실을 냉정히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와 같은 성장지상주의에 입각한 경제발전이 더 확대되어서는 조만간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공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인간성과 농촌공동체의 파괴를 비롯하여 빈부격차, 전쟁, 환경 및 에너지 위기 등 온갖 난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시급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들이지만, 이러한 과제들이 계속적인 경제발전에 의해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이야말로 이 모든 위기와 난제들의 원인이었거나 이러한 사태를 악화시켜온 주범이었다. 우리는 이 기초적인 사실을 정확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흔히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한 빈부격차 해소를 운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빈부격차란 경제성장의 필연적인 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토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이윤창출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힘의 격차라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성장의 결과는 또 필연적으로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정말로 고르게 산다면 거기에는 자본주의도, 경제성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하다.
  
실제,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확대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그 내부든 외부든 식민지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왔다. 오늘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들은 실은 모두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토착민들에 대한 식민지적 침탈과 지배에 연루되어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러니까, 식민지가 없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면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식민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농촌공동체의 와해와 하층민에 대한 착취는 불가피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국경을 넘어 초저임금 노동자와 세계 각처의 농민들이 사실상의 식민지 역할을 떠맡게 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근대화 혹은 산업화라고 불러왔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경제발전 혹은 근대화라는 기획의 계속적인 확대를 통해서 빈곤도, 누추함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가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의 명민한 관찰처럼, 대도시의 화려한 고층빌딩만 근대 건축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고층빌딩들 사이의 누추한 슬럼도 틀림없는 근대 건축이다. 근대화된 세계란 이처럼 현대식 빌딩이 대변하는 표(表)와 슬럼이 대변하는 리(裏)의 동시적 공존에 의해서 구성되는 구조물이다. 여기에서 표리관계를 무시하고, 표의 세계만의 독자적인 발전을 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슬럼을 원하지 않는다면 화려한 현대식 빌딩도 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근대교육을 받아온 우리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미신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문명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물질적 풍요와 생산력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생활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고 선진적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믿음이 확산되고, 그런 맹목적인 믿음 속에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 2만 달러로, 그리고 다시 3만 달러의 시대로….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또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끝없는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질주가 허망한 것임을 설혹 모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다른 사회들도 똑같이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절멸 직전의 '이스터 섬(Easter Island)' 사람들의 상황과 흡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소개된 제레드 다이어먼드의 책 <문명의 붕괴>에는, 한때 풍요로웠던 문화를 일구었던 남태평양의 고도(孤島) 이스터 섬의 주민들이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거대한 석상(石像)들을 부족간에 경쟁적으로 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석상의 제작과 운반에 필요한 나무를 함부로 베어냄으로써 마침내 불모화된 자연 속에서 절멸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생태계가 붕괴되고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최종 단계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침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동료인간을 죽이고, 식인(食人)까지 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내몰린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그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숲이 남아있었을 때 이 절해고도의 숲을 죄다 파괴해서는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까지 계속해왔던 관성대로 석상 건립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권력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섬의 마지막 남은 한 그루 나무까지 베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스터 섬' 외에도 생태적 조건에 적합하지 않은 생활방식을 고집하다가 결국 지상에서 절멸되어버린 몇몇 인간집단의 경우가 더 소개되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런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단순히 신기한 옛날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먼드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악화일로를 치닫는 생태적 위기 앞에서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손자들의 할아버지로서 깊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이들 인간집단이 절멸되어버린 공통의 원인은 그들 자신의 생태적 조건에 반하는 생활방식에 있었지만, 그러한 생활방식이 계속된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핵심적 가치(core values)'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인류사회를 절멸의 벼랑으로 데려가고 있는 '핵심적 가치'란 바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적당한 성장'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회에서든 경제성장이란 언제나 그 사회의 가동(稼動) 가능한 모든 인적·물적 에너지를 전면적으로 투입할 것을 강요한다. 경제성장은 절제라는 개념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고도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어떤 경제성장이든 그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일종의 국가총동원체제이다. 그러므로 성장지향 국가란 본질적으로 군사국가 혹은 독재국가와 동일한 '폭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개발독재 시대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 '개혁'이니 '구조조정'이니 '노동시장 유연성'이니 혹은 '경쟁력 없는 농업의 퇴출'이니 하는 갖가지 이름에 의한 인권 탄압과 시민적 권리에 대한 제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 새로운 억압은 그 강도와 방식에 있어서 어쩌면 개발독재 때보다 더 가혹하고 간교한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 군사독재 치하도 아닌데, 노동운동을 제약하고, 필요하다면 노동쟁의 자체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압도적인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반대개념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희망의 보루, '우정'과 '환대'
일찍이 근대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대체로 민주주의의 성립과 발전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과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의 관점과는 달리,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파괴할 가능성에 대해 깊이 우려해온 사상가들도 적지 않게 존재해왔다. 지금은 이러한 사상가들에게 좀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사상사가 셀던 월린 교수도 그러한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데, <정치와 비전>이라는 고전적인 저서 속에서 그가 예민하게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이다.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한 가장 필요한 조건의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공성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동일시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런 의미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관심은 희박하다. 그들은 자유시장의 발달만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인 현실로도, 과학적인 분석으로도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일 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오직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차원으로 축소시켜 이해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극히 왜소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란 물질적 생산력이나 생활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며, 개인들의 정신적 자질에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로서 영국 노동당의 지도적 이론가이기도 했던 R. H. 토니가 오래 전에 했던 발언은 매우 인상적이다.―"가난하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사회가 될 여유가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사회도 단순히 부유해짐으로써 올바른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투철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토니는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정치제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폭군적인' 경제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였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제도에 머무를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되지 않는 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부형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회유형이며 생활방식이다. (…) 하나의 사회유형,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되려면 첫째, 그것은 모든 형태의 특권을 단호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둘째, 그것은 흔히 무책임한 폭군이 되어있는 경제권력을 제어하여,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전환시켜야 하고, 그 권력이 또한 명확한 한계 내에서 활동하도록 하여, 공적 권위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R. H. Tawney, Keeping Left, 1950)


  
토니의 말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집약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온갖 문제들이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를 부추기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극복될 것이라는 미신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끝없는 생산력의 증대와 물질적 풍요를 겨냥하는 성장경제 논리는 차별과 격차를 끊임없이 양산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세계의 황폐화를 초래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궁극적으로 평등한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사람들 사이의 우정(友情)과 환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07. 03.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짱꿀라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어떻게 쓸까? 

- 이규보의 〈論詩中微旨略言〉

 

#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있는 정민교수의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올립니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論詩中微旨略言)〉은 시창작의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한 글이다. 800년 전 시인이 말한 시창작상의 여러 문제를 오늘에 비추어 읽어보면 어떻게 읽힐까? 따라 읽기 방식으로 이규보의 글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1] 대저 시는 뜻이 중심이 된다. 뜻을 펼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이다. 뜻은 또 기(氣)가 중심이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시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가 저열한 자는 글을 꾸미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뜻을 앞세우는 법이 없다. 대개 그 글을 아로새기고, 그 구절을 꾸미면 어여쁘기는 하겠지만, 그 속에 함축하여 깊고 두터운 뜻이 없고 보면 처음엔 볼만해도 두 번만 읽으면 맛이 다하고 만다.
 
시의 출발은 뜻[意]에 있다. 어떻게 쓸까 보다 무엇을 쓸까가 먼저다. 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글이 다 그렇다. 생각이 정해지면 표현은 저절로 따라온다. 추상적인 생각의 덩어리가 작품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기(氣)다. 기는 마음 속에 쌓인 기운, 즉 생각을 펼쳐가는 힘이다. 무엇을 쓰겠다는 구상만으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운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좋은 시는 이런 기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머리 속의 생각만으로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 생각을 끌고 나가는 힘은 기에서 나온다. 많은 독서와 여행의 체험이 이 기운을 길러 준다. 그런데 그 기는 인위적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일정 부분 타고난다.
 
기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노력할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기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노력 없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양기(養氣) 공부, 즉 기를 기르는 공부를 중시했다. 기는 어떻게 해야 길러지는가? 뜻이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양기 공부를 위해 구방심(求放心)과 무자기(毋自欺)의 수양에 힘을 쏟았다. 마음이 제 멋대로 놀러 나가지 않도록 방심을 막고,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공부를 계속하면 마음 속에 호연한 기상이 차곡차곡 쌓인다고 믿었다. 
 
시론 책을 열심히 읽고, 시창작 교실을 열심히 다닌다고 좋은 시인이 되는 법은 없다. 이론을 몰라도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가 부족한 사람은 기교로 제 부족한 부분을 덮어 가리려 한다. 뜻이 서지 않은 채 기교를 앞세우면, 처음엔 사람의 눈을 놀래키지만 금세 싫증이 난다. 한 두 번은 몰라도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천박한 바탕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쥐어짜듯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고, 처음엔 그럴 듯 하다가 두 번만 읽으면 혐오감이 느껴지는 시가 있다.   
 
[2] 비록 그러나 스스로 먼저 운자를 정하되, 뜻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고쳐도 상관없다.

다만 남의 시에 화답할 때는 만약 험한 운자가 있으면 먼저 운이 맞는 가를 따진 뒤에 뜻을 얹는다. 이때는 차라리 그 뜻을 뒤로 돌리더라도 운은 알맞게 놓지 않을 수 없다. 대구를 맞추기 어려운 구절은 한동안 생각해 보아 쉬 얻을 수 없을 것 같으면 즉시 떼어버려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옳다. 왜 그럴까? 그 시간이면 전편을 얻기에도 충분할 터이니, 어찌 한 구절 때문에 한편을 지체시키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한시의 창작은 운자를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운자는 한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하지만 이 규칙도 펼치려는 뜻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운자를 화답할 경우에는 운의 조화가 중요하므로, 뜻에 대한 배려를 조금 뒤로 할 수도 있다. 지훈이 〈완화삼〉에서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라고 하자, 목월이 〈나그네〉에서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로 받은 것이 그것이다.
 
한시는 구절과 구절 사이의 호응을 중시한다. 대개 먼저 떠오른 한 구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1구부터 차례로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3,4구나 5,6구를 먼저 지은 후 앞뒤로 채워 나갈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한 구절에 집착하여 전편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다. 이점은 현대시도 마찬가지다. 문득 떠오른 한 구절은 시 창작의 계기를 마련해주지만, 그 첫 번째 느낌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3] 시간에 맞추어 서두르면 시가 군색해진다.

처음 구상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면 빠지게 되고, 빠지면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면 헤매게 된다. 헤매다 보면 집착하게 되어 통하지 않게 된다. 다만 출입하고 왕래할 때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며, 앞을 보면서도 뒤를 돌아보아 변화가 자재로운 뒤에야 막히는 바 없이 원숙하게 된다. 혹 뒷 구절을 가지고 앞 구절의 잘못된 부분을 구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구절의 타당함을 돕기도 하는 것이니, 이점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둘러 지은 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무 지나친 생각은 시를 엉겨붙게 만든다. 이것을 제재로, 혹은 이런 주제로 시를 지어야지 하고 작정하면 그 생각에 빠져 얽매이고, 탈출구를 찾아 헤매이다 보면, 이것이 집착이 되어 생각이 꽉 막힌다. 시는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설계 도면에 따라 제작할 수도 없다.
 
구절마다 모두 좋으려 들것도 없다.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게 뛰어나면 다른 부분이 혹 부족하더라도 괜찮다. 시에도 치고 빠지는 리듬이 있다. 강약중강약의 호흡이 있다. 뻣뻣하기만 하면 부러지고, 부드럽기만 하면 물러터진다. 어깨에 힘을 빼고 전후좌우 경쾌한 행보를 유지해야 한다. 시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는 전체의 조합에서 나오는 것이지 부분의 완결성에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4] 오로지 청고(淸苦)하려고만 하는 것은 산에 사는 중의 격식이다.

곱고 어여쁜 것으로만 꾸미는 것은 궁녀들의 격조다. 능히 청경(淸警)·웅호(雄豪)하면서도 연려(姸麗)·평담(平淡)할 수 있어야만 갖추어진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남들이 한 체재로 이름지을 수가 없다.
 
고기를 먹지 않는 중처럼 맑은 소리만 한다고 좋은 시가 아니다. 궁녀의 하소연처럼 분단장 냄새가 나는 곱고 여린 것만으로도 안된다. 때로는 호방하고, 어떤 때는 섬세하고, 간혹 덤덤하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다양해야 한다. 한 색으로 갇히면 그 시는 끝난다. 등단해서부터 늙어서까지 똑같은 목소리만 내고 있다면 그 시는 죽은 시다.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데 시만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젊은 날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시라고 발표하는 시인은 보기에 차마 민망하다. 차라리 붓을 꺾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 소리가 그 소리인 끊임없는 자기 복제는 답보의 표징일 뿐이다. 

 시는 부단히 변하면서 늘 변치 않아야 한다. 나만의 색깔을 지니되, 그 색깔이 한결 같아서는 안된다. 늘 같으면서도 언제나 다른 그런 시, 남들이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시가 살아 있는 시다.
 
[5] 시에는 아홉가지 마땅치 않은 체(體)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얻은 것이다. 한 편 안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수레 가득 귀신을 실은 체`다. 옛 사람의 뜻을 취해오는 것은 도둑질을 잘해도 하기 힘든데, 도둑질 마저 시원찮을 때 이를 `못난 도둑이 쉽게 붙잡히는 체`라 한다. 어려운 운자를 쓰면서 근거가 없는 것, 이것은 `쇠뇌를 당기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체`이다. 그 재능을 헤아리지 않고 운자를 씀이 지나치게 되면 이는 `주량보다 넘치게 술을 마신 체`이다. 험벽한 글자 쓰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쉬 현혹시키는 것, 이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이다. 말이 순하지 않은데도 굳이 인용하는 것은 `남더러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체`다. 일상어를 많이 쓰는 것은 `시골 사람이 모여 얘기하는 체`이고, 꺼리는 말을 잘 범하는 것은 `높고 귀한 분을 능욕하는 체`이다. 말이 황당한데도 깎아내지 않으면 `잡초가 밭에 가득한 체`이다. 이런 마땅치 않은 체를 면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가 있다.  
 
앞선 시인의 구절을 슬쩍 끌어다 쓰거나, 감당치도 못하면서 근거없는 큰 소리를 쳐대는 것, 그럴듯한 표현으로 남의 이목을 현혹하고, 아닌 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 되는대로 떠들고 황당한 말을 해대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시의 적이다. 한유는 사필기출(詞必己出)이라고 했다. 반드시 자기의 목소리를 내라는 뜻이다. 또 진언지무거(陳言之務去)를 강조했다. 남이 이미 많이 써서 진부해진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란 것이다. 두보는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즉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말마다 신기한 말을 쓰고 작품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을 담으란 말은 아니다.
 
대개 시의 병통은 알맹이 없이 폼만으로 어찌 해 보려 할 때 생겨난다. 이들은 암호문과 상징 은유를 구분하지 못하며, 설교와 주제의식을 혼동한다. 누구도 모를 소리를 하면서 독자의 낮은 수준을 개탄한다. 답답한 나머지 자기 시를 자기가 해설한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구덩이를 파놓고 어리숙한 독자를 인도하는 시, 알량한 권위를 내세워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시, 감당도 못하면서 주제만 고상한 시, 슬쩍슬쩍 베껴와 짜깁기한 시는 지금도 너무 많다. 그 중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인간과 시가 따로 노는 시다.  
 
[6] 남이 내 시의 병통을 말하면 기뻐할 만한 점이 있다.

말한 것이 옳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 뜻을 따를 뿐이다. 어찌 반드시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부하여 끝내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겠는가? 무릇 시가 완성되면 되풀이 해서 살피기를, 대략 자기가 짓지 않은 것처럼 살펴 보고, 마치 다른 사람이나 평소에 몹시 싫어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그 흠집을 즐겨 찾되, 오히려 흠을 알지 못하게 된 뒤에야 발표할 일이다. 대저 논한 바는 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문장 또한 비슷하다. 하물며 고시는 문구가 아름답고 압운이 끊긴 것 같은 것을 좋게 여긴다. 뜻이 아름답고 여유롭고 말 또한 자재로워야 얽매이지 않게 되니, 그렇다면 시나 문장은 또한 한 가지 법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내 시를 두고 나쁘게 말하면 발끈한다. 칭찬하면 실상보다 지나쳐도 흐믓하기만 하다. 남의 지적을 들으면 우선 기뻐할 일이다. 그 말을 들어 옳게 여겨지면 따르면 그뿐이다. 수긍할 수 없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면 된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들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에 빠지고 만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작심하고 흠집을 찾아내서 과감히 고칠 줄도 알아야 한다. 꼴보기 싫은 사람의 시를 흠잡는 기분으로 자기 시를 냉정하게 비판하라. 그 다음에야 비로소 발표한다. 이것은 비단 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산문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사람 사는 일도 한 가지다. 남의 허물은 잘도 잡으면서, 자기의 허물은 슬쩍 눈감아 버린다. 남의 칭찬에는 그리도 인색하면서, 누가 제 칭찬이라도 하면 금방 입이 벌어진다.
 
정지용은 〈시와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꾀꼬리 종달새는 노상 우는 것이 아니고 우는 나달보다 울지 않는 달 수가 더 길다." 또 이렇게 말했다. "시가 시로서 온전히 제자리가 돌아빠지는 것은 차라리 꽃이 봉오리를 머금듯 꾀꼬리 목청이 제철에 트이듯 아기가 열 달을 차서 태반을 돌아 탄생하듯 하는 것이다." 되는대로 떠드는 것은 시가 아니다. 읽어 모를 시는 시가 아니다. 풍경이 떠오르지 않고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잠자던 정신이 화들짝 돌아오고, 늘상 보던 사물인데 처음 보는 듯하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나 말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시가 시다. 살아있는 진짜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강준만과 한국현대사의 급소

지난 토요일 강남 교보타워에서 열린 강준만 교수의 대중강연이 오마이뉴스(오마이TV)에 전문 게재돼 있다. <한국현대사 시리즈>(전18권) 완간 기념으로 개최된 강연인데, 지난 10여년간 그만큼 지속적이고 열정적으로 한국사회에 대해 발언한 지식인/학자도 없지 않나 싶어서 나는 이전에 '송건호 언론상' 수상소감을 옮겨놓으며('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아예 '강준만의 시대'란 표현을 쓴 바 있다. 나는 그에게 찬성하든 반대하든 한국사회에 대한 담론의 한 출발점을 마련해준 공로에 대한 평가는 결코 과장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이유이다. 그의 강연문 요약과 그에 대한 정리 기사이다.

오마이뉴스(06. 11. 04) '좌우 통합을 위한 현대사의 급소'  강연 요약

사람들이 왜 나이 들면 보수화 되느냐. 내 나이 50이 넘어서니까, 나이 들면서 느끼는 게 많다. 난 원래 성격이 소심해서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희망 없다 싶어 의지로 극복했다. 그런데 나이 들면 (소심함이) 다시 돌아온다.

미리 양해 말씀드리겠다. 이 귀한 시간에 머릿속에 정리된 현대사를 말하는 게 예의일 테지만, 이미 적응된 여러분 시각 뒤흔들고 도발적으로 우리가 믿고 있던 상식을 뒤엎어볼 생각이다.

내가 드리고자 하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좌우통합'이라 할 수 있다. 내년부터 봐라. 한국사회 좌우 갈등을 극복하고 중간파 노선 정립 못하면 쓰러질 지경에 와있다. 갈등 노선 골 깊다.

오늘 10가지 이야기를 선정적으로 '급소'라고 했는데 주제는 하나다. 박정희를 열렬히 지지하는 '우'와 박정희를 열렬히 혐오하는 '좌' 사이에 대화가 가능할 때가 있지 않겠나. 좌우 편향된 사람에겐 중간이 기회주의적인 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양쪽에 문제제기 해보겠다.

1. 축복과 저주는 분리 불가능하다

내가 전에 '전쟁이 축복'이란 글을 썼다. 미국은 전쟁으로 큰 나라다. 독일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다. 전쟁을 혹독하게 겪고 나서 경제발전 한다. 전쟁 끝나고 나면 기득권층 모두 망해버려 새로 출발할 수 있다. 전쟁 덕분에.

현대사 전공한 학자들도 말한다. 한국전쟁 이후 봉건적 잔재 일소해 버리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등 경제발전 이뤘다. 성수대교가 붕괴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우리가 뭐라 했나? 당시 김영삼은 5000년 동안 썩은 나라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정주영 신화 있고, 엄청난 성공신화에 우리가 박수쳤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 만들면서 얼마나 많이 죽었나? 다 10% 위험요소 있다. 어쩌다 성공한 건 축복하면서, 어쩌다 실패하면 영원히 저주받을 것처럼 말한다.

우리 과거를 군사주의라 뭐라 비판하지만 그 핵심 고갱이는 사라졌나? 군사주의가 나쁘기만 했나? 파시즘을 대량학살로만 생각하고 끔찍한 결과를 낳았지만, 지식인이 파시즘에 매료된 요소가 있다. 반자본주의와 민족의 영광을 부르짖으며 독일의 불안한 요소를 다 끌어들였다.

군사주의로 엄청 희생 많았지만 끔찍한 결과만 봐선 안 된다. 군사주의는 일사분란한 거다. 우리에게 이게 사라졌나? 아직 충성과 아첨이 판친다. 신세대가 술 마시라고 해서 마시고 사고 나지 않냐? 다르지 않다. 핵심 정신은 우리 속에 살아있다.

또 하나 개발독재라 비난 하잖나? 그러데 끝났나. 개발이 사라졌나? 그대로다. 박정희 체제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다. 나쁜 점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2. 퇴출시킨 지정학, 공간학을 다시 보자

지정학 악용한 게 히틀러다. 지정학은 가치중립적 개념이 아니다. 강대국에게 이용된 거다. 공간학? 마찬가지다. 공간학은 이런 거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서울 인구밀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거다. 물론 그래서 6월 항쟁 이런 건 좋은 점이지만, 나쁜 점은 아파트값 폭등하거나 환경이 안 좋다. 작은 장소에 한꺼번에 많이 몰아넣으니까.

이게 한국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쏠림이다.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 일개인한테만 책임 묻나? 공동책임이다. (대통령이) 국민 모두가 내팽개칠 과오를 진 게 아니다. 싸가지 없던 건 이전부터 유명했다.

동질적인데다 고밀도, 이걸로 다 설명된다. 한국만큼 동질적인 데가 없다. 도시 집중화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인구밀도가. 미국 유럽에선 이런 이론이 나올 수가 없다.

지정학도 마찬가지다. 나부터도 미국 유학 갔다 왔다. 솔직히 내 경쟁력 때문에 갔다. 미국 가서 더 배울 게 있어서 간 게 아니고. 왜 기러기 아빠들이 많은 줄 아나? 내부경쟁력이다. 솔직히 그러다보니 한국 인문사회 다 미국화가 판친다.

유럽파가 미국 유학파가 문제라고 다른 시각 보여주긴 하는데, 그건 '유럽파 억울하다' 그거지. 문젠 외국 나가서 한국에 대해 배우진 않는다. 미국, 유럽 사회 모델을 배운다. 아는 게 그래서 한국사회 분석할 때 그 틀 가져다 할 수밖에 없다. 너무 그쪽 갖고 하다보니 너무 우리 사는 것과 아는 것의 괴리가 생겼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우리 현실이 따로 논다. 현실 문제를 학술적 주제로 올리는 건 천박하게 보인다. 신문 오린 거, 신문 쪼가리 올리면, 원서를 올려야지… 그런다.

3.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갈등 혼란의 주범이다

이런 한국 특수성이, 한국만큼 강한 나라가 없다. 탈근대 강남 일부지역, 근대 서울 보통지역, 전근대는 먹고 살기 힘든 지방 가면 전근대 있다. 그럼 정말 지역으로 분리됐냐? 아니다. 강남에도 전근대 있다.

대학교수가 조교 다루는 솜씨는 전근대 곱빼기로 보인다. 그들이 한국사회 아름다운 인권… 얘기하지만, 사적 생활 돌아가면 조교를 종처럼 쓴다. 우리 모든 분야 걸쳐 그런다.

소통 참 어렵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얘기한다. 이러니 얘기가 안 된다. 우리는 압축성장해서 전근대를 그대로 갖고 있다. 탈근대, 전근대 이 싸움은 정말 어렵다.

이해하기 쉽게, 노무현 대통령의 신당 창당? 근데 이게 탈근대 원리에 의해 이뤄졌나? 줄서기란 전근대로 이뤄졌단 증거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 파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대통령은 모를 거다. 청와대 사칭 사건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많이 일어난다.

다른 나라와 차이가 나는 특정 부분 키운 건 군대다. 군대가 특정 부분 키우고 특정 부분 억눌렀다. 군부가 지배한 시절 지냈다. 정치엔 월급 주며 야당 키웠다. 한 세대 정치를 죽여 놨다. 죽여 놨음 부활할 텐데, 버려놨다. 한 시대 버려놨으니 복원하려니 오래 걸린다.

대한민국 정치인은 쓰레기라 부르는 분들 있는데, 그리 부르면 쓰레기 아닌 거 드물다. 분리수거 해야지. 어떻게 한 집단을 싸잡아 쓰레기라 할 수 있나?

실용주의란 말이 한국처럼 오남용 되는 나라가 있을까? 한국은 실용주의가 사치스럽다. 아직은. 우리 공기업 봐라. 어디 실용이 있나? 실용, 아직 하지도 않았다. 미국, 일본은 실용으로 큰 나라다. 미국에 부작용 있다는데, 아직 해보지도 않고 실용주의 욕하냐?

내가 어디서 다원주의 얘기하니 욕하더라. 너무 앞서가고 있더라. 다 바깥에서 들어와서 현실 욕하는데, 내가 디딘 땅 딛고 얘기하자.

박정희 대통령 1기, 2기 나눠야 한다. 3기까지. 5·16 쿠데타 했다고 욕하지만 당시 5·16은 진보세력의 지지 받았던 거다. 적극지지 아니지만 담담하게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그걸 우린 소급해 한꺼번에 뭐라 한다. 이완용이 하면 매국노! 하지만 그에게도 한국 신개혁 기여한 공로가 있다. 명암 있다. 두 가지 다 이야기해주면 안 되나?

4. 사대주의에 대한 이중성을 극복해야 한다

왜 이중성인가? 실리 너무 못 찾는다. 사적영역까지 그리 산다면 아름다울 거 같다. 세계에서 유래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나라일 거다. 그런데 반미주의적 기러기 아빠는 어찌 볼 건가? 만나보면 미국 막 욕한다. 그런데 미국 간 딸 송금하느라 등골이 휜다.

내가 한 번 물어봤다. "당신 같은 반미주의자가 왜?" 그러니 그가 그러더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미국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 그러더라. 새빨간 거짓말이다.

물론 안 그런 부모도 있다. 그건 이름 없는 부모다. 앞장섰던 사람만 다 본전 뽑았다. 김영삼, 김대중, 그 분들 성금 모아 이름 없는 분들 도와줬나 모르겠다. 내가 1단 기사로도 그랬다고 본 적이 없다.

진보, 보수 중요하지 않다. 좌우가 투쟁할 때가 아니다. 엘리트와 투쟁해야 한다. 희생까진 아니더라도 자기 욕심을 자제할 사람과 해야 한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더러 "돈 내놔라" 했다가 얼마나 욕먹었나.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재산 반 좀 내놓으십쇼" 그랬더니 나더러 내놓으래서 "난 내놓을 수 없다" 그랬다. 돈 없어서. 애들도 키워야잖아. 내가 책 팔아 떼돈 번 줄 안다.

사대주의 문제, 개인, 가족, 나쁘다고 안 본다. 자식더러 서울대 가지 말라 할 거 같냐? 개인, 가족 차원은 아름답다 생각한다. 강남 산다고 강남을 다 사랑할 거 같냐? 반은 어쩔 수 없이 살 거다. 인프라니까 살긴 살지만 짜증내는 사람 있을 거다.

그렇다고 현실주의로만 가자는 건 아니다. 좌파는 도덕, 우파는 현실, 현실과 도덕 섞으면 안 될까? 도덕과 현실 매번 하나 택해 끝까지 밀고 갈 거냐? 왜? 민주화시대 투쟁 습성 남아 있어서다. 민주화 다음은 없다. 자빠뜨리는 게 목적이다.

싸워 죽느냐 사느냐만 있지, 제3의 대안이 없다. 그게 한 시대 지속됐다. 책임 윤리가 없다. 큰 권력, 큰 집단 리드할 때 그러면 안 된다. 큰 일 난다. 확신이 없으면 나서면 안 된다.

우린 남한테 떠넘기는 심리 있다. 누군가 악역 맡아서 한다. 소설가 방현석이 멋있는 말 했다. "절대 나서면 안 된다" 직장에서도 그렇다. 누가 아이디어 내놓잖아? 다 덤터기 쓴다. "어? 그래? 김차장이 하지" 우린 다 그런다. 나서는 순간 자기 말에 책임지려 이끌려 다닌다. 말하는 순간 발목 잡혀 산다. 나도 발목 잡혀 살지않나.

5. 높은 해외의존도가 진보를 어렵게 만든다

해외 의존도가 너무 높다. 진보 운동하는 사람들이 요거 감안하는 게 좋다. 진보정당의 가장 큰 적은 냉전수구세력도 냉전꼴통도 아니다. 해외의존세력이다. 엔화가 어떻고 미국 대외정책이 달라지면 걱정해야 하고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해외 의존도가 높으니 국가주의 민족주의 바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독도가 일본땅이니 어쩌니 그런 뉴스에 국민은 스트레스 쌓인다. 국가주의 매료될 수밖에 없다. 한국 월드컵 신드롬이나 그런 게 파시즘 성향이어서가 아니고 스트레스가 늘 쌓여서다.

삼성에 대해 우린 이중적이다. 삼성 비판하다가 외국 여행 한 번 갔다 오면 그게 다 누그러진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가 없어진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6. 기회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력은 없다

과연 자유로울 수 있나? 기회주의는 한국의 속성이라 본다. 기회주의 내용, 형식 극복해야 한다기 보다 기회주의에 대한 비난은 내용에 대한 비난이다.

의식이란 건 어떤 가치관 노선으로 가다가 다른 쪽으로 돌아선다. 납득할 거 없이 한국 격동의 세월에서 기회주의 나올 수밖에 없다. 기회주의도 아전인수격 개념으로 본질은 유연성 아닌가. IT시대 한국의 유연한 적응력 이런 것도 기회주의와 관련 있다.

난 인터넷으로 공격하는 거 절대 안 본다. 인간인데 알면 기분 좋겠나? 주변에서 뭐라 전해주면 그런가보다 한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밤에 잠 안 오면, 인터넷 들어간다고 하더라.(웃음) 비난 하는 기사 나오면 보지 말아라. 대충 비난 있다더라 내용 뭐라더라 정도만 알면 된다. 그래야 뻔뻔해진다.

7. 지도자 추종은 한국인의 유전자다

현대사 봐라. 인물사다. 실제 인물중심이잖나? 민주화에 김영삼, 김대중 중심으로 움직였다. 지금 정계 개편도 또 인물 중심이다. 근현대사에 왜 우린 그런 인물 중심일까? 한국의 특수적 상황 있다.

고밀도에 쏠림 강하다. 쏠림 강하니 왕따 공포심이 강하다. 이상하게 난 이런 게 타고나길 없었다. 난 혼자 식당에 밥 먹으러 가는데 친구들이 "넌 외톨이구나?" 그러는데, 난 실용주의다. 아니, 혼자 먹는 게 뭐 어때서?

우린 이탈의 공포심이 있다. 사람들이 저리 쏠리면 지도자가 착각한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이 실수한다. 줄이 길면 한국 사람은 가게 돼 있다.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리더십을 부정하고 폄하하면 안 된다. 1인주의 개인을 폄하하고 집단주의를 선호하는 게 한국에선 안 먹힌다. 한국에선 스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출세 욕망이 대단히 강하다. 대학에 학장이 있다. 그거 봉사직이고 고생하는 건데, 사람들이 밥 사주면서 시켜야 하는데, 정반대로 밥 사서라도 하려 한다. 결혼식, 장례식도 중요 이벤트다. 내가 살아온 게 그걸로 평가 받는다.

어찌 리더십 문제가 거기서 이탈할 수 있냐? 인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갔는데 어떡하나. 한국의 미래는 인적 자원 밖에 없다. 인물 중심으로 하다보니 한국 숙명이다. 북한의 지도자 추종주의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른 나라에도 정치팬클럽이 있지만 우리나라 '빠'는 유별나잖나?

8. 출세주의와 분열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다.

사회 개혁 진보 말하는 분들도 이승만을 정권욕의 화신이라 하는데, 이거 아닌 사람 없다. 김영삼, 김대중, 은퇴한다 소리 빵빵 쳤다. 난 정말 은퇴하는 줄 알았다. 다들 내가 중심이다. 내가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

늘 경쟁은 이전투구다. 왜 괜찮은 사람도 정치권에 가면 달라지냐? 궁금하지? 궁금할 거 없다.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간다.

9. 경제는 자주 악마와 손을 잡는다

박정희 신드롬의 핵이다. 사람들이 내 입장이 모순 됐다고 하는데 난 인정할 건 인정하고 공과를 논의하자는 거다. 우리 국민 경제 발전의 역사를 보자. 한국이 너무 자랑스럽고, 보릿고개 넘고 배고픔 시대 넘어 그 부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뭘 했나?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 얼마나 벌었으며 70년대 매춘관광해서 얼마나 많이 벌었나? 세계적인 경제대국 선진국 나라 치고, 제국주의 나라 아닌 나라 있던가? 못된 짓한 나라가 잘 산다.

10. 한국은 '각개약진' 공화국이다.

이게 참 문제다. 이것 때문에 한국이 컸다. 무섭다, 교육! 믿을 건 나와 가족 밖에 없다. 부동산 안심해라 하지만 날만 새면 올라간다. 누굴 믿나? 그러니 신뢰를 어디서 찾나? 나와 내 가족이다. 우린 공적 신뢰 없고 사적 신뢰가 대단히 발달한 나라다.

영화 <괴물> 봐라. 믿을 건 가족 밖에 없다. 반면에 영화 <일본침몰>에서 거기 믿을 건 국가 밖에 없다. 자국 국과와 정부를 신뢰하는 나라와 우리와 누가 이기냐?

또 우린 학원 공화국이다. 그런데 왜 학원 업자들, 학원일 하시는 분 욕하나? 같은 대학 선배, 후배 문화가 계속 살아있고, 시민사회에서 문제 제기 안 하는데, 내 자녀 좋은 학벌 갖게 할 맘 안 사라진다. 비싼 유명 대학 다니는 이유가 뭔가? 인맥전쟁이다. 실업자 신세에서 누가 하루아침에 칼럼니스트가 되나? 영원하다, 학벌은.

오마이뉴스(06. 11. 04)  "좌우가 아닌 엘리트와 투쟁해야 한다."

"한국사회 좌우 갈등을 극복하고 중간파 노선 정립을 못하면 쓰러질 지경에 와 있다. 갈등 노선 골 깊다. …하지만 박정희를 열렬히 지지하는 '우'와 박정희를 열렬히 혐오하는 '좌' 사이에 대화가 가능할 때가 있지 않나. 좌우 편향된 사람에겐 중간이 기회주의적인 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양쪽에 문제제기를 해보겠다."

강준만은 뒤집기를 시도했다. 우리 시대 '좌파'와 '우파'가 가졌던 고정 관념을 향해서다. 그는 이를 통해 '좌우의 통합'을 역설했다.

사회비평가이자 전북대 교수인 강준만 교수는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4일 오후 2시부터 두 시간 가량 '좌우 통합을 위한 한국 현대사의 급소'를 주제로 우리 시대 '좌우'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이날 강연은 그가 1945년부터 1999년까지 55년 역사를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8권 완간 기념으로 열렸다. 교보문고와 '인물과사상사'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현대사가 주제였지만, 그의 독설은 전방위적으로 흘렀다. 그는 좌우 통합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급소'로 10가지를 콕 집어 지목했다.

1) 축복과 저주는 분리 불가능하다
2) 퇴출시킨 지정학·공간학을 다시 보자
3)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갈등과 혼란의 주범이다
4) 사대주의에 대한 이중성을 극복해야 한다
5) 높은 해외의존도가 진보를 어렵게 만든다
6) 기회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력은 없다
7) 지도자 추종은 한국인의 유전자다
8) 출세주의와 분열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다
9) 경제는 자주 악마와 손을 잡는다
10) 한국은 '각개약진' 공화국이다


"매국노 이용완도 신개혁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

강 교수는 "정돈된 생각 갖고 이 자리에 왔다가 혼란된 생각을 하면서, 욕을 하면서 나갈 것"이란 말로 조용히 포문을 열더니, 특유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청중들의 혼을 쏙 빼놨다.

이날 강준만 교수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좌우통합.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예로 든 첫 번째 '급소'는 '축복과 저주는 분리 불가능하다'라는 주제였다.

그는 우선 "미국은 전쟁으로 큰 나라이고, 독일, 일본도 전쟁을 혹독하게 겪고 나서 경제발전을 했다"면서 "현대사 전공한 학자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가 봉건적 잔재 일소해버리는 한강 기적이 일어나고 경제발전 일조한 게 있다"며 전쟁의 이면을 소개했다. 전쟁마저도 동전의 양면처럼 명암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군사주의가 나쁘기만 했나? 파시즘은 대략학살만 생각하지만 그리고 끔찍한 결과를 낳았지만, 지식인이 파시즘에 매료된 요소가 있다"면서 "군사주의는 일사분란한 것이고, 아직도 충성과 아첨이 판치는 등 핵심 정신은 우리 속에 살아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특수성이 강한 나라로, 탈근대, 전근대, 근대가 모두 공존한다"며 "이런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갈등 혼란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가령 그는 "대학교수가 조교 다루는 솜씨는 전근대 곱빼기로 보인다"면서 "그가 한국사회 아름다운 인권 얘기하지만, 사적 생활 돌아가면 조교를 종처럼 쓴다, 모든 분야 걸쳐 그런다"고 쏘아붙였다.

그는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신당 창당? 근데 이게 탈근대 원리에 의해 이뤄졌나? 줄서기란 전근대적으로 이뤄졌단 증거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면서 "대통령 파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대통령은 모를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소위 '좌와 우'가 극과 극을 달리는 현상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1기, 2기 나눠야 한다. 3기까지. 5·16 쿠데타 했다고 욕하지만 당시 5·16은 진보세력의 지지 받았던 거다. 적극지지 아니지만 담담하게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그걸 우린 소급해 한꺼번에 뭐라 한다. 이완용이 하면 매국노! 하지만 그에게도 한국 신개혁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 명암이 있다. 두 가지 다 이야기 해주면 안 되나?"

그는 또 "사대주의에 대한 이중성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반미주의적 기러기 아빠는 어찌 볼 건가? 만나보면 미국 막 욕한다. 그런데 미국 간 딸 송금하느라 등골이 휜다"고 이중적인 현실을 지목했다.

그는 이어 "진보, 보수 중요하지 않다. 좌우가 투쟁할 때가 아니다"면서 "엘리트와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좌파는 도덕, 우파는 현실, 도덕과 현실 매번 하나만을 택해 끝까지 밀고 갈 거냐"라고 반문하면서 "민주화시대 투쟁 습성 남아 있어서 자빠뜨리는 게 목적이다, 싸워 죽느냐 사느냐만 있지, 제3의 대안이 없다, 그게 한 시대 지속됐고 책임 윤리가 없다"고 비꼬았다.

"싸워 죽느냐 사느냐만 있지, 제3의 대안이 없다"

그는 '기회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력은 없다'고 단정했다. 그는 특히 "한국 격동의 세월 속에서 기회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기회주의는 아전인수격 개념으로 보면 그 본질은 유연성 아닌가, IT시대 한국의 유연한 적응력 이런 것도 기회주의와 관련 있다"고 말했다. 기회주의에 대해 손가락질만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치인은 쓰레기라 부르는 분들 있는데, 그리 부르면 쓰레기 아닌 거 드물다"며 "분리수거 해야지. 어떻게 한 집단을 싸잡아 쓰레기라 할 수 있나"라고 특유의 독설과 유머도 놓치지 않았다.

곧 이어 "높은 해외의존도가 진보를 어렵게 만든다"며 "진보정당의 가장 큰 적은 냉전수구세력도 냉전꼴통도 아니라, 해외의존세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도자 추종은 한국인 유전자"라면서 특정 인물 중심의 현대사에 대한 기존의 비판에 대해 뒤집기를 시도했다. 그는 "한국에선 스타가 있어야 한다"면서 "인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갔는데 어떡하나? 한국의 미래는 인적 자원 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출세주의와 분열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라면서 "사회 개혁 진보 말하는 분들도 이승만을 정권욕의 화신이라 하는데, 이거 아닌 사람 없다. 김영삼, 김대중, 은퇴한다고 소리 빵빵 쳤는데 다들 내가 중심이라고 한다, 왜 괜찮은 사람도 정치권에 가면 달라지냐? 궁금하지? 궁금할 거 없다.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끝으로 "한국은 '각개약진' 공화국"으로, "믿을 건 나와 가족 밖에 없다"며 강 교수는 "인맥 전쟁 때문에 사교육은 어찌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학벌은 영원하다"고 꼬집었다.(김정훈/조은미 기자)

06. 11. 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오디오 베이직 스토리 - 04. 앰프

오디오 베이직 스토리 - 04. 국적별로 따져본 앰프 메이커

- 바람구두

미국 : 한때 미국산 앰프들은 그 뛰어난 성능으로 전세계 오디오 시장을 거의 평정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산 앰프의 대량 생산과 대중적으로 접근이 비교적 쉬운 가격에 밀려 그 활동이 많이 위축되기도 했다.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순수 미국제 앰프들은 거의 하이엔드급이라고 할만한 기기들이며 이들 앰프의 특징은 설계단계부터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음질만을 추구하는 이른바 cost - no - objective정책으로 임하기 때문에 비용과 크기를 줄일 수 있는 OP앰프 IC와 같은 부품을 사용하기 보다는 특성이 좋은 개별 트랜지스터를 사용하여 회로를 구성하는 설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종음질에 결정적 요소가 되는 전원트랜스포머, 전해콘덴서 등 주요부품은 대용량제품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따라서 앰프의 크기가 커지고 무거워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제작 과정에서도 전자동으로 처리하기보다는 부품을 하나하나 검사해가면서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맥킨토시랩(McINTOSH LAB)
미국산 앰프의 대명사격이지만 현재 실 소유권은 일본으로 넘어가 있다. 1949년 미국 동북부에 있는 빙햄톤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하여 앞에 이미 설명한 진공관 앰프 시절에 전성기를 맞이 했었다. 이외에 마크 레빈슨을 생산하는 마드리갈(MADRIGAL), 실제 마크 레빈슨 앰프의 디자이너인 마크 레빈슨이 재판결과 자신의 이름을 앰프 이름으로 사용치 못하게 되자 만든 회사로 첼로(CELLO), 마크 레빈슨과 쌍벽을 이루는 크렐(KRELL), 1960년대 창립하여 지금까지 진공관식 앰프를 꾸준히 제조하고 있는 오디오리서치(AUDIO RESEARCH), 카운터포인트(COUNTER POINT), 은행원이면서 오디오 애호가였던 빌 콘라드와 루 존슨이 1970년대 중반에 설립한 콘라드존슨(Conrad Johnson), 일반 TR대신 진공관 특성에 가까운 FET소자를 중점적으로 채택하여 사용하는 특성을 가진 트레숄드(Treshhold) 등이 있다.

맥킨토시 MC2102 진공관 파워앰프

유럽 : 유럽의 오디오 제품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대개는 유럽 제품하면 바로 영국 제품을 생각할 만큼 국내에서는 영국 제품들이 초강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나라들 중 오디오 메이커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가 없을 만큼 그들의 기술력과 전통 또한 오래된 메이커들이 많이 있다.

부르메스터(Burmester :독일), 골드문트(Goldmund : 스위스), 자디스(Jadis : 프랑스), 프라이메어(Primare : 덴마크) 등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나라의 앰프를 보면 각각 그들 나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부합된다고 할 정도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부르메스터의 경우 음악가 출신인 경영진이 디자인한 제품으로 마치 공장의 전기기계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한 차가운 외관(샤시의 재질이나 마무리 솜씨는 공예품 수준이다)과 함께 정밀한 회로 설계, 단정하고 세련된 음색이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모든 입력 소스를 모듈화하고, 이것을 메인 기판 위에 수직으로 삽입하도록 되어 있다.

골드문트의 경우 스위스제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시계의 나라답게 100W 출력을 갖는 파워 앰프(미메시스3)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두께와 크기는 축소되어 있지만 내부에는 4개의 토로이달 트랜스와 8대의 전원부를 탑재하고 여기에 각각 별도의 필터를 탑재하고 있다.

Mimesis 18.4 Picture 

Mimesis 18.4M - 골드문트사는 종합 오디오메이커로 앰프는 물론 CD플레이어에서 스피커에 이르는 오디오의 거의 모든 품목을 생산해내고 있다. 위 사진에 나오는 앰프는 골드문트사의 하이엔드 급에 속하는 미메시스 모노+모노 파워앰프.(http://www.goldmund.com)

자디스는 화려하고 우아한 외관(금장)을 가지고 있다. 다분히 감성적인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외에도 진공관과 종합전자메이커로 잘 알려진 독일의 텔레푼켄(TELEFUNKEN), 지멘스(SIEMENS), 브라운(BRAUN)이 있고, 벨기에의 스피커 메이커인 B&O(BANG & OLUFSEN), 릴 데크의 재명사였던 스위스의 레복스 등이 있다.

Jadis DA60

영국 : 유럽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륙과는 별도의 철학으로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일궈낸 영국의 앰프들을 보면 과연 브리티쉬 사운드라는 것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찬탄을 불러일으키게 할 만한 제품 라인업과 함께 수많은 메이커들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국적인 앰프와 스피커의 대명사는 쿼드 앰프와 탄노이 스피커 일 것이다. 영국의 오디오 산업 특히 상업적인 앰프의 태동은 1930년대 말로 그 당시 제작된 영국산 진공관은 지금까지 일부 호사가들에 의해 애지중지 될만큼 그 우수성을 입증받고 있다. 왜, 영국하면 쿼드 앰프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가 하면 쿼드 앰프의 전통이 영국의 특성과 알맥상통하는 바 크기 때문인데, 보수적인 영국제 앰프들은 심사숙고하여 설계되고, 필드 테스트를 거쳐 출시되며 일단 출시된 앰프들은 모델 교체없이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킨다. 그렇다고 이들 제품이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과 회로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비록 외모와 기본 설계는 같지만 부품이라든지 내부회로는 꾸준히 개량되고 발전하고 있으며 이런 전통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이익을 위해 반영된다.

영국제품이 오디오 업계의 선두자리를 계속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이었다. 첫째. 소비자로 하여금 자신의 기기에 묘한 애정과 자부심을 느끼도록 한다. 구 모델임에도 계속 상점에 진열되고 판매되어 스스로 최신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며 그러면서도 내부는 끊임없이 개량한다.  둘째. 같은 모델이 장기간 지속적으로 생산되어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하며, 계속된 개량으로 고장률이 적고 고장이 나더라도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셋째. 외관 디자인이 출중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막상 집안에 설치하면 오래된 가구의 일부처럼 오랫동안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다.

뮤지컬 피델리티는 80년대 영국의 진공관 앰프 메이커였던 마이클 앤드 오스틴사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이클 안소니 퀸이 창립한 회사로 이 회사 제품은 국내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으며(개인적으로는 언젠가 A1시리즈는 재발매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왜? 내 첫 사랑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이 회사의 처녀작이었던 A1시리즈의 인기는 가히 선풍적이었다. 내부 회로도 알차고 TR로 진공관적인 음색으로 음악성이 풍부하다.

Musical Fidelity  A1 Special Edition 

나의 잊을 수 없는 첫사랑. 뮤지컬 피델리티(Musical Fidelity)  A1X 인티앰프 - 비록 저가의 입문기종이긴 했으나 현악기의 찰진 소리만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TR앰프임에도 A급 구동을 가능케 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녀석이다. 어테뉴에이터와 셀렉터의 문제가 곧잘 발생하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저가형 앰프로 AURA와 함께 기본기가 튼튼한 앰프. 사진은 스페셜 에디션으로 프리, 파워 분리형이다.

Musical Fidelity A5 Inti-Amp - 현재는 과거와 같은 명성은 누리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메리디안은 산업디자이너였던 루이스 로이드와 앰프 설계자인 밥 스튜어트가 국내에는 현재 CDP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앰프가 전문이었다. 미션. 기능이 단순하고 호화롭지 않지만 비교적 충실한 내부 회로를 가지고 있으며 출력도 적당하다는 면에서는 상당히 영국적이나 디자인적으로는 다소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가로로 길지 않고 세로로 길기 때문에) 그외에도 턴테이블 메이커로 널리 알려진 린과 네임, 캘빈 랩스, 진공관 계열의 오디오 이노베이션 등이 있다. 영국 제품들은 이른바 브리티시 사운드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외관보다는 내면적 충실도를 높이고, 불필요한 스위치류를 과감히 삭제하고 미국 제품들 처럼 최고급 부품은 아닐지라도 양질의 엄선된 부품들을 채용하여 음악애호가들에 의해 철저한 검증을 거쳐 제작되었기 때문에 음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들의 보수성 때문에 80년대 이후 세계적 조류라 할 수 있는 AV화와 디지털 응요기술 측면에서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는 것이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하이엔드급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전통답게 보수적이고 실용적인 오디오 애호가들이라면 영국제 앰프들은 아직도 그 매력을 전혀 잃지 않고 있다.

초보시절에 알아두어야 할 앰프 상식 몇 가지

1) Simple is Best!
영국제 혹은 유럽제 앰프는 너무 단순해서 라우드니스라든지, 밸런스, 톤 콘트롤, 헤드폰 단자 등이 아예 없는 앰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일제 앰프 등에 익숙해 있는 사람은 얼른 보아 이해하기가 힘들지 모르지만, 오디오 매니아들 사이의 유명한 격언 중 하나가 “Simple is Best.”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디오파일들에게 영국(혹은 유럽)제 앰프들이 인기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별로 쓸 일도 없는 기능에 투자할 돈으로 그만큼 필요한 부분에 더욱 투자할 수 있고, 부가 기능을 장착할 시에 발생할지도 신호의 간섭을 최소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테이프 모니터 기능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그래야 테이프 카피가 가능하다, 대부분 있지만 가끔 없는 앰프도 있다).

2) 앰프의 출력 표시 - 실효출력이 진짜다
대출력의 앰프일수록 고가격, 고성능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출력과 앰프의 성능을 연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오디오 시스템이나 분리형 앰프를 구입할 때 주의할 것은 실효출력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채널당 50w짜리 앰프의 경우 최대출력은 이의 3배 정도, 뮤직 파워에서는 2배 정도의 높은 수치로 표시될 수 있다.  따라서 앰프의 규정출력 표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어야 올바르다.
- 실효출력(1㎑ 8Ω) 20㎐-20㎑, 100W+100W
이 수치는 인간이 청취할 수 있는 가청주파수 대역, 즉 낮은 신호에서는  20㎐(20.000㎐)를 기준으로 하여 스피커의 부하저항을 8Ω으로 출력 표시한 것이다. 또 같은 출력일지라도 측정 임피던스가 다를 때 다음과 같이 출력을 높게 표시해줄 수 있다. 실효출력(1㎑ 4Ω) 20㎐-20㎑, 150W+150W

3) 성능이 좋은 고가품일수록 내부회로는 복잡하다
앰프의 성능을 말할 때 주파수 특성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가청대역인 20㎐에서 20㎑까지를 평탄하게 고른 소리로 들려줄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주파수 특성에 따라 주파수 대역폭도 넓어야 하이파이 앰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을 파워 앰프에서 출력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대용량이 충분하고 이에 따라 사용하는 부품 소자들도 이런 규격에 맞는 대용량을 쓰기 때문에 소요출력에 의해 주파수 특성이 약간씩 변화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저음역에서는 전원이 출력에 대응하지 못해 최대출력까지 올라가며 이때 음이 일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또한 고음역에서도 볼륨을 높이면 소리가 일그러지고 이로인해 최대 출력은 점차 줄어든다. 이런 것을 ‘전고조파의율’이라고 하며 파워 앰프에서 실효출력을 표시할 때 이 음향변질도, 즉 전고조파의율을 표시하는데 흔히 THD(total hamonic distortion)이라고 표시한다. 이 의율은 가급적 적은 것이 좋고, 0.01%이하라면 좋은 수치라 할 수 있다.

성능 좋은 파워 앰프는 내부회로 설계상 차이가 있는데 단순(음질중시)형과 내부회로가 아주 복잡한 첨단형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음질이고, 비교적 고가로 판매되는 파워앰프일수록 내부 회로가 복잡하다. 이것은 제조 회사가 독자적으로 특수하게 개발한 회로를 사용하기 때문인데 고가의 분리형 앰프일수록 매칭이 까다로와지는 것도 이런 회로의 예민함 때문이다.

4) 스피커 한쪽에서 소리가 안 날 때는 출력부 이상이 많다.
앰프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 한쪽의 소리가 안 날 때가 있다. 이 경우는 대부분  출력부에 이상이 생긴 것이며 십중팔구는 퓨즈가 잘못되었거나 출력석이 나간 상태이다. 파워 앰프 출력단의 고장은 대개 사용자가 잘못 취급한 경우에서 온다. 때로는 외부 전류가 과입력 상태가 될 때에도 일어나는데 자동 차단회로가 설치되어 있을 경우 퓨즈가 나가고 때에 따라서 출력석에 영향을 주어 고장을 일으킨다.

스피커 연결선을 잘못 이어주었을 때에도 문제가 된다. 이는 임피던스 매칭에서 서로 다른 부하저항인 8Ω과 4Ω을 같이 묶어 사용할 때 또는 내부 온도가 상승했을 때 일어난다. 또한 파워앰프는 전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전기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 저음역에서 지저분한 소리가 섞여 나올 수 있다.

5) 앰프가 최대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실내온도는 20-22도
앰프가 최대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20-22도가 적당한데, 가끔 겨울철 아침 일찍 음악을 들으려고 할 때 재생음이 비정상적으로 들릴 때가 있는데 이것은 앰프 고장이 아니라 온도 탓이다. 여름철에는 앰프 몸체의 온도가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출력이 높은 앰프일수록 열이 많이 나는데 트랜지스터형 앰프의 FET회로 구성에 내부온도가 125 - 175도가 되면 경우에 따라 파손될 수도 있다.  모든 앰프의 출력부는 반드시 전력을 소비하며 TR FET구성회로도 출력 크기에 따라 전력을 소비하는데 이때 열이 발생한다. 출력이 높은 앰프일수록 통푸이 잘되는 곳에 설치해놓고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6)습기는 앰프 최대의 적이다
습기는 앰프 최대의 적이다. 습기가 있는 곳에 앰프를 계속 방치해두면 볼륨이나 접속 스위치 같은 곳에 많은 잡음이 생긴다. 예를 들어 앰프 근처에는 화분같은 것을 두지 말아야 한다. 습기는 리스닝룸의 온도가 내려가는 새벽녘에 내려앉기 때문에 이때 앰프의 접속부에 잇는 먼지 등 이물질과 결합하여 접속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잡음의 원인이 된다.

특히 사람의 손이 자주 닿지 않는 앰프 후면은 자주 청소해주지 않을 경우 습기와 이물질이 쌓여 신호전송을 방해한다. 이것은 습기가 연결코드의 접속 부위를 산화시켜 곰팡이균이신호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앰프를 장기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비닐 커버를 씌워주도록 하고, 자주 청소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휘발성 클리너로 닦아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7) 볼륨 스위치 조절도 중요하다.
앰프를 사용할 때 제일 손이 많이 가는 곳이 전원 스위치와 볼륨 노브인데 볼륨을 한 자리에 오랫동안 고정시켜놓았을 때는 접점불량이 발생할 수 있다. 처음에는 마찰음같은 잡음이 생기며 시간이 흐를수록 잡음이 증가하여 결국 음질이 나빠진다.

또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소스를 바꿀 때 볼륨은 그냥두고 볼륨은 그대로 두고, 소스만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순간적으로 찌그러지는듯한 소리가 몇초간 들리는데 이런 잡음은 원만히 흐르고 있는 신호를 순간적으로 역류시키기 때문에 스피커와 앰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소스를 교체할 때는 볼륨을 0으로 놓고 조작해야 한다.

8) 앰프는 출력이 높을수록 구동력이 좋고, 음질도 좋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동력과 출력, 출력과 음질, 구동력과 음질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출력이 높은 앰프일 경우 구동력이 좋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손쉬운 앰프 음질 개선
앰프는 전원부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는 기기이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밥굶고는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앰프에 있어서 양질의 전원공급은 좋은 소리를 듣게 되는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1) 양질의 전원을 얻는다.
앰프의 내부 회로는 그대로 두더라도 전선을 타고 유입되는 디지털  관련기기의 펄스성 잡음, 전압 불안정에서 오는 이상작동, 주파수 변동 등 유해요소를 제거해 주면 제거한 만큼 좋은 소리를 듣게 된다. 특히 진공관 앰프의 경우 전압의 변동에 따라 바이어스 전압이 달라지게 되므로 사용진공관의 수명은 물론 기기의 안전성을 크게 해치므로 정전압 장치가 내장되어 있는 AVR의 사용이 필요하다.

AVR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지만 부하변동에 따른 응답속도가 빠른 TCR방식이 좋다. 일부에서 우수성을 정설처럼 여기고 있는 기계식 AVR은 응답속도가 느려 클래식음악과 같이 다이나믹 레인지가 넓은 부하상태를 맞게 되는 경우 순간적으로 변하는 전압의 변동에 대해 민첩하게 반응을 하지 못하므로 이런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양질의 전원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일단 노이즈 필터 등을 사용해 좋은 상태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원의 극성 체크도 중요하다. 극성 체크를 위해선 검전 드라이버나 테스터, 극성 체크 미터같은 기기들이 필요하지만 간단리 해결할 수 있으므로 점검후 각 플러그에 표시를 해두면 위치를 옮기거나 다른 곳에 설치할 경우도 참고가 된다.

2) 앰프에 가해지는 전기적 충격을 최소화한다.
파워 스위치의 작동 순서도 중요하다. 이유는 스피커나 앰프를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전원을 켜는 순서는 소스쪽에서 스피커 방향으로, 쉽게 말하자면 켤 때는 CDP, 턴테이블 →프리→파워의 순서로 하고 끌 때는 이와 반대의 순서로 해야 한다. 솔리드 스테이트(TR) 앰프의 경우 2-3초, 진공관 앰프라면 30초 이상의 시간차를 두고 ON-OFF해야 순간적인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AC코드를 가급적 굵고 절연이 잘 된 것을 사용한다.
앰프에 있어서 신호출력과 소비전력은 비례하므로 AC 코드 측의 전압 변동에 의한 신호가 새어나오는 경우 AC코드를 타고 피드백되는 경우가 생기므로 가급적 AC코드는 굵고 절연이 잘 된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정격전류가 15A이상인 전원 코드를 선택하고 고무 등으로 절연된 것을 사용한다면 저음이 풍부해지는 느낌을 얻을 수 있으며 음의 밸런스와 밀도가 세밀해진다.

4) CDP나 DAT 플레이어 같은 디지털 기기를 함께 사용할 경우  디지털 노이즈가 AC코드를 타고 그대로 유입되므로 디지털  기기와는 가급적 같은 콘센트를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쩔 수 없다면 콘센트내에 컴퓨터용 노이즈 컷 필터를 연결해서 디지털 노이즈를 제거하거나 전용의 아이솔레이션 트랜스포머(Isolation Transformer)를 사용해 전원으로부터 잡음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

특히 전원 유도 잡음은 신호레벨이 낮은 프리앰프의 포노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의 영향을 감소시키는 방법은 프리앰프, 카트리지, 승압트랜스 등의 낮은 신호를 처리하는 코드 주위에 전원 트랜스나 고주파 발생 가전기기 등을 가까이 놓지 말아야 한다.

5)  볼륨 다이얼(가변저항기)의 교체도 음질 향상을 가져온다.
앰프를 사용하는데 있어 사용빈도가 가장 많은 부분이 볼륨 다이얼(가변저항기)일 것이다. 이 부분은 없앨 수는 없고, 이상적인 구조는 드문 앰프의 필요악인 셈이다. 여러 메이커에서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긴 하지만 가변저항기 자체의 경년변화를 감수하며 그런대로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구형 앰프의 구입시에는 볼륨부의 고장유무를 반드시 확인해야 할 만큼 이 부분은 앰프 전체에서도 특히 고장이 많은 파트이며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오래 사용하면 접촉불량 등이 생겨 잡음이 발생하고 순간적으로 음량이 커지거나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특히, 다이얼식이 아닌 레버식 볼륨의 경우 이런 고장이 특히 많다.) 첼로 앰프의 경우 스텝-업식 어테뉴에이터를 사용하여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이런 부품은 구하기 힘들다. 많은 이들이 아쉬운대로 접점부활제 등으로 임시변통을 하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양질의 볼륨 컨트롤(가변저항기)를 구해 교체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6) 앰프의 진동방지에도 힘써야 한다.
파워앰프 같이 묵직한 기기도 스피커의 음압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것은 보통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강력한 힘으로 앰프를 진동시킨다. 이렇게 되면 내부의 부품들 특히 PCB 기판 등이 진동하게 된다. 실제로 방진처리가 잘된 중량급 앰프에서 훨씬 안정되고 묵직한 소리를 내준다. 앰프의 설치는 되도록 단단한 곳에 하고, 앰프의 윗면에는 방열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동을 억제할만한 무거운 것들을 올려놓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음질이 좋아진다는 거슬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최근 생산되는 앰프들이 나름대로 방진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근거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7) 사용하는 기기만 연결해둔다.
사용하는 최소한의 기기만을 연결해 그때그때 사용해야 한다. 특히 카세트 데크의 코드는 반드시 빼두는 것이 유리하다. 이유는 녹음을 위한 단자(REC-IN)은 셀렉터 스위치를 거치지 않고 직접 프리앰프의 내부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하는 핀코드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세트 데크는 되도록 사용할 때만 연결해야 한다.

8) 인터 케이블은 자신의 시스템에 맞는 것을 사용한다.
케이블을 바꿔 연결하면 분명히 음이 달라진다. 하지만 바뀐 음이 이전보다 좋아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전송효율의 극대화로 풍부한 에너지감과 맑은 소리가 난다는데에는 동의 하고 있으나, 그것이 음질 개선이라는데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오디오 기기에 있어서 만큼은 첨단 신소재라는 것을 사용해서 성공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이상의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앰프의 음질개선방법은 크게 전원부, 방진대책, 열화부품의 교체, 연결코드의 역할 등을 말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전원부에 대한 것이다. 오디오에 앰프가 존재하는 한 바뀌지 않는 것은 전원부가 충실한 앰프가 좋은 앰프라는 것이다.

----------------------* 10년 전에 쓴 글이라 요새 오디오 사정하고는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음을 기억해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