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 page 9 무진기행(霧津紀行) 중에서

 

 

무진기행은 올해 꼭 읽어야지 했던 책 중 하나였다. 몇 년 전에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것을 보았던지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았던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무진기행]이라는 제목만은 또렷이 남아서 2021년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넣어 놨었다.

 

믿지 못할 만큼 운이 좋게도 올해 김승옥 작가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무진기행] 책이 출간되었고 그 소식에 기뻐서 후다닥 게시글을 열어 책 표지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안개. 안개를 떠올렸다.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았는데 왜 안개가 자욱한 무진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안개가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가..? 했는데.

 

무진과 안개.

이 책 소개에도, 책 표지에도, 책의 뒤표지에도 안개를 말하고 있다. 김승옥 작가의 사인이 적힌 쪽에서조차.

아. 내가 [무진기행]에서 바로 안개를 떠올리게 된 것은 당연한 거였구나.

 

그리고 이 책의 모든 작품들에 안개와 같은 물기가 서려있었다.

 

 

김승옥 작가의 탄생 80주년 기념 출간이다.

대표작인 [무진기행]이 책 제목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아마도 유명한 단편 소설 11편이 함께 실렸다. 이런 횡재가!!!!

 

김승옥 작가에 대해 검색해보니 '한국 문학사 불멸의 천재'라고 하는데 작품 수가 많지가 않다. 20편 정도 밖에 안되니 이 책에 실린 12편이 김승옥 작가의 천재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차례는 출판사에서 구성한 순서이지만 실제 작품이 쓰인 순서는 아래와 같다.

 

생명연습 -> 건 ->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 역사 -> 무진기행 -> 차나 한 잔 -> 서울, 1964년 겨울 -> 다산성 -> 염소는 힘이 세다 -> 야행 -> 그와 나 -> 서울의 달빛 0장

 

1962년 생명연습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당시 김승옥 작가의 나이가 23세였다고 하니 당시 문인들도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도 충격을 받았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그때도 23세의 나이는 어리다고 생각되는데 말이다. 23세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거구나. 나는 23세에 무얼 했었더라.

 

[무진기행]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 책을 뒤늦게 읽은 나를 제외하고 다들 내용은 알고 있을 것이다.

책 소개 프로그램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고 책은 읽지 않았어도 제목은 들어봤을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품이다.

 

주인공 윤희중이 고향인 무진을 얼마간 방문하는,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무진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 사이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짜여 있어 간결한 글을 보면서도 마치 영상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주인공에게 무진은 고향이지만 고향이 아니다. 과거의 상처이기도 하고 상실의 고통을 토해내 묻어버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하 선생'에게 '당신은 제 자신. 옛날의 저의 모습'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무진이 있다."

 

[생명연습] 은 작가의 첫 작품인데 읽어보게 되면 알겠지만 슬픔이나 아픔, 고통을 넘어선 그 무엇 때문에 여운이 많이 남는다.

그 무엇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해할만한, 아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건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충격적이고 슬펐다. 그러면서도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이 책에 있는 작품들 중에서는 [서울, 1964년 겨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 명의 남자가 나온다.

1964년의 서울 이야기이다. 선술집이 나오는 첫 글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요즘은 포장마차도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있다고 해도 여러 이유로 가지 않게 되었는데 어쩐지 옛날의 선술집, 포장마차는 쓸쓸하지만 정겹고 차디찬 장소이지만 마음에 온기를 넣어주는 곳으로 느껴진다. 그 시절만의 추억 같은 것. 그런 곳에서 세 명의 남자가 만나서 헤어지기까지의 이야기.

그중 서른대여섯 살짜리 남자. 그 남자는 현대에도 살아있다. IMF, 금융위기, 코로나 등등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 남자다.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25살 이후의 모든 사람이며 1960년대 사람이면서 2021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 책에 있는 12편의 작품 모두 잘 읽힌다. 후루룩 읽고 뒷맛이 씁쓸해도 금세 털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다.

깔끔한 문체지만 우울하고 껄끄럽고 답답하고 자극적이라 그런가.

 

문체는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데 6.25 사변, 피난처, 통금 사이렌, 다방, 레지 등의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올 때 낯설다.

게다가 1960~70년대 소설이라 지금의 감수성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현재의 성인지감수성을 잣대로 읽는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끼인 세대에 있는 나로서는 세상이 이렇게나 변했구나 싶은 정도지만 요즘 젊은이가 읽는다면 '엥..?'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시대를 반영한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읽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김승옥 작가의 12작품이 끝났다.

비록 [무진기행]이 희망을 노래하는 책은 아니지만 읽고 싶었던 책이라 즐겁게 읽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작가가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시대별로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 아마도 책을 소개해 주는 팟캐스트에서 [무진기행]을 들었던 것 같아서 찾아봤다. 팟캐스트 '일당백' 에서 한국 단편을 소개해 줄 때 포함되어 있었다. 책을 읽고 다시 들어보니 '나 스포 당했었구나...' 싶네. 기억이 안 났던 것이 다행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

 

**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작품 중 1967년 [안개] 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김승옥 작가가 직접 각색했고 흑백영화. 보고 싶은데 어디에서 볼 수 있는 거지...?

 

 

 

※ 위의 글은 도서리뷰단에 선정되어 해당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