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와 다른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문제적이다. 그리고 시선의 문제는 항상 중층적일 수 밖에 없다. 어떤 것을 향하는 시선은, 시선의 출발점인 자기 자신과 시선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것이 교차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문화, 문명을 관찰하는 일은 상당히 복잡한 일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것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기에 끝없는 문제를 생산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외부의 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는, 특히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문제제기가 되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단일한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외부의 것을 타자화 시키는가? 라는 일련의 물음을 제기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방식”이고 “하나의 이론 및 실천체계로 창조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거나 그것에 의해서 구성된 이론들이 오직 왜곡만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정한 정도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으며 – 물론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 착각임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 외부의 것에 대한 성실한 탐구에 바탕하고 있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은 권위를 획득하게 되고 지식-권력으로서, 물질적인 힘으로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탈리즘적인, 너무나 오리엔탈리즘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자신이 밝혔듯,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미국인이 오로지 텍스트와 설문조사에 의존하여 일본에 대한 ‘상’을 그려냈다. 물론 일본을 방문했냐 하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책을 “일본인의 보편적 특성을 그들의 생활방식에서 검토한 책(33p)”이라고 밝히는 점에서, 더 나아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33p)”라고 밝히는 점에서 그녀는 완벽한 오리엔탈리스트가 되며 『국화와 칼』은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의 전형이 된다.



저자가 일본인의 보편적 특성을 차례로 검토하며 인용한 글들은 상당히 대담하다. 일본인의 인정관을 다루면서 인용한 “일본인은 어느 시대에나 이와 같은 악의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그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태도를 회피해온 것으로 생각된다(253p).” 라는 구절과 일본소설에서 묘사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관한 부분에서 인용한 “일본인이 현실과 이상의 대립에 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224p)”라는 두 가지의 조지 샌섬의 인용은 그 동안 미국과 서양에서 축적 되어왔던 일본에 대한 ‘시선’을 여과 없이 받아드리면서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동시에 저자의 평가 또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예를들어, “짧은 기간이라도 미국에 거주한 적이 있어 딱딱하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은 미국의 행동 규칙을 받아들인 일본인에게는, 전에 그들이 일본에서 보낸 그 답답한 생활을 되풀이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300p).”라는 평가와 저자가 결론적으로 국화와 칼의 비유를 통해 제시한 부분, “국화는 철사 고리를 떼어내고 그처럼 정성껏 손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게 피어 자랑스러울 수 있다[…]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게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이다(387-388p)” 이러한 저자의 일본 문화에 대한 평가는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시선, 즉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와 그에 걸맞는 문화 속에서 일본의 두 가지 상징이 조화될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그것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억압하는 동시에 생산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끝없이 자신의 지식과 시선을 생산해내고 공고히 하며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의 대상이 되어왔던 ‘타자’에게 그 시선을 내면화 시킨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은 하나의 틀이고 그것을 통해서만 타자는 이해될 수 있고 친숙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국화와 칼』이 매우 유용한 책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의 계층제도, 온, 기무, 기리 등의 개념을 잘 설명하고 이것은 일본인의 주요한 특징들을 잘 설명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화된, 추상화된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미리 접하는 것은 실제로 일본과 일본인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공포를 상당 부분 완화시켜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익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분석한 일본인과 일본 문화는 일본인이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코이거나 다리일 뿐이다. 코와 다리가 코끼리 전체로 간주되는 순간 ‘유익한 오해’는 억압적 인식체계로 전환되고 일본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된다.



독자들이 『국화와 칼』을 하나의 ‘유익한 오해’라고 간주하고 읽어 나갈 때, 일본과 일본인은 우리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일본인은 우리에게 영원히 먼 존재이다. 그것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유익한 오해’를 그들과 활발한 소통을 통해 부수어 나갈 때, 우리는 잠시나마 일본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 라는 희망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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