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평소 박경리하면 읽은 '토지'에 비추어서만 판단하고 짐작해왔고, 다른 책을 읽어볼 필요성을 느끼던 차, '장정일의 독서일기3'에 하필 첫 책으로 이 책이 올라있었음은 독서의욕을 더욱 촉발시킨 동기라 하겠다.

사람이 허구를 가정한다는 것은 경험의 한계가 있는 것인지 역시 이 소설도 토지와 매우 비슷하다. 우선 한 가문의 몰락이 중심 제재라는 것부터 최치수나 김약국같은 조용하면서 고집센 노인, 그 주변에는 언제 어디서나 드글거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무리들, 또한 사랑에 의한 여러 엇갈린 인간관계와 그들의 인생, 다양한 부모 자식의 형태,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유사점은 몰락을 회생시키거나 그나마 가문을 건재하도록 하는 열쇠를 쥔 마지막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과 출생에 대한 어두운 비밀과 그에 기인한 고통스럽게 붙박힌 개인의 삶이 길게 깔려있다는 점이다.

내가 박경리의 소설을 읽고 싶어하는 이유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난무하는 사투리다. 토지를 읽을 때도 느꼈던 한 가지 의구심은 도대체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이 소설을 무슨 맛으로 읽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진한 사투리로, 그 단어와 그 어투가 아니면 안되는 간결한, 뉘앙스를 가지는 말들의 잔치다.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하게 말하는 그들의 말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나는 매 순간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그 말이 아니더라도, 박경리가 만들어내는 그 다양하고도 하나같이 다른 그 인물들은 활력을 가진다. 어느 하나 두리뭉실한 인물이 없이, 모두 또렷하다. 욕심이 있건, 포악하건, 착하건, 되바라졌건 간에 나름대로 할 말이 있는 성격의 일관성과 개성이 있다. 그 모두가 박경리의 손바닥 안에서 노니는, 제각각의 분신들이다.

박경리는 항상 아주 미약하지만 가녀리게 숨쉬는 희망을 보인다. 그는 진정한 강자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폭력이나 힘을 뛰어넘는, 조용한 인간의 힘에 굉장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희나 김약국의 둘째 용빈이 대표적인 인물들. 그들의 차분함과 냉정함, 이성과 사고의 힘, 그 뒤에 숨은 유약함과 애정들, 책임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을 은연 중에 내포하면서 이야기를 결론 짓는다.

무엇보다 박경리가 내게 읽히는 이유는, 나의 끊을 수 없는 관심사인 '가족'이다. 근원적이며 가장 원초적인, 노골적인 욕망들이 넘실대는 그 곳의 이야기들. 모든 사회와 조직는 이 가족들의 확대화에 지나지 않는가. 생활에 밀착해 있어 가장 리얼하기에, 내가 내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에 부닥칠 때 가장 명확하게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 소설들.

덤으로 장정일의 이 책에 대한 짤막한 서평에 대해 언급하자면, 장정일은 토지를 필히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장정일이 언급한 p.242-250의 확장에 대해서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그 부분은 박경리의 소설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디테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그 부분이 더 많은 소설이었다면 새로운 소설이 되었을 망정, 박경리를 내게 또렷이 부각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박경리는 집합적인 민중의 힘이나 국가에 대해서보다, 한 개인의 힘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보이기 때문이다.

약간 서두가 급하고 너무 간략한 것이 숨이 가쁘나, 중세의 영화처럼 고고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필독할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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