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귀 - 레제르 만화 컬렉션
장 마르크 레제르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간단히 말하자면, 맨날 안되는 짓만 골라해서 얻어터지는 어떤 아이의 아주 코믹한 에피소드 모음집이다. 책 뒤의 '추천의 글' 따위를 읽고 나서 느낀 것은 놔두고서라도, 하나 하나의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다. 한 예로, 사실적인 나체(그것도 부모의! 거기다가 자세를 보라!)를 그리다가 맞고, 결국은 울면서 평범한 아이의 그림-로보트, 별 따위를 그리는 아이를 보며 안웃을 수 있나?

그런데, 낄낄거리다가 나는 문득 놀랐다. 아니, 왜 나는 웃는 편이지? 내가 이 책에서 공감하는 것이, 이 아이와 같은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래, 나도 이렇게 괜시리 얻어맞거나 당한 적이 있었지, 하며 읽었던 것이 아니었나?

세상의 모든 코미디에는 슬픔이 있다. 영화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도 한 주간지의 인터뷰에서, 콧물이 갑자기 나왔을 때 개인은 당혹스럽지만 주변사람은 웃어버리는, 코믹 이면의 잔혹성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이 빨간귀도 마찬가지. 빨간귀는 항상 의도와 무관하게 얻어맞지만, 웃고있는 독자인 나조차도 그에게는 무자비한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웃는 것이 갑자기 미안해진 나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다시 빨간귀. 그는 절대 기죽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언제나 꿋꿋하게 할뿐이다. 누군가에게 얻어맞거나 제제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준은 상대적인 것.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고문에 굴하지 않는 작은 영웅, 빨간귀. 아마도 레제르는 이 세상에 냉소를 보내면서,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라고 한 가닥 희망을 심어놓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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