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로서의 유물론 문화과학 이론신서 3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경훈 옮김 / 문화과학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유머로서의 유물론'에서 보이는 가라타니 고진의 관심은 대단히 폭넓고 다양하다. 이는 그의 다른 저서 '은유로서의 건축', '탐구Ⅰ', '탐구Ⅱ'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것들과는 또 달리 일정한 방향성을 두고 쓴 책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다 어렵게 읽히는 면이 있다. 그는 때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 관하여, 또 때로는 칸트의 초월론이나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에 관하여, 또 때로는 에도 전기의 유학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나 일본 민속학의 수립자였던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 근대초극론(近代超克論)의 단초를 제공했던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西山幾多郞)에 관하여 논한다. 그 어지럽도록 현란한 지적 도정은 도무지 10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여간해서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 지경이다.

처음에는 ‘제목이 근사한데’라며 무심히 책장을 넘겼던 나는 읽어가는 도중에 난해한 내용 속에서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그러다 2부의 첫 번째 글 「유머로서의 유물론」에 이르러 ‘아,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었지’라며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다가 다시 제목 따위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야 제목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 ‘유머로서의 유물론’이라는 제목이 대단히 많은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실상 이 짧은 논문이야말로 이 저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이 글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가 시작했던 사생문(寫生文:샤세이분)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것은 나쯔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지적한 것처럼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태도란 ‘자기를 포함한 대상을 냉정하게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애정을 지니고’ 있는 태도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태도가 흥미롭게도 프로이트가 말한 ‘유머’에 대한 기술과 완전히 합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머’는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서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보들레르가 ‘동시에 자기이며 타자일 수 있는 힘’으로 파악했던 ‘웃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입회한 그의 제자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그 ‘웃음’에서도 발견된다. 간략히 말한다면, 그것은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 일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이며 메타 레벨에 서면서도 메타 레벨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칸트의 초월론에 이른다. 칸트가 말한 ‘물 자체’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변형이 아니며 오히려 이념의 가상성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인간은 현상만 인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넘어 생각하고 말한다”는 점에서 ‘초월론’은 ‘유머’이며 자기의 무력함을 우월성으로 바꾸는 ‘낭만파적 아이러니’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맑스에 이른다. “공산주의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어떤 상태, 그것을 향해 현실이 형성되어야 하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상의 상태를 지양할 현실적 운동이다. 이 운동의 제 조건은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제 조건으로부터 발생한다.”('독일 이데올로기') 가라타니 고진은 맑스의 이러한 말이 ‘공산주의에 대한 초월론적 비판’이며 ‘맑스의 유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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