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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 - 사춘기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불온서적들
이재익.김훈종.이승훈 지음 / 시공사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언제나 누구에게나 고백하건데, 나는 어릴적부터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문단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수학 잘하는 논리적인 아이였다. 그러다 첫사랑을 통해 시를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이정하의 시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 중 특히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에 나온 시들을 보면서 따라 써보기도 하고 많이 울기도 하였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이룬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나의 '빨간책'은 다름 아닌 이 시집 한권이었다.
빨간책이라고 하면 19금 딱지가 붙은 야한 소설이나 만화를 생각하기 쉽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적 학교에서는 꼭 매해마다 '권장도서'를 정해주었는데 이 권장도서와 반대되는 말이 빨간책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사춘기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권장도서가 아니라 이 불온서적과 같은 빨간책이라고 하면 큰일날 소리일까?
이 책은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을 진행하는 세 명의 PD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의 독서록과 같은 책이다. 총 3부, <1부. 언제쯤 어른이 될까>, <2부. 그렇게 우리는 자란다>, <3부. 소년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1부가 이재익 PD, 2부가 김훈종 PD의 불온서적인지 알았다. 어쩐지 문체가 다르더라니. 내가 느끼기에는 1부, 2부에 가릴 것 없이 세 피디들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 준 다양한 종류의 책들에 대해 소개하고 감상평아닌 감상평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문학 평론가도 아닌, 그렇다고 문학가도 아닌 내가 저자들의 책을 '감상평아닌 감상평'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건방져 보일까. 감상평이라고 하면 문학 평론가가 자신만의 정해진 잣대를 들고 대중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평가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 나는 술술 읽히는 이 책을 감상평 아닌 감상평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나름 빨간책을 읽다가 내 마음에 들어온 책이 몇 권 있는데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 무라카미 류의 <69>,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그것이다. 원래 시로 등단을 꿈꾸는 나에게 어떤 시가 하찮을 수 있겠냐만 이 시집을 소개받는 순간 난 시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할 수 있었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보부아르가 쓴 소설책은 실존주의자가 썼음에도 설정부터가 더럽게 멋지고 재미있는데 실존주의 철학까지 담고 있다니 이 책은 또 어찌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69>에서는 진지한 내용을 잔뜩 열거해놓고는 천연덕스럽게 '그건 거짓말이고 실은 이렇다'라면서 이야기하는 반복 기법과 다른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불편함이 빠진 자리를 유쾌함이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탁월한 저자(이승훈PD)의 비유(태어나서 아이스크림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이에게 아이스크림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그 맛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듯 성석제의 글도 이와 같다.)와 작가(소설가 성석제)의 '시치미 떼기'가 무라카미 류의 <69>와 비슷하다고 느낀점에서 나는 이미 이 책들에게 빠져버렸다.
평소 책을 읽다보면 내가 그 책을 통해 얻은 점이나 생각한 것, 느낀 점을 간단하게 기록하는데 그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책에 관해서 어떠한 것을 느끼고 생각했을까?'가 궁금하였다. 독서광이라는 이 세 명의 피디가 고르고 고른 이 서른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을 생각과 느낌을 접하다보니 나도 머지 않아 이 31권의 책을 다 읽지 않을까 하며 독서광인 친구에게 구미에 맞는 책을 소개받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