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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 삶의 굴곡에서 인생은 더욱 밝게 빛난다
김재식 지음, 이순화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아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 길고 긴 터널과도 같은 6년의 간병 생활을 하면서 가족, 사랑, 인간관계, 재산, 명예에 대한 이전의 생각들을 뒤집으며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듯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창 예민한 사준기를 따뜻한 부모 품에서 보내지 못한 세 아이들도 평범하지 않은 고된 여정을 묵묵히 잘 감당해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주었다. 삶에 정답은 없고, 그 끝은 미완성이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잘 걸어왔다. 그 사실에 감사한다.
눈이 엄청 내리던 날, 막히는 출근길 도로 한복판에서 기사를 읽었다. 희귀 난치병에 걸린 아내의 간병을 하는 남편. 새벽에 병원비를 위해 일터로 향하던 중이었다. 핸들을 꺾어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 날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편은 차마 핸들을 꺾지 못했다. 사지가 마비되어 자신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내와 자신이 죽으면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남편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다시 하루를 또 맞이했다. 그리고 6년간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냈다. 그게 바로 이 책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다. 하얀 눈으로 인해 창밖 풍경이 어그러져보였다. 아니 어느 새 차오른 눈물 탓이었다. 요즘 세상은 갈수록 어찌나 안타까운 일들이 많은지. 이 추운 겨울을 힘들게 견뎌내고 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눈으로 인해 빽빽히 줄지어서 움직이지 않는 차들로 가득한 차가운 도로 위에서 따뜻한 이야기가 만나고 싶어졌다.
고난은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야 옥돌은 빛을 발한다.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고 막다른 골목에 몰려 보아야 주변의 옥석을 가려낼 수 있게 된다. 본인도 그렇지만 친구도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고개를 돌리거나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변함없이 대해 주고, 또 어떤 이는 더 가까이 다가와 자상한 도움을 주려 한다.
10년 동안이나 함께 일했던 직장 사장의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모습으로 저자는 감동받는다. 혹시 우리의 옛날 이야기 중 아버지와 아들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사람을 죽였으니 도와달라고 친구를 찾아간다. 아들의 많은 친구들은 아들을 외면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찾아간 친구는 아버지를 받아준다. 내 지인들은 어떠할까?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나를 그대로 받아줄까 아니면 밀어낼까? 사람을 죽인 것이 너무 극적이라면,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내게 손 내밀어줄 친구들은 몇명이나 있을까? 가족끼리도 안 서준다는 보증을 당연히 서 줄 친구들이 있는가? 반대로 나는 친구가 찾아오면 내가 그들에게 보증을 서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겐 너무 소중한 친구들 몇명이 있다. 많지 않아도 언제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이야기하고 눈물을 보일 수 있고 내 부끄러움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친구들. 감정이 아닌 현실에 빗대어볼 때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지혜가 필요한 밤
남의 암보다 내 감기가 더 아프다는 말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남의 상처보다 내 상처를 먼저 치유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인간의 한계다.
타인의 고통을 겪지 않은 내가 100%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안타까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나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픈 것과 더불어 오는 각종의 난제들. 어찌하여 그저 감기에 걸려 약 먹고 따뜻한 집안에 있는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남의 암보다 내 감기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다. 남은 호흡기를 달고 오늘내일 하고 있더라도, 열이 올라 침대에 누워있는 내 머리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남의 고통이 내게 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로, 약을 사주는 것으로, 후원해주는 것으로, 기도해주는 것으로 그들의 고통을 대신한다.
나만의 금지구역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나는 아내를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지, 아내를 외롭게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아내를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 함께 있는 것이지, 아내를 외롭게 하고 싶어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내가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였다.
"여보, 나는 이제 간병인이 아니야. 머슴도 아니고 매여 있는 몸도 아니야. 난 자발적으로 결심했어. 당신 곁에 있기로!"
아내는 무슨 소리인지 얼른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이젠 당신은 날 해고할 수도 없고 큰소리도 못 친다는 말이야. 내 발로 있겠다는 거니 꼼짝 못하게 생긴 거지. 그러게 권한 있을 때 잘하지, 아까워서 어째?"
그제야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은 집사람이 마음을 놓고 웃는다. 철렁했던 마음을 추스리고!
아내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자책했을까. 자신이 가정을 파괴시켰다고. 남편과 아이들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자신만 없어지면 된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천번이상 했을 것이다. 그런 아내에게 저자는 정말 공기와도 같은 사람이다. 자신을 숨쉬게 해주는 그런 사람.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모든 것을 버린 사람. 그렇기에 너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존재.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필요하지만 놓아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내에게 자발적으로 옆에 있어준다며 위트있게 이야기해주는 남편 어찌 더 사랑하지 않으랴.
말로 무엇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거늘, 말처럼 모질고 날카로운 송곳은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사랑하는 이를 아프게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이 가진 폭력성'에 길들여졌다는 증거 아닐까.
사소한 다툼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안 좋은 사이가 되고, 불행한 삶이 되고 마는 것 같다. 하나하나 처음에는 사소했더라도 나중에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도 그렇고, 최종적으로 자기의 일생도 그렇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폭력을 쓴다. 예쁘고 좋은 말만 해도 모자라는 시간이거늘. 어찌나 모진 말들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하고 뒤돌아서면 후회하면서 말이다.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앞에서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어도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누구나 마음 속에 생채기가 난다. 그리고 그 생채기가 오래간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너무 쉽게 그 무거운 말들을 가볍게 내뱉는다. 마음을 때리지 말자. 내가 말하는 상대는 분명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마음 다스리기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어느 순간 모두 포기해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엔 걷는다. 외롭고 힘든 순간 홀로 길을 걸을 때만이 내가 내 자신의 친구가 된다.
'혼자 있고 싶어.'라는 말. 오롯이 자기 자신과 만나고 싶을 때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수많은 포기의 유혹 앞에 선다. 그리고 선택을 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지.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포기하고 싶지만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내 자신을 가다듬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한다. 책을 읽기도 하고, 혼자 여행이나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자신의 방법에 몰두한다. 그것은 혼자가 되기도 하고, 여럿이서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자기자신 오롯이 혼자 정리한다. 결국 마음 다스리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내 자신과 마주할 때 가능하다. 힘이 들 땐 잠시 멈춰 자신과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내의 소원은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보는 것
가족을 위해 언제라도 밥을 지어줄 수 있는 부모라면 따뜻한 밥 한 끼 내 자식에게 지어 먹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아무 소원을 빌지 않아도 되는 그런 평범한 삶을 소원한다. 자신을 위해 어떠한 특별한 바람도 갖지 않는 축복을 누리고 싶다.
우리 엄마는 내가 밥 차려달라고 하면 그렇게 좋아하신다. 중학교 시절부터 거의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다. 엄마가 집에 안계셨던 탓도 있고 그덕에 나는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그냥 있는 반찬 꺼내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나가서 먹는 경우가 일상이었다. 맞벌이 부부의 집안이라면 대개 이해하는 레파토리다. 그렇게 이어졌기에 나는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는다. 그러다가 주말에 쉴 때 엄마한테 밥을 차려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엄마가 빙긋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더라. "나는 네가 밥차려달라고 하는게 그렇게 좋더라." 일찍 나가니 엄마는 깨우지도 않고 혼자 준비해서 나가버리고, 저녁에 들어와서도 밥을 먹고 들어오거나, 안 먹는 버릇을 들이니 엄마가 밥을 차려주시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엄마와 시간이 될 때면 이야기 한다. "엄마 밥줘."라고.
나는 그 고통을 겪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긴 하지만 100% 이해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을 도와줄만큼 내 생활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없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읽고나니 표지의 문구가 더 와닿는다. "그럼에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사랑입니다." 추운 겨울에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따뜻함. 많은 사람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