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아버지 -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감사의 글
신현락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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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란 단어는 언제나 애잔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란 말이 입에 착 감기진 않는다. 어색함에,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될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에 의해 나는 아직도 아빠라고 부른다. 더 친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아빠가 늙어버린 느낌이 나버릴까봐 무서워서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아빠는 내게 가장 큰 울타리였다. 딸바보인 아빠는 말괄량이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셨고, 내가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품에 안고 다니셨다. 그런 아빠의 머리는 어느 샌가 흰머리가 수두룩해서 염색을 하기 시작하셨고, 한없이 넓게 느껴지던 아빠의 등이 어느 샌가 작아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 정도로 성장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아빠를 제대로 대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아빠 눈에는 내가 아직 어린 아이일까? 딸바보였던 아빠는 딸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그러던 중 나는 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가 느끼는 아버지란 존재를 통해 나는 우리 아빠를 회상해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가장 잊히지 않는 간식은 아버지가 가져온 빵이었다.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도시락가방 안에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줄 빵이 들어 있었다. …… (중략) …… 지금 내가 다시 가장 맛보고 싶은 빵은 아버지의 도시락가방 안에 들어 있던 단팥빵, 배고픈 형제들과 반쪽씩 나누어 먹던 그 빵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 빵이 손에 주어진다고 해도 먹을 수는 없으리라. 그 빵을, 아버지의 간식을 내가 다시 어찌 먹으랴. 아버지의 사랑과 눈물이 들어 있는 그 빵을 아버지에게 드려서 맘껏 드시게 하고 싶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간식이 나오는지요. 이제는 자식 생각하지 말고 맛있게 잡수세요.'

 

  아버지란 존재는 언제나 가족을 우선시 하는 그런 존재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자식들에게 먹이고 싶었던 간식. 자신의 간식을 도시락 가방에 싸들고 오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어릴 적 종합사탕을 받을 때면, 아빠는 늘 계피맛 사탕만 드셨다. 맛있는 유과나 과일맛 사탕을 아빠에게 내밀면 아빠는 단 것을 안 좋아하신다며 맘껏 먹으라고 하셨다. 어릴 때에는 아빠가 계피맛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지금에서야 느낀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전부 양보하셨다는 사실을. 이제는 내가 아빠에게 먹을 것을 사들고 온다. 그리곤 아빠가 드시는 모습까지 본 후 방으로 들어간다. 아빠는 습관이 되셨는지 내가 무엇인가를 사오더라도 엄마나 나 아니면 오빠를 위해 남겨두시곤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옆에서 보고 있으면 아빠는 한 입 베어물고는 '맛있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신다. 나는 그 웃음이 정말 좋다.

 

  나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아부지라고 불렀다. 아부지란 호칭은 정겹다. 이 말을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 보면 아버지에게 어리광부리는 아들의 해맑은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이 말을 듣고 있을 아버지의 순한 미소도 떠오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아직도 아버지란 호칭을 부르지 않는다. 아빠가 늙으신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아서 두렵다. 언제나 나는 아빠에게 말괄량이 딸로 있고 싶다. 철없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막내딸이라는 일종의 의무감이 있으니까. - 우리나라에서 막내는 끝까지 철없고 귀염둥이 노릇을 할 의무가 있다! -

 

  나라가 세 살 되던 봄에 우리 부부는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따로 방을 얻었다. 아내의 청에 따라 독립을 결정하고 그 사실을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매우 서운해했다. 무엇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와 헤어지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은 이만저만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 일로 인하여 아버지와 부부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자식을 세간 내줬냐고 야단한 게 발단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손녀를 보기 위해 20분 정도 걸리는 우리 집을 가끔 찾아왔다. 그때 이미 아버지는 간암4기의 판정을 받은 몸이었으나 중병도 손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냥 오기가 민망했는지 우리 집에 오기 위해 아버지는 여러 가지 핑곗거리를 찾았다. 고춧가루를 들고 오기도 하고, 반찬이 될 만한 찬거리를 들고 오기도 했다.

  …… (중략) ……

  아버지의 속만 썩이던 자식이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그나마 핏줄을 안겨 드린 일이 내가 아버지께 드린 최상의 선물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 나는 아직 미혼이고, 아기가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글에서 손녀바보인 아버지의 사랑은 정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아버지가 지으셨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라를 보며 행복해하셨을 표정, 나라를 보내야 하는 서운한 표정, 당장이라도 보고 싶어 집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찾는 그런 표정까지. 우리 아빠도 내가 아기를 낳으면 저자의 아버지처럼, 어린 나를 보듬어주셨을 때처럼 좋아하실까? 내 어릴 적처럼 내가 손녀를 낳으면 아빠가 같이 동시도 녹음해주시고, 같이 책도 읽고, 같이 인형놀이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는 가정통신문을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두 분 다 맞벌이셨기 때문에, 사유서에 싸인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정통신문을 버렸다. 그런데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빠가 갑작스레 조퇴를 시키고 안과로 데려갔다. 이유는 내가 버려야지 하고 책상에 올려놓은 내 시력검사표를 보셨기 때문이었다. 딸의 시력이 나빠진 것을 아시곤 아빠는 바로 나를 안과로 데려가신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게 아빠의 자리는 매우 컸다. 어린 나를 품에 안고 있는 것도 아빠의 몫이었고, 유난히 몸이 약한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시는 일도 아빠의 몫이었고, 무슨 일이던지 딸이 원하는 것을 척척 해주는 것도 모두 아빠의 몫이었다. 그러니 아빠는 서운하셨을 것이다. 쑥쑥 성장해서 아빠와 멀어져가는 딸에게. 날씨가 이제 제법 쌀쌀해진다. 아빠와 함께 잠깐 나들이나 다녀와야겠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이만 줄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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